|
인기스타와 소위 국민배우, 거장 감독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저 세 항과는 천리만리 떨어져있는 듯한 기타노 다케시는 특이한 '스타'다.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누가 보지만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다"고 답했다는 이미 영화만큼이나 유명해져버린 일화도 있거니와, 이건 호감과 비호감 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장악의 문제다. 배우로서 또 감독으로서의 기타노 다케시 특유의 장악력.
|
한 여자는 함께 도시락을 먹던 공원 벤치에서 30년 동안 떠나간 남자를 기다린다. 아이돌 가수가 사고로 얼굴을 다치고 은둔해버리자 광적인 팬은 자신의 눈을 찌른다. 남자가 이별을 선고하자 여자는 미쳐버리고, 결국 두 사람은 빨간 끈―운명을 상징하는―으로 서로의 허리를 동여맨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다른 듯 닮은 세 쌍의 연인들의 사랑... 사랑? 고개를 갸웃거리는 관객들을 향해 기타노 다케시는 일갈한다. 어차피 야쿠자의 폭력도 두목에 대한 부하들의 애정표현의 일종이다. 다를 게 뭐가 있나. 애매한 사랑은 싫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잔혹성을 내포한다. 원래 사랑이란 이기적인 환상이다.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기타노 다케시는 그의 영화 속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꾸했었다. "요는 폭력이 아니라 죽음이다." 썩기 직전의 과실이 가장 맛있고 꽃도 지기 직전이 가장 아름다운 것처럼 삶을 아름답게 하는 사랑의 샴쌍둥이는 소멸.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도 그 남자는 흉폭했다. 어지럽고 독한 영화 <돌스>를 기타노 다케시의 입으로 듣는다.
|
#1 일본의 사계를 담고 싶었다
(기타노 다케시) 일본은 사계가 뚜렷하다. 계절의 변화를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생각은 <키즈 리턴> 때부터 가지고 있었고, 그간의 영화들은 색채를 배제해왔으니 이번 영화만큼은 한껏 표현해보자고 작정했다. 실은 도심의 번잡한 색조들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간은 푸른색을 기조로 한 모노톤의 효과를 주로 시도해왔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기타노 블루"라고들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에 대한 반항심이 <돌스>에서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2 내가 보고 싶은 그림에만 관심이 있다
(기타노 다케시) 해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의식한 적 없다. 내가 보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찍어온 것뿐이다. 내 머리 속에는 영사기가 있어서 영상에 관해서는 첫 장면부터 그림이 거의 완성돼 있다. 그 다음에는 실제로 촬영을 해나가는 것 뿐. 물론 편집도 직접 한다. 난 늘 내가 보고 싶은 그림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 영화를 외국인보다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봐줬으면 하는 생각도 자주 한다.
|
#3 분라쿠: 일본 전통 인형극을 인용하다
(기타노 다케시) 세 연인을 둘러싼 별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을 하다가 '분라쿠 인형'이 떠올랐다. 내 할머니는 여류 '기다유'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읊으시는 인형극 대사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땐 그저 시끄럽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중학교에 들어가서 분라쿠 견학을 갔을 때 "엇, 이거 내가 들어본 거네"라는 식으로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귀가 가락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주가 틀린 부분들도 하나 하나 짚어낼 수 있었고. 그러니까 <돌스>를 찍으면서 분라쿠가 떠올랐다기보다는 예전부터 머리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연예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이건 분명히 할머니의 피야" 라면서 화를 냈었다.
#4 내 기억 속의 빨간 끈 거지
(기타노 다케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아사쿠사에서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하던 시절 실제로 그런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다. 매일 정해진 코스를 걷는 이상한 거지 한 쌍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츠나가리 코지키(빨간끈 거지)'라고 불렀다. 소문에 따르면 옛날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여자 쪽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한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어디로 가버릴 지 몰라서 끈으로 묶어 함께 다니는 거라고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이건 내 여자야. 건드리지마" 라고 경고하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는 남자거지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무엇을 매치해야 가장 돋보일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 거지들이 생각났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두 사람이 행진하면 주변의 풍경도 계속 바뀐다. 그렇다면 거지들의 여정을 담으면 어떨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긴 어려워서 원래부터 머리 속에 가지고 있던 두 스토리, "야쿠자"가 된 애인을 몇 십 년 동안 기다리는 여자와 아이돌 가수를 쫓아다니는 어느 광적인 팬의 이야기를 추가했다. 영화를 처음 구상하기 시작한 건 <기쿠지로의 여름> 촬영이 끝났을 즈음부터. 세 가지 스토리를 묶어서 하나의 영화로 만들고 싶었는데 옴니버스 형태는 어째 재미없게 느껴져서 결국 몇 가지 장치로 각각의 이야기를 연결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
#5 요지 야마모토의 압도적인 승리, <돌스>의 의상을 말한다
(기타노 다케시)사전 미팅 같은 것 없이 요지 씨에게 모든 걸 일임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이번 의상이다. 솔직히 나 자신도 충격적이었다. 가을 의상이 나왔다고 해서 가봤더니 사와코 역의 칸노 미호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 땐 너무 놀라서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부랑자 의상을 부탁했던 터라 운동복 차림이나 찢어진 치마 같은 걸 상상하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사전에 배경은 단풍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에 설마 빨간 옷을 디자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실은 의상 덕에 일본의 사계 그 자체를 무대미술로 삼아 촬영해야겠다는 방향성이 정해졌다. 원래 인형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컨셉이었는데, "인형들로 인해 움직이는 사람들 이야기"라는 좀더 구체적인 이미지가 나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요지 야마모토의 의상이 아니었으면 성립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요지 씨의 압도적인 승리다.
#6 <돌스>의 배우들
(기타노 다케시) 배우들 연기가 좋았다. 특히 남녀 주인공들은 투명하면서도 품위가 있다. 두 사람을 캐스팅한 건 스스로 정답이었다고 생각한다. 후카다 쿄코가 맡은 역도 배우가 아이돌 가수 흉내를 내면 어설플 것 같아서 진짜 가수를 써야겠다고 애초에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메이저 배우를 캐스팅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미하시(야쿠자 보스 역)와 마츠바라(야쿠자 보스를 기다리는 애인 역)씨가 연기하는 것을 보고 새삼 감탄했다. 역시 배우로서 한 우물을 파온 사람들은 다른 것 같다.
|
#7 풍경은 잔혹함을 내포한다
(기타노 다케시) 풍경이란 늘 잔혹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실은 썩기 직전이 가장 맛있고, 꽃은 지기 직전이 가장 아름답다.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는 벚꽃구경 나온 회사원들이나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보다는 군인이 검을 들고 도사리고 앉아있는 풍경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아름다운 바다 앞에도 즐거워 보이는 가족이 있는 풍경보다 당장이라도 자살할 것 같은 중년 남성이 서있는 것이 그림상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8 사랑이란 원래 이기적인 환상. 애매한 사랑은 싫다
(기타노 다케시) 포스터에 '궁극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썼던데 그거 곰씹어 보면 진짜 잔인하고 이기적인 말이다. <메이도노 히캬쿠>(영화 속에서 인용된 분라쿠)도 따지고 보면 결국은 여자한테 홀려서 훔친 가게돈을 다 써버리고 하는 수 없으니까 동반자살 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사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거다. 여자들은 항상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나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데, 그런 건 좀 안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돌스>의 료코(마츠바라 치에코)처럼 아무 말도 없이 도시락 싸들고 오로지 기다리기만 하는 여자. 그것도 한편으로는 애정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그런가 하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르는 남자는 어떤가? 그 역시 협박 밖에 더 되겠는가. 원래 사랑이란 이기적인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치카마츠(<메이도노 히캬쿠>의 원작자)는 이러한 '사랑의 환상'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들의 죽음을 예감한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지만 사실 돈 훔쳐서 도망가는 건 쉽게 말해 범죄자 아닌가.
내 영화에서는 야쿠자간의 폭력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그것도 '두목님을 위해서'라는 일종의 애정표현에 다름 아니다. 애매한 것이 싫어서 영화에서 폭력이 등장할 때 정말로 아파하는 모습을 찍었던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다. 애매한 사랑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