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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는 이명세의 영화를 만든다” <란 12.3> 이명세 감독
2026년 4월 24일 금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이명세는 이명세의 영화를 만든다’, 지금까지 들은 평가 중 가장 기분이 좋다”는 이명세 감독이다. 한국 영화사의 대표적인 비주얼리스트로 손꼽히는 그가 조성우 음악감독과 함께 ‘시네마틱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란 12.3>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부터 해제까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선 시민들과 국회의 현장을 280여 명의 제보 영상과 사진으로 재구성한 기록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제목을 따온 <란 12.3>을 통해 이 감독은 기습적인 비상계엄의 순간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그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묵직하게 전한다.

◆ 이미지와 사운드로 완성한, 세포로 느끼는 공포
이 감독에게 영화의 시작은 언제나 '이미지'였다. 다큐멘터리 연출 계기에 대해 그는 “내 경우 영화를 만든다는 건 이미지가 확실히 잡혀야 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감독은 뉴스공장의 한 영상 속 군인을 본 순간, 이것이 영화적 이미지의 시작임을 직감했다. 이를 단순히 사실적인 정보로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의 시선을 단번에 붙드는 강렬한 영화적 이미지(트레일러의 한 장면)로 기능하게 하여 그날의 불안과 공포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제작의 발판을 마련해 준 김어준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다큐멘터리 <란 12.3>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과 재현을 거부한다. 대신 이 감독은 무성영화 기법을 빌려와 찰나의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충돌시키고, 그날의 공포와 당혹감을 관객이 세포로 느끼게 하는 '시네마적 체험'을 완성해 세상에 내놓았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귀를 뚫고 들어오는 소리를 통해 공포를 전달하려 했다. 헬기 소리는 귀가 찢어질 정도의 사운드 레벨로 조정하여 관객이 현장에 없었더라도 그날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마치 나이트클럽의 진동처럼 가슴이 울릴 정도의 사운드를 통해 관객의 몸이 반응하도록 이끌었다.

이 감독은 니체의 말을 빌려 “네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너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웠다”며 상호 신뢰가 깨진 엄혹한 시기, 무언가를 막 찍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털어놓는다. 그 충동의 결과물이 바로 전작 <더 킬러스>(2024)였고, 그 바이브는 자연스럽게 <란 12.3>의 무성영화 기법으로 이어졌다.

일반적인 다큐의 전개와 예상과는 다른, 매우 스타일리시하고 ‘힙한’ 연출이 돋보인다. 이런 형식을 취한 까닭은 무엇인가.

“영화를 만들기 전 스스로에게 항상 ‘새롭지 않다면 왜 하지?’라고 묻는다. ‘썸띵 뉴, 썸띵 디퍼런트’(Something New, Something Different)는 나의 창작 원칙이다. 후배들에게도 남들 다 하는 걸 왜 하느냐고 묻곤 한다. <란 12.3>이 ‘가장 이명세다운 다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나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처럼 시대를 관통하는 공포와 자괴감을 영화라는 예술로 찍어내고 싶었다.”

◆ 무성영화 기법과 AI 기술로 빚어낸 직관적 시네마

<란 12.3>은 인터뷰와 내레이션이 없는 무성영화 형식을 빌려와 자막의 크기나 글씨체 변화만으로 리듬감을 만들었다. 조성우 음악감독은 1시간 20분짜리 교향곡과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를 연상시키는 피아노곡을 통해 현장의 감정을 증폭시켰다. 특히 무성영화 자막이 대사가 아닌 이미지로 읽힐 때 발생하는 감정의 파동에 주목했다.

최첨단 기술도 동원됐다. 자막 프레임을 장총 모양으로 디자인하거나, 꿈과 현실이 뒤섞인 당혹감을 표현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했다. 광주 5.18 관련 풋티지는 실제 영상을 사용하되, 현장의 당혹스러움은 AI 기술을 빌려 팝아트적으로 구현했다. 또한 국회 보좌관이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장면 등을 별도로 촬영해 긴박감을 더했고, 전등 스위치 같은 일상의 오브제를 통해 현실의 공간이 깨지는 순간을 묘사했다.

인터뷰나 내레이션을 과감히 배제하고 무성영화 기법과 AI 애니메이션을 도입하며 가장 신경 쓴 지점이나 기대한 효과는 무엇인가.

“누아르는 너무 무거우니 ‘펑키 누아르’를 지향했다. 자막을 하나의 디자인 이미지로 활용해 읽는 이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일으키려 했다. AI 기술은 처음엔 물음표였지만 저렴하고 효율적인 CG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 시리즈 <트와일라잇 존>의 오프닝처럼 우리가 새로운 차원에 들어서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실제 같은 그림과 애니메이션을 병치해 개인적인 체험을 모두의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 정치 다큐멘터리 지양

이 감독은 인물 묘사에 있어 ‘희화화 금지’를 철칙으로 삼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을 형상화한 애니메이션조차 수위를 낮춰 순화했다. “회자되는 이미지 외에는 첨가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극장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듯한 시나리오적 구성을 취했다. 4가지 편집 원칙인 시네마틱(Cinematic), 이모셔널(Emotional), 드라마틱(Dramatic), 유머(Humor)바탕으로 제보 영상들을 영화적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사운드 믹싱 역시 정교하게 다듬었다. 나이트클럽의 진동처럼 쿵쿵거리는 타격감과 귀가 찢어질 듯한 헬기 소리를 통해 현장감을 극대화했다. 또한 광장 현장을 지키던 젊은이들의 ‘고양이 깃발’에 착안하여 고양이와 군인을 한 화면에 담는 등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사연을 영화 곳곳에 녹여냈다.

정치적 소재인 만큼 특정 진영에 치우치거나 인물을 희화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연출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나.

“김어준 씨의 제안으로 시작한 작업이지만, 정치적 색깔로 인해 역사의 기록이 희석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절대 희화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정치 고관여 층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영화만 해온 사람이다. 판결하기보다 현장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려 했다. 현장에 없던 사람이나 외국인의 눈으로 봐도 직관적으로 설명되도록 만드는 데 집중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시민들이며, 그들이 진정으로 연기상을 받아야 할 주인공들이다.”

◆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대한민국의 ‘빛의 전사’, ‘빛의 혁명’

이명세 감독은 이번 사태를 ‘촛불’을 넘어선 ‘빛의 혁명’이라 부른다. 국회로 와달라는 요청에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우 형사’(박중훈)처럼 달려갔던 시민들, 그들이 형광봉을 흔들며 율동하고 노래하는 모습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엄숙함보다는 즐거움으로 무장한 시민들의 모습은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비견될 만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다.
영화의 엔딩 자막 ‘디 엔드 - 디스 이즈 낫’(THE END - THIS IS NOT)은 <스타워즈> ‘요다’의 말투를 빌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남겼다. 케이팝보다 강력한 한국의 수출 상품으로서 이 ‘빛의 혁명’이 전 세계에 알려지길 바라는 이 감독. 90년 전통의 광주극장 상영회부터 개봉을 앞둔 지금까지, 그는 이 영화가 그날 밤의 공포와 당혹감을 환기하는 것을 넘어 우리 안의 인간성을 다시금 깨우는 도구가 되길 희망한다.

작품을 마친 지금, 이 감독이 평생 짊어온 부채의식은 조금이나마 희석됐을까. 그는 “직접 현장에서 싸운 사람들 앞에서 영화 한 편 만들었다고 부채의식이 덜어질 수는 없다. 감히 부채의식의 해소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다만 이 시기에 영화라는 매체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 시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랄 뿐이다. 이 감독은 여전히 “행복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며, 개봉이라는 진짜 승부를 앞두고 링 아래에서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현장의 시민들을 ‘빛의 전사’라 칭하며 이번 사건을 ‘빛의 혁명’이라 정의한 영화적 함의는 무엇인가.

“현장을 보며 ‘우리가 이기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과거의 투쟁이 엄숙하고 비장했다면, 이번에는 현장에서 노래하고 율동하며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한 울림을 주더라. ‘삐딱하게’나 ‘아파트’ 노래에 맞춰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즐기는 사람은 절대 지치지 않고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촛불이 다양한 형태의 형광봉과 빛으로 진화한 이 풍경은 즐거움으로 무장한 대한민국의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강력하고 유쾌한 ‘빛의 혁명’이야말로 케이팝보다 강력한,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할 진정한 한국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사진제공_프로덕션 에므

2026년 4월 24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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