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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없지, 이건 승부니까” <승부> 김형주 감독
2025년 4월 9일 수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스승 조훈현이 제자 이창호에게 “또 너냐” 하고 묻자, “네 선생님”하고 제자는 답한다. 그러자 스승은 “도리 없지, 이건 승부니까”라고 응수한다. <승부>의 엔딩 장면이다. 영화를 연출한 김형주 감독이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이자, 명대사로 꼽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승부>가 우여곡절 끝에 관객을 극장에서 만난다. 김형주 감독이 이 작품을 하기로 마음먹은 지 6~7년 만에 어렵게 얻은 기회다. 조훈현, 이창호 두 전설의 이야기를 파고 들어가니 어마어마한 드라마가 있었고 이에 끌렸다는 김형주 감독을 만났다.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 앞에, ‘담백한 톤으로, 그 안의 감정은 뜨겁지만 넘치지 않게’ 방향을 잡았다는 감독이다. 속도감을 주고 두 인물에 오롯이 집중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을 들어본다.

<승부>와 어떻게 인연이 닿게 됐나.
영화 <보안관>(2017) 이후 차기작을 찾고 있던 중 영화사월광의 윤종빈 감독이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추천해주셨다. 조훈현, 이창호의 대결이라는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파고들어 보니 어마어마한 드라마가 있더라. 꼭 하고 싶었다.

팬데믹 시기에 개봉이 지연되면서 넷플릭스 공개로 결정되었다가 다시 극장 개봉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러 입장차가 있고 거대 자본이 투입된만큼 저마다 고민들이 상당했던 거 같다. 처음 넷플리스행이 결정되었을 때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극장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월드와이드로 시청자와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었다. 그러다 배우(유아인) 이슈가 터지면서,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냥 견디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돌고 돌아 극장 개봉하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극장을 염두에 두고 만든 터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극장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
걱정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다. 극장 전체의 파이도 작아졌지만,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더 그렇다. 영화 찍은 지 횃수로 6년이 지났는데, 얄궂게도 계속 타이밍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다. 이런 표현이 조심스러운데 극장에서 보면 더 좋을 작품이라고 호소드리고 싶다. 바둑을 모르셔도 충분히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유아인 배우 부분을 하나도 편집하지 않았다고. 힘든 결정이었겠다.
방법이 없었다. 컷 몇 개를 들어내 봤자 해결되거나 지워지는 일도 아니라서, (유) 아인 씨의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이미 편집 등 모든 작업이 끝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엄두가 안 난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렇다면 우리가 애초에 의도했던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맞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실제로 바둑을 잘 모른다고 밝힌 바 있고, 또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았다고 했는데 연출 시 주안점은.
기본적으로 영화의 톤은 담백하고 넘치지 않게 가져갔다. 그 안의 감정은 뜨겁지만 말이다. 사실 감정이 격해질 몇몇 장면은 들어내었다. 대국 시 CG 팀이 공들인 컷이 많았는데 그 중 최소한만 사용하게 되어 죄송한 마음이다. (웃음) 영화의 톤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이라,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었다.

내가 바둑에 대해 아는 수준이 딱, 집이 무언인지, 이 정도다. 그러니까, 검은 돌이 사방으로 흰 돌에 둘러싸이면 먹힌다 정도만 아는 거지.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까 바둑의 세계가 너무 심오하더라. 관전기만 해도 며칠에 걸쳐서 수 하나하나를 해석할 정도라, 일일이 설명하려다 보니 그 자체로 함몰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대국을 중계함에 있어서 수위 조절이 필요했고, 결국 바둑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본다는 걸 전제로 전반적인 흐름을 가져갔다. 대국의 분위기와 승기가 넘어갔다, 반전되었다, 이 정도만 느낌으로 알도록 했다. 다만 메인 대국의 경우는 실제 벌어진 대국과 똑같은 기보로 연출했다.

윤종빈 감독과 각본을 공동 집필했다. 사제 관계라면, 조훈현 국수와 일본인 스승 세고에 9단의 이야기가 원체 유명하고 드라마틱한 스토리라 극에 녹여낼 만도 한데 잠깐 사진 정도로 언급하고 말았더라.
세고에 스승의 조훈현 국수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음은 잘 알려진 이야기긴 하다. 하지만, 조훈현과 이창호라는 두 캐릭터의 서사라 이 부분을 따로 다루기에 조금 여력이 없기도 했고, 논점을 빗나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아예 언급하지 않기에는 아쉬워서 사진 등을 삽입하여 스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조훈현 국수 역시 스승은 처음이라 자기만의 답을 찾아가는 느낌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세고에 스승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살짝 드러내고자 했다.

MBC 다큐멘터리 <승부>(1991)를 흥미롭게 봤는데, 흐름과 전개 등에 있어 흡사한 부분이 많더라. 레퍼런스로 삼았던 것 같다.
보기는 했는데 순서가 조금 다르다. 조훈현-이창호 사제 서사는 특집 기사로 먼저 접했고, 초고 작업할 때 즈음, <승부>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서 봤었다. 기사로 보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니 너무 흥미롭더라. 두 사람이 마주한 대국장의 공기, 시대상 등등 디테일하게 두 인물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영화로 그대로 가져가는 건 의미가 없어서 취사선택했다. 그래서 이창호 9단의 어린 시절 성격을 활달하고 다소 당돌한 천재로 변화를 주었다. 어느 자료에선가 이창호 9단이 바둑을 두기 전에는 개구쟁이였다는 말이 있어서, 이 부분을 살린 거였다. 또 실제로는 중학교 때 조훈현 국수를 처음으로 이기지만, 스승과의 첫 대국을 성인 배우(유아인) 이후로 배치했다. 이렇듯 캐릭터도 초반의 결과 다르게 했고, 실제 타이밍을 살짝 비틀었다. 사실 조훈현 국수와 이창호 9단의 첫 대결을 연출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유아인 배우를 캐스팅할 시, 다행히 소년미가 어느 정도 있었고 이병헌의 조훈현이라는 캐릭터에 잡아먹히지 않고 충돌하는 에너지를 제대로 분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돌부처’라고 불릴 정도로 말이 없고 조용하기로 유명한 이창호 9단이라, 어린 시절 모습이 어색하다는 시선도 있다. 활달하던 소년이 조훈현 국수의 제자로 들어간 후 너무 과묵하게 변했지 않나. (웃음)
이창호 9단이 자신의 바둑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돌부처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리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그리면, 이창호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한 초반 이해도에 난관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듯이) 자서전에서 이창호에 대한 묘사를 보면 본인은 기억을 잘 못해도 승부욕이 강하고 다혈질이었다는 문장이 있어서, 이를 차용했다.

이병헌의 조훈현, 유아인의 이창호. 두 배우의 연기에 호평이 많다.
이병헌 선배는 촬영마다 아침에 썰렁한 유머를 시전해 주셨다. 개그 욕심이 많아서 덕분에 현장 분위기가 좋았다. 특히 테스트 촬영하던 날이 기억나는데 병헌 선배와 조훈현 국수가 닮았다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분장하고 나니 ‘조훈현’이 있어서 놀랐다. 매 순간 되게 근사했다. 억지로 멋을 쥐어 짜내거나 멋짐을 연기하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영화 속 인물 자체로 근사하게 느껴졌다. 클래식한 근사함이라고 할지. 아인 씨는…

유아인 배우가 죄송한 마음을 표했다고 들었다. 따로 연락한 건가.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배우들과 그다지 친밀한 타입은 아니라서 별도로 연락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웃음) (이) 성민 형 정도와 연락하며 지낸다. 성민 형은 내 결혼식 때 축사를 해주시기도 해서. 지난 여름인가 유 배우의 부친상이 있어서, 고민하다가 그래도 찾아뵙는 게 도리일 듯해서 조문하러 갔었다. 그곳에서 짧게 사과의 말을 들었다. 자리가 자리이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길게 말하지는 않았다.

정상에서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다시 올라서는 조훈현 국수와 스승에 대한 죄송함과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는 승부에 나서는 이창호 9단, <승부>는 비단 바둑 영화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 영화 같은 느낌이더라. 명대사도 참 많은데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마음에 드는 대사를 꼽는다면.
남기철 9단(조우진)의 ‘바둑판 위에서는 도망가면 갈 곳이 없다, 피하기 시작하면 갈 곳이 없다’는 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지막 내레이션이 제일 마음에 남는다. 조훈현 국수가 ‘창호, 또 너냐’ 하니, 이창호 9단이 ‘네 선생님’ 답하자, 조 국수가 ‘도리 없지, 이건 승부니까’ 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엔딩으로 삼았다. 그리고 올드팬들을 향한 서비스라고 할 장면은 조훈현 국수가 연전연패에 몰려 몸부림치던 때, 하얀 모시 같은 옷을 입고, ‘와기’라고 거의 누워서 바둑두는 장면이다. 워낙 유명한 장면이라, 재현해 봤다. 전체적인 톤을 클래식하게 가져가 당시 시대상이 묻어나길 바랐고, 음악 미술 촬영 등에 있어서도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하에 움직였다.

고창석, 현봉식이 연기한 캐릭터에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있다. 편집으로 덜어낸 부분이 있는 건가.
두 분이 연기한 캐릭터는 극에 숨구멍을 열어주는 역할로, 대국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불가피하게 편집하게 된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아쉬운 부분이다. 블라인드 시사 당시, 대국이 많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어서 속도감을 높이고, 제자와 스승 두 사람의 관계성에 집중하고자 덜어냈다.

남기철 9단은 몇몇 실재 인물을 참고해서 만든 허구의 캐릭터라고. 조우진 배우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잘 표현했더라.
승부의 세계에 몸담은 사람이자, 조훈현의 라이벌이 필요했다. 조훈현과 이창호 두 인물 모두 영화 내에서 어느 순간 매우 외롭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자극을 주기도 하고 위로와 조언을 건네기도 하는 캐릭터가 필요해서 만든 가공의 인물이다. <보안관> 때 인연으로 조우진 배우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수락해 줬다. 한 번은 남기철이 조훈현에게 바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을 찍고 울컥했는지 나에게 이러더라. ‘바둑을 연기로 치환해도 무방한데, 내가 병헌 선배에게 연기에 대해 (감히) 얘기해도 되는 거야?’라고. (웃음) 담백하면서도 맛깔나게, 심심하지 않게 잘 연기해 준 것 같다.

조훈현, 이창호 두 분을 실제로도 만나 뵀는지. 무슨 말을 나눴는지 궁금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두 분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싶어서, 허락을 맡기 위해 찾아뵀었다. 두 분의 간극이 영화보다 더 크다고 느꼈던 것 같다. 조훈현 국수는 말씀도 잘하시고 다이렉트이신 반면, 이창호 9단은 정말 말이 없으셔서 대화가 쉽지는 않았다. (웃음) 그런데 응창기배 대국 30주년 기념으로 섭위평 9단과 조훈현 국수가 대국을 벌였고, 이 경기 해설을 이창호 9단이 맡아서 관람하러 간 적이 있는데, 이때는 말씀 잘하시더라.

영화 시사회 때 조훈현 국수가 참석했다고, 뭐라고 하시던가.
시사회 때 이창호 9단은 저녁에 대국이 있어서 못 오고 나중에 영화가 개봉하면 꼭 보겠다고 전해주셨다. 조훈현 국수는 재미있게 봤다시면서, ‘내가 저런 감정이었지!’ 하고 새삼 느끼셨다고. 그리고 영화에서는 임팩트 있게 보여주지만, 제자에게 패한 후 다시 올라서기까지 정말 힘드셨다고 하더라. 사실 조훈현 국수는 실제로는 자기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은 스승이었는데, 영화에서는 스승으로서 첫발이라 시행착오를 한다는 느낌으로 정석을 강요하는 걸로 접근했었다. 이에 이창호는 절치부심 끝에 자기 바둑을 찾아 스승을 꺾게 되는데, 이때 보이는 조훈현의 인간적인 모습을 병헌 선배가 너무 멋지게 잘 표현해주었다.

예비관객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러 사연이 있었지만, <승부>를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둑이라는 딱딱하고 정적인, 지루하지 않겠느냐는 선입견과 편견의 장벽을 허물고 극장을 찾아 주시면 좋겠다. 애초에 극장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라, 큰 화면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숨은 디테일을 보시는 재미가 있을 터니 필히 극장 관람을 부탁드린다. (웃음)


사진제공_바이포엠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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