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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는 관객에게 배신당하지 않는다” <승부> 이병헌 배우
2025년 3월 28일 금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한국 바둑을 세계 바둑 정상에 올린 불세출의 바둑 사제 조훈현, 이창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승부>가 드디어 관객을 찾는다. 팬데믹이라는 유례없는 사태와 주연 배우의 논란 이슈를 딛고 그 모습을 공개하기까지, 어두운 터널을 막막히 지나온 끝에 개봉이라는 터널 끝의 한줄기 빛을 만났다. 이병헌은 한국 바둑계의 레전드로 불리는 조훈현 사범으로 분해, 정적인 가운데 활화산 같은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연기한다. 정상에서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당혹감, 좌절감, 절망감 그리고 옹심까지 승부사 이전에 인간 조훈현으로 화한 이병헌을 만났다. <승부>는 바둑이 소재일 뿐, 인간의 이야기이자 여러 삶의 이야기기에, 바둑을 전혀 몰라도 충분히 공감할 영화라고 소개한다. 무엇보다 실화가 전하는 놀라운 힘에 관객 역시 호응할 거로 확신한다.

우여곡절 끝에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게 됐다. 개봉 소감은.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지 극장에서 선보인다는 사실 자체로 너무 기쁘다. 감독님 이하 스태프들이 힘들어했는데 얼마나 기쁠지 생각하니 더 신나고 기분이 좋다. OTT 공개도 장점이 있지만, 극장이라는 공간을 너무 좋아하는 입장에서 극장 개봉이라 더 행복한 부분이 있다. 가편집본을 보고 이번에 완성본을 봤는데 음악, 자막 등이 입혀져서 완성도가 더 높아졌더라.

가족 등 주변 반응은 어떤가.
장인어른이 바둑을 엄청 좋아하신다. 그래서 기원이 있는 종로 관철동 일대를 잘 아시는데, 이번에 장소와 미술, 소품 등 굉장히 정성 들여 만들었다고 칭찬하셨다. 관객 반응을 보니, 생각보다 많이 웃으시더라. 찍을 때는 잘 몰랐는데 상황에서 오는 웃음이 꽤 있었던 것 같다. 관객이 웃는다는 건 그만큼 몰입해서 봤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바둑이라는 소재와 이야기가 MZ 세대에는 낯선 이야기요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도 있는데 어떤 울림이 있을 거로 생각하고 선택했는지.
감독님을 필두로 나를 포함한 메인 캐릭터가 모두 바둑을 모른다. <승부>는 바둑은 소재일 뿐, 바둑에 대한 영화가 아니고 인생에 대한 영화다. 게다가 실화가 주는 힘과 감동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 영화를 하면서 알게 된 일인데 예전에 내가 했던 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인 차민수 선생과 조훈현 국수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바둑 두는 친구였다고 한다. 지금도 교류할 만큼 친한 관계라고. <올인>을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승부>도 흥미롭게 보지 않을까 한다. 결국 승부사의 이야기라 그렇다. 우리가 체스를 몰라도 <퀸스 갬빗>(넷플릭스 시리즈)을 재미있게 보듯이, <승부>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한다.

바둑을 모르는데 그렇게 긴장감 있게 둘 수 있다니! 기보(바둑 대국에서 수순을 기록한 것)를 이해하며 촬영했는지.
시나리오를 읽으면 포인트가 되겠구나, 여기가 시작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다 프로 바둑기사님이 촬영장에 상주하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셨다. 어느 정도 상황인지 이에 대해 듣고, 이해하고, 그에 맞춰 연기했다.

실존 인물에 여전히 현업에 계신 분을 연기하면서 부담감은 없었나.
현존하는 인물을 연기할 때는 기댈 수 있어서 좋다. 먼 과거의 인물을 연기할 때는 실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조훈현 9단은 워낙 자료가 방대한 데다 현업이시라, 이런 부분에서 많이 도움됐다.

실제로 조훈현 9단을 만나 나눈 이야기가 있다면. 또 시사회에도 참석하셨는데 영화를 보고 뭐라고 하시던가.
사전에 만났을 때 농담처럼 하신 이야기가 있다. 바둑돌을 아무렇게나 놓지 말아 달라고, 다 놓는 방법이 있다고 하셨다. 돌이 벽에 달라붙듯이, 마치 본드로 붙여 놓은 것처럼 착 달라붙도록 하되, 옆에 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셨다. 대국이 끝난 후에는 프로페셔널하게 자기 돌만 가져갈 것 등을 당부하셨다. 언론시사 전에 조훈현 9단과 이세돌 9단이 오셨더라. 조훈현 9단이 하시는 말씀이 얼마 전 영화 사진을 봤다시면서 ‘난 줄 알았어!’ 하며 웃으시는데 이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영화 감상은 나중에 전해 들었는데, ‘그땐 내가 저랬었구나!’ 하며 당시를 떠올리셨다고. 그러면서 ‘나는 저렇게 창호에게 가르쳐준 것이 없고 지가 알아서 다 크고 훌륭하게 된 것’이라고 겸손의 말씀을 하셨다더라.

돌을 놓는 연습은 어떻게 했나.
<승부>를 하기로 결정한 후 그날부터 집에 바둑판을 가져다 두고, 아들과 함께 늘 오목을 두곤 했다. 몇십 년을 둔 기사 분들의 움직임을 흉내라도 내려면 그렇게라도 익숙해져야겠더라.

제자와의 첫 대결에서 예상치 못하게 패배한 후 기자들 사이를 서둘러 빠져나가는 조훈현의 뒷모습에 만감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당시 심정은 어땠을까.
그 시퀀스가 우리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이자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자기 집에서 같이 먹고 자고 한 제자가 최종 결승에 오른 대진 현황판을 보면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당시의 심정을 조훈현 9단에게 여쭈어보니, 전혀 질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고 하시더라. 그렇기 때문에 감추지 못할 정도로 당혹스러우셨을 거다. 기자들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하며 빠져나가는 순간의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당혹감. 영화적인 설정이지만, 도망치듯이 빠져나오다가 창호 아버님과 마주치고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숨을 쉬고, 허공을 바라보기까지. 그 심정이 어땠을지, 이를 어떻게 표현할지가 나 역시 고민스러웠다. 유독 여러 테이크를 부탁했던 장면이고, 심지어 감독님께 재촬영 의사가 없는지 묻기까지! (웃음) 당혹감이라고 간단히 표현하지만, 정말 만감이 교차하셨겠더라.

연기 톤을 잡으면서 참고한 부분은.
의상팀은 당시에 맞게 다양한 의상을 준비해 주었고, 분장팀은 최대한 8:2 가르마에 살짝 삐져나온 머리, 눈썹도 위로 확 올라가도록 해서 날카로운 인상을 주도록 했다. 조훈현 9단의 인상이 날카로운데 이에는 눈과 눈썹 사이의 모양이 한몫한다고 생각해서 흡사하게 가져갔다. 개인적으로 유심히 살핀 부분은 그분의 자세였다. 바둑기사 사이에서도 매너 없다고 표현되는 그 자세 (웃음), 가령 다리를 떨기도 하고, 꼬거나 의자에 올려놓기도 하고, 와기라고 거의 누운 자세로 두는 모습 등과 이때 손의 모양, 팔의 움직임 등을 위주로 면밀하게 관찰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의외로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많았다. 특히 조훈현과 이창호의 결승전 대국 전날, 조훈현이 이창호의 기보 노트를 보다가 들킨(?) 장면에서 거의 빵 터지더라. (웃음)
사실 그 장면은 개인적으로 미묘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한 거였다. 의도치 않게 제자의 노트를 몰래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창호 입장에서는 선생의 단점을 써 놓았으니 왠지 잘못한 걸 들킨 느낌일 수 있고. 나는 서로가 느낀 민망함과 그 감정 안에 담긴 묘한 드라마가 포인트라고 생각했지, 웃음이 터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씬이다. 다음 날, 대국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승부에 연연하지 마라’ 역시 웃음 포인트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두 씬이 붙어 있다 보니까 뜻밖의 웃음 버튼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한국을 넘어 세계 바둑계의 레전드인 조훈현, 이창호 사제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이 두 분의 승부사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도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추락의 아픔, 절망과 좌절, 옹졸함, 스승에 죄송스러움 그러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못하는 승부사의 숙명까지. 여러 층위의 감정을 담고 있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하게 된 이유다. 말했듯이 <승부>는 바둑이 소재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 여러 삶에 대한 이야기다. 조훈현과 이창호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이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아들처럼 키운 아이 손에 남편이 패배하고 거실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걸 보는 아내(문정희)의 심정, 질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패배. 당혹함 같은 감정이 중요했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도 아까 언급한 첫 패배 후, 서둘러 기자들 틈을 빠져나가서 밖에 이르러서야 숨을 쉬고 허공을 바라보며 감정을 그려내는 일련의 연결되는 시퀀스다. 박찬욱 감독님이 연락이 왔는데, 감독님은, 이창호와의 대국 중에서 조훈현이 고심 끝에 ‘안되나’ 이 대사를 할 때가 너무 좋았다고, 감사하게도 말씀해 주셨다.

이창호 9단 역의 유아인 배우의 연기도 참 좋았다. 촬영장에서는 어땠는지.
촬영하면서는 과묵하고 말수가 적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이창호라는 캐릭터의 감을 잃지 않으려고 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이창호가 아이 때 성격은 당돌하고 할 말 다 하는 모습에서 성인으로 가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돌부처로 변화하는데,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이기 위해 어릴 때의 당차고 맹랑한 면을 보다 더 부각하지 않았나 싶다. 유아인과 연기하면서는 되게 좋았다. 조훈현 9단이 공격적이고 할 말 다하는 성격이라면, 이창호 9단은 단단한 수비를 하는 과묵한 사람이라 이 두 분의 대비가 재미있게 비춰질 거로 생각했다. 결과물도 훌륭히 잘 해냈다는 생각이다.

기자간담회에서 상대방의 연기가 좋으면 작품적으로 퀄리티가 높아져서 좋다고 언급했는데 그럼에도 상대방의 연기에 (잡아) 먹힐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을까. 그런 대상을 꼽는다면.
너무 많다. 연기는 초재기나 점수로 승부가 결정되는 부분이 아니고 또 각자 잘하는 연기도 다르다 보니까, 후배나 동료, 선배를 보면서 ‘와, 나라면 저렇게 못 하겠다’하고 느낄 때가 많이 있다. 요즘에는 다들 잘해서 누가 첫 번째니 두 번째니 하는 건 의미가 없고 각자 최고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저렇게 해야지 야단을 덜 맞겠구나, 저분처럼 잘하고 싶다’고 생각한 선배님이 있다. (내가) 20대 초반 때 뵀었던 박근형 선배님이다.

조훈현 9단은 정상에서 바닥으로 그리고 절치부심 끝에 다시 재기하는데, 당신도 이런 경험이 있을까. 대중이 보기에는 항상 잘나갔던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웃음)
TV로 데뷔하자마자 운이 좋게도 많이 사랑받은 케이스다. 그러다가 한 3~4년 있다가 처음으로 영화 제의를 받았다. 당시 영화가 두 편 이상 망하면 다시는 캐스팅을 안 한다는 충무로 썰이 있었는데 나는 연속으로 네 편을 말아먹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네 편이나 캐스팅되었냐고, 충무로의 미스터리라 할 정도였다. (웃음) 당시는 어리기도 했고, 첫 영화 제작보고회에서 ‘안녕하세요, 영화배우 이병헌입니다’ 이렇게 소개할 정도로 스스로 영화배우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때는 참 순진했던 것이, ‘망했다’는 것에 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몇 명이 되든 봐주는 관객이 있다는 사실에 신난, 순수하면서도 한편으로 철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 영화 <내 마음의 풍금> 그다음 <공동경비구역 JSA>가 연이어 잘 되면서, 숫자에만 연연하는 세태에 대한 내 나름의 비꼼이랄지 그 이후에는 ‘흥행배우 이병헌입니다’ 이렇게 소개했던 기억이! (웃음)

<내 마음의 풍금>(1999)을 할 당시, 심경의 변화라도.
음… 내가 작품을 보는 시각을 약간 바꾸었던 것 같다. 그전에는 캐릭터 위주였다면, <내 마음의 풍금>부터는 전체적인 이야기와 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리고 영화의 정서가 무엇인지를 살펴봤던 것 같다.

망했던 네 작품 중 지금 했으면 성공했겠다 혹은 아쉬운 영화가 있는지. (웃음)
두 번째 영화가 김성수 감독의 데뷔작인 <런어웨이>(1995)인데, 이를 각색한다면 지금에 오히려 맞을 것 같기도 하다. 당시에는 총기가 나오는 것만으로 몰입이 깨졌거든. 세 번째 영화는 정선경 씨와 함께한 <그들만의 세상>(1996)인데, 그때는 어려서 그런지 캐릭터를 100% 이해 못 했던 것 같다. 지금 한다면 그때보다 훨씬 잘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예전과 지금 달라진 점이 있을까.
음… 어릴 적 나를 보면… 와이프에게 가끔 ‘내 팬이었지?’ 하면 와이프는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와 정반대되는 스타일이었다고, (웃음) 웃는 모습 등등 건강해 보이는 이미지가 싫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나중에 인스타그램 같은 데 내 예전 사진이 떠서 보니까 그 거부감이 무엇인지 알겠는 거다. 나도 좀 거부감이 생기면서 ‘와이프가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싶더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때는 여유가 없이 열정만 가득했던 것 같다.

자기만의 바둑을 찾아가는 <승부> 속 이창호처럼, 당신도 자신만의 연기를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거다.
연기가 다른 대중 예술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솔루션이 없다는 점인 것 같다. 연기를 잘하기 위해 무언가를 연마해야 한다고 할 때, 그 무언가가 하나로 특정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 단 하나의 길이 없으니까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연기란 결국 타인의 인생을 사는 셈이라, 많이 관찰하고 왜 저런 습성이나 말투 혹은 생각을 하게 됐는지 유추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선배들이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영화를 많이 보라고 하는 이유가, 결국 인간을 좀 더 살피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시야를 넓히라는 거지.

요즘 극장가 상황이 좋지 않다. 예비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올 한마디를 한다면.
누차 말하지만, 이 영화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두 전설의 바둑기사 실화가 주는 힘도 크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보다 더 큰 힘을 받아갈 거다. 좋은 영화라면 관객에게 배신당하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사진제공. ㈜바이포엠스튜디오


2025년 3월 28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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