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길 위의 연인들이 있다. ‘해조’(우도환)와 ‘조재미’(이유미), 일명 해조재미다. 넷플릭스 시리즈 < Mr. 플랑크톤 >은 시한부 해조와 그의 전 여친이자 현 사랑인 재미의 코믹하면서 쓸쓸하고 슬프면서도 충만함이 반짝이는 로드 드라마. 윤슬이 영롱한 바다부터 백설이 소복하게 쌓인 강원도 어느 산까지 시청자를 그들의 여정에 초대한다. 애호가 층이 많았던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조용 작가와 <디어 마이 프렌즈>, 넷플릭스 <소년심판> 등의 홍종찬 감독이 의기투합해서 완성한 작품으로, 조용하지만 길게 여운을 남기며 해조재미의 행복한 시간을 축복하게 한다. 온몸을 던져 작품에 임하는 우도환과 이유미를 보며 “감독으로서 너무 행복했고 두 배우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모른다”는 홍종찬 감독을 만났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연출자의 길을 선택했고, 앞으로 10년 후에도 좋은 파장을 전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어본다.
<소년심판> 이후 두 번째 넷플릭스 시리즈다. 그때는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던 기억이 난다. 촬영 시기는 언제인가. 여운이 길다는 의견이 많다.
이렇게 대면 인터뷰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된다. 촬영은 올 1월에 끝났고, 6월에 후반작업까지 모두 마쳤다. 주변에서는 좋은 반응만 보여줘서, 잘 실감이 나지 않는데… (웃음) 다만 만들면서, < Mr. 플랑크톤 >이 좀 길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문득 생각나면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했다.
처음 글을 보고 어떤 면이 좋았나.
글을 읽고, 절절한 서사 혹은 블록버스터 같이 큰 스케일은 아닌, 소박해 보이는 작품이지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좋았다. 화려하거나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않은 결핍을 지닌 캐릭터와 그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도)가 뚜렷하게 들어왔고, 이점에 제일 끌렸다. 감정 깊숙이 들여다보되, 마냥 무겁지 않고 이를 우당탕탕 끌고 가는 톤앤 매너가 마음에 와닿았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로드 무비 형식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출할 수 있는 기회라 놓치기 싫었다. 로드 무비인 <파리, 텍사스>(1984)가 인생 영화 중 하나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로드 무비를) 하고 싶었거든.
<사이코지만, 괜찮아> 조용 작가가 글을 썼는데, ‘어흥’ 역에 오정세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조용 작가가 전작에서 오정세 배우와 함께한 적이 있고, 나도 평소 궁금해 기회가 되면 꼭 같이 작업하고 싶은 배우였다. 해보고 나서 너무 놀랐던 게, 정세 배우가 갖고 있는 본인만의 개성, 그러니까 연기하는 스타일이 있는데 이 방식이 매우 독특하더라. 준비도 많이 해오지만, 그 이상이었다. 보통 머릿속으로 준비한 것과 현장 분위기가 연결되면서 계산하지 못한 감정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부분을 아주 유연하게 넘어갔다. 본인이 준비한 지점에서 벗어날 경우, 무언가 하나가 ‘탁’ 하고 어그러지면서 다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은데 정세 배우는 그렇지 않았다. 정확한 계산 플러스 뛰어난 순발력과 대처력으로 매우 디테일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조용 작가와 호흡은 어땠나. 애호 층이 두텁다고 알고 있다.
<소년심판>(2022) 김민석 작가와는 작품 안에서 소통했다면, 조용 작가는 나와 성향이 비슷하고(ENFP: 깨발랄 활동가형), 캐릭터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감정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통하는 점이 많았다. 무언가 화려하게 포장하기보다 캐릭터나 서사의 본질에 집중하는 면이 특히 좋았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어떤 상황을 놓고 작가님과 나, 둘 다 비슷한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재미있고 좋은 분이었다.
시한부 남자와 조기 페경 여자와의 길 위의 로맨스다. 우도환과 이유미 두 배우의 캐스팅이 관건이었을 것 같은데, 어느 부분을 보고 캐릭터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도환 씨는 드라마 <구해줘>(2017)를 보고, 아마도 고등학생 연기였는데, 매우 눈에 들어온다고 생각했었다 유미 씨는 영화에서 날 것 같은 연기를 하는 배우라, 저런 배우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잘해서 역시 눈여겨보던 참이었다. 내 생각에 ‘조재미’는 무조건 단발에, 예쁜 척하거나 여성스러운 모습은 아니라고 봤고 여기에 유미 씨가 딱 떠올랐었다. 유미씨에게 재미의 옷이 있겠다 싶었다. 또 갸냘프면서도 폭발력 있는 모습이 좋았다. 도환 씨는 해조가 지닌 나른함, 자유로움, 날카로움, 양아치스러움 등 모두를 품은 육각형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작업해 보니 어떻든가.
둘 다 생각했던 것보다 배우로서 훨씬 더 성숙했고, 캐릭터를 바라보는 지점도 굉장히 깊었다. 몰입해서 연기할 때는 물불 안 가리고, 몸을 사리지 않고 임했었다. 연출자는 항상 ‘혹시 배우가 힘들까’, ‘스탭이 다칠까’ 하고 신경 쓰는데 둘은 나보다 더욱더 과감했다. 어른대 어른의 만남이라고 할지. 보통 여배우는 예쁘게, 남배우는 멋있게 나와서 자기 매력을 돋보이고 싶기 마련인데, 두 배우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콧물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눈이 부으면 부은 대로 자기를 내던지며 연기하는데…. 연출자로서 그들이 얼마나 예뻐보이던지! 초반부터 끝까지 쭉 이런 모습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챙긴 건 물론이고.
세 주인공(우도환, 이유미, 오정세) 외에도 까리(김민석), 봉숙(이엘), 어흥모(김해숙) 심지어 칠성(오대환)까지, 캐릭터의 앙상블이 뛰어나더라.
< Mr. 플랑크톤 >은 캐릭터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상 캐스팅하며 많이 고심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한 사람 아쉬움 없이 적확하게 잘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심지어 ‘존 나’(알렉스 랜디)까지. 사실 영화 <킬링 로맨스>(2023) 주인공(이선균) 이름이 ‘조나단 나’ 일명 ‘존 나’라서, 어떻게 할까 고민했었다. 영화가 드라마보다 먼저 개봉했기 때문에 따라한 모양새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캐릭터의 이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웃음) 다만 재미와 해조, ‘어흥’(오정세)에 집중하다 보니 주변부 이야기를 충분히 못 한 건 아쉬운 부분이다.
초반 선뜻 수긍가지 않는 지점이 해조 아빠 ‘영조’(이해영)다. 해조가 자기 친자식이 아닌 걸 알고 돌변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 싶게 차갑게 돌아선다. 영조는 어떤 인물인가.
마른 장작같이 비썩 말라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영조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을 거다. 그의 면면을 보면, 고아 출신으로 누구보다 가족에 대한 열망이 컸던 인물이다. 고환암에 걸린 걸 알고, 정자 동결을 해서까지 자식을 얻고자 하지 않았나. 해조가 태어난 후, 자기를 쏙 빼닮은 모습에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들인데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충격받고 절망한다. 충격에 어린 아들이 상처받을 행동을 저질렀고, 그 과정에서 해조는 집을 나가 버리고 만다. 극 중에서 보듯이 새 가족을 이룬 후에도 해조가 쓰던 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해조가 남기고 간 졸업장을 그 방에 놔둔 채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한편으로는 불쌍한 아버지다.
후반부 해조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대목은 마음이 찡한 장면 중 하나다. 해조가 얼마나 집(아버지)을 그리워했을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해조에게 아빠는 마음 깊숙이 간직한 앙금 같은 거라, 미움도 있겠지만 그만큼 어릴 때의 행복한 기억도 분명 남아 있을 거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마음으로 끌려도 머리로 거부해 왔다가, 아픈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아빠에게 다가간 걸 테다. 그 시퀀스를 통해 시청자가 영조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을까 했다. 그도 역시 아들을 그리워하고, 늘 기다리고 있었음을 말이다. 아들을 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도 남다르게 다가왔던 장면이었다. 동시에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기도 했고. (웃음) 덕분에 지난여름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처음으로 단둘이 여행갔었다.
집안에 순종하며 살았던 5대 독자 ‘어흥’이 여행 유튜버가 됐다는 설정도 새롭더라.
어흥은 사실 순종적이고 순애보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똥고집도 있고 또 자기 철학이 확실한 인물이다. 그 역시 해조재미를 통해 자기 인생에 첫걸음, 새로운 걸음을 떼지 않았나 싶다. 자유로운 삶을 영유하는 해조를 보며 무언가 느꼈을 수도 있다. 유튜버 설정은, (웃음) 어흥이 해보고 싶은 일이었을 거다. 십대, 이십대의 어흥에게도 동경하는 삶이 있지 않았겠나. 한때는 호랑이 같은 엄마 몰래 방에서 아이돌의 춤을 혼자 춰 보곤 했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상상해 봤었다.
해조-재미-어흥의 삼각 로맨스가 아닌 성장이야기라 좋았다는 의견이 많다.
우선 개인적으로 사랑의 쟁취 혹은 삼각관계 이야기에 흥미가 크게 가지 않는다. (웃음)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이야기라는 점에 많은 분이 공감하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면, 재미는 길을 가다가 손에서 피가 나는 해조를 알아보고, 우산을 쥐여 준다. 해조는 재미를 찾아가서 사귀자고 하고, 봉숙은 봉숙대로 추운 겨울 굶주린 아이 (해조)에게 먹을 것을 내주면서도 자존심이 상할까 봐, 일부러 버리는 척하며 문밖으로 내놓는다. 어흥은 결혼상대를 빼앗겼는데도 해조를 미워하지 않고 그를 보듬어준다. 이렇듯 사랑, 우정 같은 여러 관계가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통한다는 것, 이런 부분이 의미있지 않았나 싶다.
많은 시청자가 어디선가 해조재미가 지금도 여행하고 있을 것 같다고. 나 또한 그렇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끝이 아닌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이야기 혹은 여정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으면 싶었다. 그래서 엔딩 장면을 밀폐된 공간이 아닌, 설원에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구도로 촬영했다.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 조연출로 시작해서, <빠담빠담> <디어 마이 프렌즈> <라이프>, 넷플릭스 <소년심판> 등 여러 작품을 통해 어느 순간부터 믿고 보는 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 연출에 입문하게 된 계기나 이유는.
딱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연출을 택한 명확한 이유가 있다. 재미와 가치라는 면에서 직업을 선택할 때 좁혀지는 직업이 의사와 영화감독이었다. 의사는 너무 힘들어 보여 감독이 되었다. (웃음) 드라마든 영화든 이를 보고 누군가는 즐거워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받고 각기 상황에 따라 같은 작품을 봐도 달리 느낄 거다. 또 어떤 순간에는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도 있을 텐테, 그 생각이 변하는 찰나의 순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선택한 길이다.
지금부터 10년 후를 상상해 본다면.
< Mr. 플랑크톤 >을 마치고 나서 친구, 가족 등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요즘 건강을 좀 챙기고 있다.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고 소중하기 때문에, 오래 연출하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건강을 챙기게 되더라. 바란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관심 가는 이야기와 캐릭터를 작품에 담으며 10년 후에도 지금같이 인터뷰하고 싶다! (웃음)
사진제공. 넷플릭스
2024년 12월 10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