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누구든 한 번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잖아요”. 생초짜 치어리딩 동아리 ‘밀레니엄 걸즈의 탄생과 성장을 담은 청춘 영화 <빅토리>에서 심지 굳은 ‘필선’역을 맡아 극을 단단하게 견인한 이혜리. 그에게 <빅토리>는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마치 경험한 것 같은 행복한 기억 조작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어린 시절의 즐거운 기억처럼 계속 꺼내 보고 싶은 영화이다. 관객에게도 <빅토리>가 좋은 추억을 소환하는 영화로 다가갔으면 한다는 이혜리를 만났다. 걸그룹 활동으로 정신없이 10대를 보내다 보니, 자아성찰의 시기를 그만 놓쳐 버렸다는 그녀.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털어놓는다. 그때그때 행복한 일을 선택해 온 것 같다면서 이제 삼십대라는 새로운 챕터가 열렸다고 기대감을 드러낸다.
평소 알려진 찐친들(지수, 정호연, 변우석 등)이 VIP 시사회에 참석해서 크게 힘이 됐겠더라. 인맥이 넓고 깊기로 유명한데, 이런 좋은 인간관계의 비결은 무얼까. (웃음)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부담될 수도 있는데, 모두 참석해 축하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 사실 인맥이 그렇게 넓지 않은데… 그렇게 말씀해주니, 좀 쑥스럽다. (웃음) 한 작품으로 만난 배우를 다음 작품에서 다시 만나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도 드문 일이고, 그렇기에 한 번 맺은 인연이 굉장히 소중한 것 같다. 같이 작업하면서 좋은 영향을 받게 되니 그냥 다 고마운 마음뿐이다. 질문받고 생각해 보니, 나 또한 별로인 구석이 많은 사람인지라, 누군가를 대할 때 순간적으로 ‘저런 면은 좀 그런데?’ 하다 가도 ‘나도 저런 면이 있잖아’ 하면서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려 한다.
<물괴>(2017), <판소리 복서>(2018) 이후 영화는 오랜만이다. 그간 드라마와 예능, 유튜브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라 그 원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원동력은 가족, 확장한다면 팬들이다. 나를 응원해주는 내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번에 촬영하면서는 영화 자체로 너무 많은 응원을 받았었다. 또 영화 관람 후 ‘역시 우리 때(시절)가 최고야’ 라고 말하는 관객을 보니, 그동안 고생했던 게 싹 잊혀지더라.
<빅토리>는 1999년 거제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생초짜들이 모인 치어리딩 동아리 ‘밀레니엄 걸즈’의 탄생기를 다룬 에너지 넘치고 몽글몽글한 청춘 성장 영화다. 시대 배경이 당신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데 노래와 춤, 소품 등 당시 문화가 낯설진 않았나.
극 중에선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재생하는데 우린 MP3 세대라…. 아무래도 춤을 추다 보니 음악 관련한 소품에 눈길이 더 갔던 것 같다. ‘밀레니엄 걸즈’ 배우 중 나와 (박) 세완 씨가 동갑으로 나이가 제일 많았다. 삐삐의 경우 우리 모두 처음 접한 기기였고 폴더폰은 우린 써봤지만, 어린 친구들은 처음 본다더라. 우리 사이에서도 세대차이가 난다는 점이 신기하면서, 관객 또한 연령대에 따라 저마다의 추억이 새록새록하겠다 싶었다.
걸그룹 출신으로서, 춤생춤사인 ‘필선’ 캐릭터가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은데 어떻게 접근했나.
감독님께서 처음부터 필선은 무조건 멋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순간 ‘나는 별로 안 멋있는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하기도. 아, 또 감독님께서 필선이 에너지 넘치면서 사랑스러워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런 부분은 조금 (나와) 비슷한 것 같기도! (웃음) 주변 친구들이 필선을 따르고 동경하는 포인트를 생각해 보니, 심지가 굳고 하고 싶은 일과 목표가 뚜렷한 점이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표현하려 했다. 모처럼 댄스하다 보니 예전 생각도 났지만, 춤은 완전히 새로 배워야 했다. 필선은 힙합을 추구하는 친구라, 그루브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춤의 세계였다. 치어리딩 역시 처음이라 춤에 관한 한 초짜나 다름없었다.
필선과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일까. 닮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꼽는다면.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바라보는 내가 다른 것 같아서… 평소 늘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이 <빅토리>를 보고 나서 하는 말이 ‘필선의 틱틱 대는 모습이 언니와 똑같다’는 거다. 놀라서 ‘내가 저런다고?’ 했다. (웃음) 필선과 열정적인 부분은 비슷한 것 같다. 일단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고 후회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먼트가 닮았다. 다른 점은 필선만큼 대범하지 못한 점이다. 필선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 책임지는 의리를 발휘하는데,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그런 상황에 부닥친다면 나서지 못하고 걱정만 할 것 같다.
필선과 ‘미나’(박세완)의 찐 우정이 뭉클한 포인트 중 하나이다. 조연을 자처하는 미나와 ‘둘 다 주연’이라는 필선, 이런 친구가 있다면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든든하겠더라! 박세완 배우와 케미가 너무 좋던데 혹시 사전에 친분이 있던 건가.
전혀 인연이 없었고 부산 출신인지도 몰랐다. 굉장히 세련된 외모라서 미나 캐릭터가 아니라 서울에서 전학 온 ‘세현’(조아람) 이미지가 있었거든. 그런데 첫 촬영부터 바로 ‘어, 뭐야? 찰떡이네!’ 싶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상대역이 주로 남자 배우인 경우가 많았고, 이렇게 가깝게 호흡을 맞춘 또래 친구는 처음이라 정말 많이 의지가 됐었다. 사투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부담이었는데 늘 세완에게 물어보고 귀찮게 괴롭혔는데(?) 한 번도 싫은 내색없이 항상 도와주었다. 처음 촬영에 들어가면서, 세완이 극 중 미나가 하듯이 “혜리야, <빅토리>는 네가 편해야 하고 네가 빛나야 해. 그렇게 되도록 내가 옆에서 도와줄 거야”라고 하는데 순간 정말 필선과 미나가 된 것 같았다. 놀랍고도 충격적이라 지금 생각해도 너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밀레니엄 걸즈’ 멤버 한 명 한 명에 개성을 부여한 점이 좋았다. 치어리딩 연습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겠다.
3개월 동안 같이 밥 먹고 연습하다 보니 저절로 친해졌고, 다들 너무 사랑스러웠다. 특히 매니저인 ‘소희’(최지수)가 필선과 미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먼트가 정말 귀여웠고, 소희가 인생에서 제일 슬픈 순간에 처했을 때는 덩달아 가슴이 아프더라. 이번 <빅토리>가 데뷔인 배우들도 있고, 그 친구들의 연기 열정은 ‘밀레니엄 걸즈’의 열정 그 자체였다. 나와 세완도 어린 친구들의 열정에 고무돼 따라간 듯하다. 대견하고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다.
댄스와 치어리딩은 얼마나 준비한 건가.
처음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체크해보니 총 11곡을 연습해야 했었다. 그때부터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MBTI 중 J(계획형)라 미리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웃음) 11월부터 세완과 함께 안무를 짜서 맞추었고, 치어리딩 연습은 12월부터였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3개월 동안 연습했다. 둘 다 처음이라 어려웠지만, 심적으로 좀 더 부담된 건 힙합이었다. 필선에게 치어리딩은 처음이지만, 힙합은 너무 하고 싶어 하는 분야이고 매번 추는 춤이라 정말 멋있게 보여야 해서 그랬다.
레이어드 컷에 품이 큰 옷 등 90년대 말 힙합걸을 제대로 재현했던데.
댄싱 코치님이 힙합 의상은 무조건 크게 입어야 한다고, 춤의 90%는 옷이라고 하는 거다. 설마 그럴까 싶어 아는 동생이게 물어보니, ‘언니 춤은 95%가 의상이에요’ 하길래 끄덕이게 됐다. 좀 더 잘 추는 것 같이 보이도록 후드 티나 큰 옷을 고수했다. 헤어스타일은 그동안 해보지 않은 것을 고민하다가 시대상을 고려해서 지금 같은 층이 진 머리로 했다. 혼자만의 소소한 디테일이 있는데… (웃음) 원래 눈썹 선이 두드러지는 편인데, 평상시에는 일자로 예쁘게 다듬고 활동하지만, 이번에는 (필선에게 어울릴 것 같아) 그대로 살려봤다. 나만 아는 포인트다!
10년 동안 한결같이 좋아해 준 소꿉친구 ‘치형’(이정하)과 서울에서 전학 온 스트라이커 ‘동현’ (이찬형) 중 실제라면 누구를 선택할 것 같나. (웃음)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스트라이커를 선택하겠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가 스트라이커였다. (웃음) 필선도 늘 곁에 있던 치형보다 동경하던 서울에서 온 스트라이커가 무언가 신비롭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사귀었을 것이고. 그런데 지금 내 나이쯤 되면 1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을 간직한 치형만큼 진국은 없다고 생각할 듯, 결론은 둘을 섞으면 딱 좋겠다.
벚꽃이 만개한 풍광이 영화의 예쁜 그림을 한층 더 살리더라. 촬영하면서 힐링했겠다.
거제는 이번이 처음인데 그 가는 길부터 해서 정말이지 너무 예뻤다. 집에 있을 때나 차를 탈 때 보통은 암막 커튼으로 가리는 편인데 이번에는 풍광을 놓치고 싶지 않아 커튼을 활짝 열고 다닐 정도였다. 초반부 필선이가 리코더를 부는 씬을 찍는데 주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우리끼리 따로 벚꽃 구경갈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계속 사진 찍었던 기억이 난다. 벚꽃뿐만 아니라 유채꽃밭, 해 질 녘 노을, 바다 등 몽타주 하나하나를 매우 디테일하게 포착하여 촬영하신 덕분에 눈이 즐거운 배경이 완성된 것 같다. 어디서 이런 장소를 찾았을까 감탄할 정도로 절경의 연속이었다.
볼 때마다 울음 포인트가 달라진다고 밝혔는데, 어느 장면에서 그렇게 눈물이 터지든가. (웃음)
미나가 ‘내는 조연이 된 것 같아 좋았다’ 하니, 필선이 ‘니도 내도 주연이다’ 하는 장면은 처음 리딩할 때부터 울음 버튼이었다.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도 역시 눈물이 터졌다. (웃음)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다시 보니 필선이 아빠(현봉식)와 밥 먹는 씬에서도 눈물나더라. 처음에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두 번째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터졌는데 둘 다 관객 역시 공감할 지점이 아닌가 한다.
박범수 감독은 연출 의도 중 하나로 90년대 멋진 문화를 소개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개인적으로 현재로 가져왔으면 하는 과거의 문화가 있을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아무렇지 않게 친구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동생 친구집에 혼자 가서 컴퓨터를 하곤 했었다. (동생 친구 엄마와 나만 단둘이 있는 상황!) 뭐랄까, SNS 같은 온라인상의 소통보다 대면하고 부대끼며 나누는 소통이 주였다고 할까. 이런 일들이 굉장히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어서, (지금 생각해보니 동생 친구 어머니께 죄송하기도!) 일상의 대부분을 핸드폰과 유튜브에 할애하는 요즘 친구들에게 한 번 경험해 보게 해주고 싶다.
영화에서도 전하듯 ‘승리’라는 건 개인마다 다른 의미일 것 같다.
처음 글을 읽고 감독님이 굉장히 따뜻하고 둥글둥글한 분이 아닐지 생각했었다. 실제 만나보니, (좋은 의미로) 곰돌이 같으면서 무슨 질문을 하든 돌아오는 답변이 따뜻하시더라. 이런 온기가 모아져서 영화가 완성됐다고 생각한다. ‘빅토리’라는 단어가 예전에는 무언가 쟁취나 전쟁터에서 ‘승리!’한다 같은 강한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청춘 따뜻함 소확행이 떠오른다. 관객 역시 그럴 거로 확신한다. (웃음)
활동을 시작한 10대부터 30대가 된 지금까지 돌아본다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만의 챕터가 (나뉘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데뷔 후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 예능 <놀라운 토요일>(2018~2020)이 그런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10대 때 해야 할 자아성찰을 너무 바빠서 안 하고, 못하다 보니 <놀라운 토요일>을 하던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더라. 예능에 올인해야 하나, 그럼 연기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건지 자문하면서 결국 그때 그 순간 가장 (내가) 행복한 일을 해 왔던 것 같다. 30대가 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앞으로도 같은 선택을 해 나가지 않을까 한다.
사진제공. 써브라임
2024년 8월 20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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