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팔.방.미.인. 영화 <건축학 개론>(2012) ‘납뜩이’로 대중에게 눈도장 찍은 후, 뮤지컬 영화 드라마를 두루 섭렵하며 왕성하게 활동해 온 배우 조정석에게 꼭 어울리는 수식어다. 기타 하나만 있으면 행복했던 이십 대 초반. 연기를 전공하고자 3수까지 불사했던 그이지만, 중고등학교때 꿈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출근하고 퇴근길에 통닭 한 마리 혹은 바게트 한 봉지를 품에 안고 ‘여보, 나왔어’ 하며 말을 건네는 화목한 가정의 풍경을 상상했다는 조정석. I 성향의 내향인이요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분출하는 끼를 억제하지 못했다고 학창 시절을 회상한다. 영화 <엑시트> 이후 코미디 <파일럿>으로 관객을 찾는 조정석을 만났다. 주저하기보다 도전하는 걸 즐기는 그의 마음 자세는 한결같다. 성공과 실패가 아닌 “성공하거나 배우거나” 조정석에게 도전의 의미요, 가치다.
영화 <엑시트>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는데 개봉을 앞둔 소감은. 또 <파일럿> 기획자가 넷플릭스 시리즈 < D. P >등을 연출한 한준희 감독인데, 어떻게 인연이 된 건가.
그간 영화 <행복의 나라>, <파일럿>과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 등 쉬지 않고 열심히 촬영했는데 영화 개봉 텀이 길다 보니 더 오랜만이라고 느껴지는 것 같다. 개봉을 기다리면서 설레는 한편 많이 긴장되고 떨린다. 언론시사회 때 좋게 봐주신 것 같아 좀 안심되기도 하고, 또 일반 시사에 참석했던 제작진들이 관객 반응이 좋았다고 해서 다행이다 싶다. 한준희 감독님과는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우연히 만났었다. 그때 이런 작품이 있다고 제안 주셨는데,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라 반색했었다. <파일럿> 마지막 촬영이 벌써 1년 6개월 전이니, 이런 얘기를 한 건 그보다도 더 한참 전이라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웃음)
시나리오의 어느 부분에 특히 끌렸나.
일단 재미있었고 또 조정석이 ‘한정우’라는 캐릭터에 대입되더라. 뮤지컬 ‘헤드윅’을 계속 공연해 왔던 터라 여장에 대한 부담도 없었기 때문에 여장한 모습과 그 톤을 떠올리며 단숨에 읽었다.
‘헤드윅’을 오랜 시간 공연했는데,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할 때마다 늘 새롭고 궁금한 작품이다. 처음 공연을 시작한 20대 때는 빨리 40대가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산 헤드윅에 좀 더 밀접해지고 싶었다. 더 잘하고 싶은 열정과 욕심이 앞섰던 거지. 40대인 지금 여전히 공연하고 있어서 젊은 시절의 약속을 지킨 것 같아 뿌듯한 마음도 있고. 그런데 나이 들수록 무대가 익숙해져서 좋지만, 한편으로는 체력이 달리기도 하더라.
한정우에게 많이 공감했다고 밝혔는데 어느 부분이 특히 그런가. 또 만약 한정우 같은 처지가 된다면 여장도 불사할 것 같은지.
나 역시 가장이고, 데뷔 후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정우 같은 순간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무렵, 정우가 엄마에게 먼저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 장면에서는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정우처럼 사면초가 같은 상황이라면 여장이든 뭐든 기꺼이, 그것도 아주 열심히 할 거다.
스타 파일럿 ‘한정우’는 성인지 감수성이 낮고, 더군다나 낮다는 의식조차 없는 인물인데 이런 면에서 주저되지는 않았는지.
내가 재미있고 흥미롭다고 느낀 부분은 ‘한정우’라는 캐릭터가 갈등 상황에 놓이지만, 이런 갈등을 헤치고 성장해 나가는 지점이었다. 코미디 장르이고 여러 번의 변신을 보여주기 때문에 정우의 지적한 그런 부분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정우가 취업과 비행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참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서 공감하고 응원할 수 있었다. 또 ‘한정미’로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남성 동료의 수작이나 차별적인 언행은 정우가 각성하고 성장하는 계기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여장한 첫 장면부터 하이힐을 신고 뛰는데 힘들진 않았나.
제일 힘들었던 장면이다. 극 중 보이는 장면보다 훨씬 오래, 긴 거리를 뛰었다. 중간에 살짝 대역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을 직접 뛰었다. 육교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나중에 햄스트링이 당길 정도였다.
여장에 공을 많이 들였더라. 감량도 꽤 많이 했다고.
슬림해 보이려고 6킬로 정도 감량했고, 목소리는 인위적으로 변성하기보다 내 목소리 안에서 최대한 하이톤으로 발성했다. 처음 여장했을 때는 나도 분장팀도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지만,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웃음) 하루에 6~7시간 동안 여러 모습을 테스트해 봤다. 그렇게 3일간 해서 나온 게 지금의 버전이다. 긴 머리, 테이프로 만든 진한 쌍꺼풀 등등 시도했다가 탈락한 분장들도 여럿이다. 테스트해서 확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결정하고 나서부터는 수월하게 촬영했다. 다만 촬영 시간이 길어질수록 힘들어지는 부분이 있더라. 이너웨어부터 시작해서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있다 보니, 촬영 초반에는 괜찮은데 점점 불편함이 올라오긴 했다. 하지만 악역이든 뭐든 새로운 도전을 좋아해서 이번에도 즐기면서 촬영했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포즈에 있어서도 변신해야 했는데 여성스럽거나 혹은 웃긴 포즈는 어떻게 준비했나.
지문을 보며 씬의 목적을 최대한 헤아리고, 이에 잘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먼저 나서서 웃기고 하는 건 정말 잘 못한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MBTI가 I 성향(ISFP)이다. 내성적인데, 그럼에도 시키면 나름대로 잘 하긴 한다. 나이트클럽에서 정미가 춤추는 씬에서는 스태프들에게 박수를 받았지만, 음악도 없이 해서 내심은 정말 민망했었다.
여장한 모습을 보고 모 배우와 닮았다는 의견도 있는데, 혹시 알고 있는지. (웃음)
건너서 들었는데, 박보영 배우는 정말 너무 큰 영광이고… 최강희 선배는 너무 죄송하지만 스치는 순간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드는 듯도 하다. (웃음)
동생(한선화), 엄마(오민애)와의 환장 같은 케미가 좋던데.
찐 오동(오빠와 동생) 바이브가 <파일럿>의 코믹 길잡이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선화 씨를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제야 만났을까’ 할 정도로 잘 맞았다. 여동생이 없지만, 있다면 이런 케미일 것 같더러. 선화 씨의 전작 <술꾼도시 여자들>을 너무 재미있게 봤었고 에너지가 높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평소 배우 간의 호흡, 다시 말해 액션과 리액션의 합이 코미디를 살리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 앙상블에 따라 코믹의 텐션이 높아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데, 트롯 가수 덕후인 엄마까지 함께해 상황에서 오는 웃음을 잘 길어 올린 것 같다.
한정미의 동료 조종사인 ‘윤슬기’(이주명)와의 워맨스도 영화의 중심축 중 하나다. 정우가 슬기에게 느끼는 감정은 뭐라고 생각했나.
정우가 처음에는 이성적인 호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을 말하려는 타임에 반전이 드러나니 그 마음을 정리했겠지. 사실 둘의 관계에서 슬기, 그러니까 이주명 배우의 감정선이 훨씬 미묘해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평소 (아는 사이가 아닌 데도) 연기가 좋다고 생각되는 동료나 배우가 있다. 이주명 배우도 그 중 한 명이었고, 과연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인성과 연기는 어느 정도 비례한다는 생각이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자질 중 하나로 인성을 꼽나 보다.
4학년 5반으로서 단언하기는 무리인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을까 한다. 좋은 인성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동시에 연기를 시작했다고 가정하면, 인성이 좋은 쪽이 연기를 더 잘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모일 것이고 또 관계에서도 그만큼 유연할 것이고 이는 설령 악연인 사람을 만나거나 안 좋은 일을 겪을 때 헤쳐 나갈 동력이 된다고 생각하거든. 젊을 때는 이런 생각을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다. 2004년 무대에 처음 선 후 경험이 차고 차서 쌓여 얻은 깨달음 같다.
20년의 경험 끝에 얻은 진리인가 보다. (웃음) 젊은 시절 조정석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 주고 싶나.
평소 주저하지 말고 도전하자는 생각이다. 그 실패나 성공을 미리 규정짓지 말고 성공하거나 배우거나 이런 마음으로 접근하려 한다. 이렇게 정진하다 보면 좀 더 좋은 배우에 다가가지 않을까 한다. 만약 20대의 나를 만난다면 ‘네가 있어서 지금 내가 된 거야! 고맙다, 섀키야’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쨌든 인생에 후회는 없거든.
영화 <건축한 개론>(2012) ‘납뜩이’로 대중에게 눈도장 찍은 후, 굴곡없이 순탄대로를 걷는 듯한데 혹시 슬럼프나 드러나지 않은 내적인 힘듦이 있었을까.
어렸을 때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한다. 징크스나 슬럼프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 한다. 힘들고 번아웃 되는 순간이 있지만, 그럴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는 편이다. 평소 일과 휴식을 분리하려 하고, 어떤 루틴도 만들지 않으려 한다. 차 타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배우 ‘조정석’ 모드를 가동해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부족한 점 투성이에 실수도 많고 잘 까먹곤 하는데, 이런 면이 예능에서 드러나도 다행히 좋게 봐주시는 것 같다.
의사부터 왕, 여자까지 다채로운 캐릭터를 소화해 왔는데 그럼에도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거대 그룹을 이끄는 아주 돈이 많은 기업인. 비리와 의혹이 가득하지만,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결국엔 모든 게 다 드러나는 인물이랄지.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하지만, 악이 가득한 인물을 한번 해보고 싶다. 영화 <뺑반>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간지 나게 슈트입은 모습이면 좋을 것 같다. 그 비주얼이 궁금하고 관객(시청자)에게 한 번 보여드리고 싶다.
개인적인 질문인데 조정석은 어떤 아빠인가.
딸이 태어나 100일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이후부터는 너무 바빠서 거미씨가 거의 도맡아 양육해 왔다. 지금 다섯 살인데 많이 놀아주려고 노력하는 아빠, 놀 때는 신명 나게 최선을 다해 놀아주는 아빠 같다. 요즘 (내) 개그가 좀 통할 나이가 됐는지 아주 자지러지며 좋아한다. 밖에서는 영화 홍보에 예능 촬영에 바쁘게 보내다가 집에 들어가면 곰돌이도 되고 해파리도 되는 평범한 아빠, 딸이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를 기원하는 보통의 아빠다.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 것 같나.
음.. 지금처럼 계속 무대, 스크린, TV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것 같다. ‘아직도 한창이다’하는 마음으로! (웃음) 가정적으로는 딸이 중2가 되니, (딸이) 안 놀아 줄 수도 있겠지만, 너무 재밌지 않을까 기대된다.
올해의 스타트를 끊은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부터 영화 <파일럿> <행복의 나라>가 연이어 개봉하고 8월말에는 넷플릭스 예능 시리즈 <신인가수 조정석>이 시청자를 찾는다. 2024년은 조정석의 해가 아닌가 한다. (웃음) <파일럿> 흥행 기대감은 어느 정도인가.
<신인가수 조정석>은 예전에 <꽃보다 남자>를 같이한 감독님과의 인연으로 시작하게 됐다. 오랜만에 만나서 근황 토크 하다가, 내가 습작식으로 만든 노래를 들려주니 너무 좋다고 한 게 이번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사실 이렇게 한 해에 전부 선보이게 될지 몰랐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다. 한편으로는 <파일럿>이 여름 성수기에 개봉해서 부담스러운 마음도 있다. 예전 같은 관객수를 기대할 수 없으니… 굳이 기대한다면 개인적으로 400만 정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제공. 잼엔터테인먼트
2024년 8월 4일 일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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