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넷플릭스 <인간수업>(2020)은 기존 지상파와는 다른 접근과 화법으로 청소년 문제를 다뤘다는 평가와 함께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의 가능성을 확장한 작품이다. 예리한 현실 비판과 장르물의 속성을 버무린 이 작품을 향한 호평과 더불어 글을 쓴 진한새 작가에 관한 관심 역시 커졌다. 처음 작품을 쓴 신예라는 점과 한국 드라마 작가계의 큰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송지나 작가의 아들이라는 점 등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증가했다. 외계인과 사이비 종교를 결합한 참신한 시도의 SF 시리즈 <글리치>로 다시 글로벌 시청자를 찾은 진한새 작가를 만났다.
진 작가는 어릴 적 즐겨본 순정 만화는 소녀적 감수성에, 눈물 나도록 감동받은 시리즈 <식스 핏 언더>를 비롯해 자주 접한 해외 드라마는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는 데 있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대중적이지는 않더라도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놀이, 막상 들어오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놀이” 같은 작품이라고 <글리치>를 소개한다. ‘어색한 사람’을 자처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인간수업>에 이어 참신한 소재라는 면에서 호평이다. <글리치>의 시작은.
사소한 데서 출발했다. 와이프와 함께 아이템을 리서치하던 중 와이프가 어렸을 때 UFO를 봤다는 거다. 엄마 손을 잡고 밤하늘에 떠 있는 걸 봤다는데…나는 아니라고 하고, 와이프는 맞다고 옥신각신하던 중 문뜩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겠구나 싶었다. 이렇게 시작은 단순하게, 짧은 이미지의 한 장면으로 시작했다. (웃음) 주제의식은 글을 쓰며 찾았던 것 같다. 사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처음에는 모를 때가 많다. 나중에야 ‘이래서 그랬군’ 하고 그 찾아간 과정이 보인다.
<글리치>에 대한 반응은 좀 살펴 봤나.
댓글 등의 반응을 살피는 걸 무서워하는 편이다. (웃음) <글리치>는 아직 찾아보지 않았고, <인간 수업> 때는 현대 교육을 비판하고 있다는 어느 분의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이야기를 쓰면서 내가 염두에 두지 않은 부분까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 놀랐고, 그 다양한 관점이 좋더라.
SF 장르는 국내에서 이상하게 인기가 없는 장르다. 대중적인 코드를 고민하진 않았나.
대중적인 코드를 고려하기보다 그간 거론되지 않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처음 기획할 때만 해도 UFO와 같은 소재는 좀 잊힌 감이 있는 아이템이라 무언가 노스탤직한 이야기가 됐으면 했다.
여성 두 명을 주인공으로 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예전에 본 만화의 한 장면인데 두 소녀가 옥상에서 만난다. 둘은 이유가 좀 다르지만, 아웃사이더라는 공통점이 있고 그중 한 명은 소위 ‘날라리’ 같은 친구다.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가져 가고 싶었다. 성별을 남과 여, 혹은 남과 남으로 바꾸어 상상해 보니 원하는 그림이 안 나오더라.
성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성 심리 묘사가 탁월한 것 같다. 연출을 맡은 노덕 감독은 당신이 평소 관찰력이 뛰어나서일 거라고 하던데, 비결이 뭔가. (웃음)
주변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 나는 상상할 수밖에 없으니 와이프나 감독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메인 소스는 아마도 어렸을 때 좋아하고 많이 본 순정만화일 거다. 여기서 출발한 감수성이 아닐까 한다.
노 감독은 마침 <글리치>와 유사한, 실종에 관한 이야기를 염두에 둔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면에서 소통이 원활했겠다.
대본이 3부까지 나왔을 때 감독님이 합류하셨다. 처음 뵌 자리에서 감독님도 마침 외계인이 등장하는 SF를 준비 중이었다고 해서, 더욱 믿음이 갔다. 말했듯 SF 장르가 어렵고 대중적이지 못하다고 느낄 수 있는 장르인데, 감독님은 이미 염두에 뒀던 터라 어떤 벽이 없이 소통이 잘 됐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SF물, 사이비종교를 둘러싼 범죄물, 두 여성을 중심으로 한 버디물 등 여러 장르가 혼재해 있다. 노 감독은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장르를 활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글을 쓴 당사자로서 동의하는 부분인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장르적 장치들이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 사용됐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장르를 활용했고, 혼재돼 있다.
<글리치>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인가.
믿음과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 ‘지효’(전여빈)와 ‘보라’(나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UFO와 외계인의 존재를 두고 옥신각신한다. 외계인을 보는 지효조차도 그 존재를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효가 드디어 믿게 되는 순간, 위험에 처한다. 결국 믿음이 신념이 되는 순간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얘기하고자 했다.
외계인과 사이비 종교를 접합한 이유를 알겠다. 본질적으로 존재에 의문을 던진다는 면에서 닮은 꼴이라 하겠다. 신념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을까.
외계인도 종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의 문제다. 신념이 왜곡되면 사이비 종교가 되니 이를 UFO와 연결 짓는 건 자연스럽고 필연적이었다. 우리가 눈앞에 있는 것만 쫓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을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떤 열정을 지필 무언가가 필요하고 이를 신념이라고 해도 좋을 거다. 하지만 확신이 지나치면 그 신념은 위험해질 수 있다. 특정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기보다, 살면서 겪은 크고 작은 경험과 감정이 쌓여 이 같은 메시지를 꺼내 들게 됐다.
사이비 집단이 외계인을 신처럼 믿는다는 설정도 그렇지만, VR 기기를 착용한 채 기도하고 구원을 외치는 그들의 모습 또한 이질적이고 생경한 풍경이다.
우선 <글리치>의 사이비 집단은 비주얼적으로 달리 가져가고 싶었다. 그들은 외계의 존재를 믿는 SF적인 사이비라 이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치로 VR 기기를 활용, 착용하게 했다.
<글리치> 서사의 주요 축은 화해와 이해를 거쳐 회복하는 두 주인공의 관계성에 있다고 본다. 우정 이상으로 느껴지는 면이 없지 않기도 하다.
사실 주제의식보다 먼저 떠오른 게 둘의 관계였다. 어렸을 때 친했지만, 어떤 계기로 찢어진 친구 관계에서 그들이 느끼는 쓸쓸한 감정에 꽂혔다. 한 번 이야기로 만들어 보고 싶더라. 그렇다고 둘의 관계를 흔히 말하는 사랑과 우정 등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둘만의 고유한 관계이길 바랐다. 보라와 지효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관계다. 다만 보라가 자기감정을 캐치하고 이를 표현한다면, 지효는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당신은 지효와 보라 어느 쪽에 가까울까. (웃음)
개인적으로 지효가 가깝게 느껴진다. 보라는 (내게) 이상적인 모습이라면, 지효는 내 액면이 많이 투영된 느낌이다.
처음부터 ‘지효’역에 전여빈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고, 반면 ‘보라’역의 나나 배우는 노 감독이 추천했다고.
1부를 쓰고 있을 때 전여빈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클립을 보고 바로 꽂혔다. 1부와 2부에 걸쳐 회사원 ‘지효’의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딱 맞겠더라. 처음부터 전여빈 배우를 밀었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다가 캐스팅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쁘던지! 드라마 <굿 와이프>의 나나 배우 연기를 너무 좋게 봐서 감독님의 추천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말투 등의 톤에서 나른한 느낌이 있어서, 마침 한참 ‘보라’의 대사톤을 못 잡던 시기라 ‘이건 가 싶어’ 글에 반영했다.
지효와 보라 두 주인공 외에 사이비 집단 봉사단의 주축인 ‘영기’역의 정다빈 배우와 ‘서화정’ 집사 역의 백주희 배우의 연기가 돋보인다. 정다빈은 <인간수업>에 이어 두 번째 인연이다.
‘영기’는 학교 반장 혹은 선도부원 같은 이미지를 생각하며 썼다. 정다빈 배우의 캐스팅 소식을 듣고 가냘픈 외양과 액션이 어울릴지 의외였는데, 너무 잘 소화하더라. 백주희 배우는 원래 좋아해서 큰 역할을 했으면 하는 욕심(바람)에 비중도 커지고 또 너무 잘 표현하셨다. 극이 한층 풍성해졌다고 생각한다.
사이비 집단에서 아빠로 불리는 ‘좁’(김명곤)을 비롯해, 지효의 남자친구인 ‘이시국’(이동휘), ‘김직진’(고창석), ‘보라’ 등 등장 인물들의 네이밍이 심상치 않다. (웃음)
일부는 의도한 것이고, 일부는 해석을 듣고 놀랐다. ‘지효’가 깨달은 자라는 의미로 해석되더라. ‘좁’은 성경의 ‘욥’에서 따온 것으로 이 캐릭터의 핵심은 계속 믿음을 붙들고 있으려는 왜곡된 신념에 있다. 스스로 좁이라 칭하지만, 성경 속 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김직진은 세례명이 ‘토마스’인데 토마스는 예수가 부활한 후 성흔에 손을 넣어 본 제자로 계속 의심하는 사람이다. 이시국은 요즘 ‘이 시국에’라는 말을 많이 하니 일종의 말장난처럼 써봤다. 보라는 무엇보다 부르기가 편하고, ‘보다’(See)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사용했다.
<인간수업>의 소라게에 이어, 이번에는 철갑상어가 은유와 상징으로 등장한다.
사실 철갑상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엔딩에 배치했는데 감독님이 이를 초·중부에까지 끄집어 올려 (효과적인) 복선으로 깔아 놓으셨다. 이는 지효가 얻은 나름의 결론을 암시한다고 보면 된다. 철갑상어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이 이들을 잡아, 칩을 심은 후 방류하여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는 것처럼 지효도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했다는 의도를 반영했다.
유튜버 달꾸녕으로 활약하는 보라와 ‘값대위’(태원석)를 비롯한 미확인 비행물체 갤러리 회원들 등 커뮤니티와 밈 같은 인터넷 문화가 곳곳에 포진돼 있다. 그만큼 당신이 헤비 네티즌이 아닐까 하는데 주로 방문하거나 활동하는 사이트가 있다면.
여러 사이트를 눈팅하는 정도로 고정닉으로 활동하는 사이트는 없다. 자료를 검색해서 그때그때 상위에 걸리는 곳에 찾아가는, 네티즌 유목민에 가깝다. 대체로 넓고 얇게 관심을 갖는 편이라 하나에 꽂히면 파고들다가 질리면 다른 걸 또 찾아가는 식이다. 광범위한 오타쿠라고 할지. 밈이나 욕 같은 비속어는 나름대로 현실을 반영해 봤다. 이를 통해 30대의 어떤 경향, 그러니까 30대는 20대와는 또 다른 지점이 있다. 마음속에 아직 동심이 남아 있으면 뭔가 창피하게 느껴지는 나이라, 이런 부분을 끄집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리즈의 성공에 있어 매화 엔딩 구성을 빼놓을 수 없다. 엔딩이 쫄깃하다는 평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또 <인간수업>에 이어 이번에도 10부작으로 구성한 까닭은.
그러잖아도 다음 편을 연이어 보게 만드는 힘이라 생각해서 매화 엔딩에 신경을 많이 쓴다. 실제로 수정 작업을 여러 번 거친다. 처음 작업한 <인간수업>이 10부작이라서 그런지 익숙한 포맷이라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10부작으로 가져갔다. 앞으로는 좀 더 짧게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나 장면을 꼽는다면.
1부에서 지효가 부모님, 시국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다가 몰래 빠져나와서 담배 피우는 장면이다. 뭔가 회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연애했으니 결혼한다는 응당 가야 하는 길을 따르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생기며 갈팡질팡하는 지효의 심정을 드러낸 장면이다. 다들 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한 번쯤 하지 않았을지. 아주 30대스러운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글리치>하면 (개인적으로) 딱 떠오르는 장면이다.
외계인으로부터 해방(?)된 지효와 달리 시국으로 마무리되는 엔딩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시국이 인간 맥거핀(속임수 혹은 미끼, 관객의 주의를 끄는 일종의 트릭)처럼 쓰이다가, 지효가 그에게 믿음의 씨앗 같은 걸 무책임하게 던져버린 듯한 느낌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는 포인트는. 또 글을 쓰면서 특히 힘든 부분은 뭘까.
대사 쓸 때, 가능하면 문어체보다 구어체로 쓰려고 한다. 직접 말해보고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면 쓰지 않는 등 고민이 많다. 그러다 보니 단문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긴, 풀 센텐스의 문장이 적은 편이다. 처음 작업에 들어가면서는 정해진 시간만 쓰자고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밤새우고 몰아서 하게 된다. 제일 힘든 건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다. 어떻게 풀어갈지 모르겠는 거지. 그런데 이 경우, 잘 보면 스스로 풀 수 없는 문제를 내놓고 풀려고 덤비는 셈이더라. 한 발짝 떨어져 문제 밖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객관화가 잘 안되는 부분이 가장 어렵다.
어머니 송지나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드라마 작가계의 거대한 산 같은 분 아닌가. 작가로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작가로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영향이 큰 건 당연한 이치고 나 역시 그렇다. 건축을 전공했는데 이를 권유한 분이 어머니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니, 건축을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런데 건축계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관계로, (웃음) 역시 어릴 때 좋아한 글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어머니가 다시 권유하셨다. 그렇게 어머니 슬하에 들어가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테크닉적으로는 시놉시스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하면서는 ‘글 역시 노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긴 드라마의 글을 썼다는 데 새삼 놀랐고 감탄했다.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주시나. 이번 <글리치>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가.
전문적인 평가보다는 만나서 관련 얘기를 하며 웃고 떠드는 정도다. <인간수업>은 작업하면서 피드백이 많이 오갔지만, 이번에는 거의 받지 않았다. <인간수업>은 재미있다고 좋아하셨고, <글리치>는 아직 듣지 못했다. 이번에 뵐 때 물어보려고 한다.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 모두 스튜디오 329 윤신애 대표와 넷플릭스와 함께 만들었고, 다음에도 함께한다고 들었다. 다른 플랫폼은 고려해 본 적이 없는지. 또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넷플릭스 외에는 아직 같이 일한 경험이 없는 데다 가끔 (다른 플랫폼과 제작사에서) 제안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눈앞의 것이 최우선이라 (웃음) 이미 한 계약부터 털고 보자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다. 머릿속에 구상한 아이템이 몇 개 있는데 그중 제일 끌리는 건 하이틴 로맨스다. 약간 핀트가 어긋난 하이틴 로맨스를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진한새는 어떤 사람인가.
어색한 사람이다. 청소년 때는 소수의 친구와 친한, 공부는 그냥저냥한 수준의 매우 조용한 아웃사이더였다. 어릴 때부터 왠지 어색해서, 내가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따돌림을 당한 것 같기도. (웃음) 지금도 사람을 대하는 걸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2022년 11월 3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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