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곽민규는 독립영화 좀 본다는 사람에게는 이미 유명한 배우다. <내가 사는 세상>(2018) <이장>(2019) <파도를 걷는 소년>(2019) <메이드 인 루프탑>(2020)까지 사회적으로 이야기해볼 만한 소재가 가득했던 작품에 출연했고, 김종재 감독의 신작 <생각의 여름>까지 매년 차곡차곡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는 중이다. 인터뷰 중 박종환, 구교환, 서현우, 배유람의 이름을 꼽은 곽민규는 요즘 독립영화로 시작해 상업영화로 진출한, 그러면서도 여전히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선배들의 발자취를 곰곰이 들여다보는 중이라고 말한다. 꾸준히 연기 경험을 다진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아마도, 어느 방향으로 보폭을 넓혀나갈지 고민하는 일. 그 과정에서 상업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OTT 플랫폼 오리지널 작품 <젠틀맨> <괴이> <D.P> 등에 크고 작은 역할로 출연하는 여러 기회도 얻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노여움으로 똘똘 뭉쳐 있던 언젠가를 상기하며 ‘더는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다는 곽민규에게 이제 “상업영화와 드라마의 복이 있는” 기회의 한 해가 찾아왔음이 분명하다.
당초 남자 주인공 이야기였던 <생각의 여름> 초고를 읽고 주인공을 여자로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고 들었다.
그동안 내가 많이 연기해왔던 찌질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기존에 봐왔던 것처럼 느껴지고 약간 우중충할 것도 같았다. 그래서 주인공이 여자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프로듀서 역할을 맡아준 <신림남녀>의 정지영 감독, 나와 단편영화 <눈물>(2018)에 함께 출연했던 손예은 배우도 시나리오를 보고 같은 의견을 줬다. 김종재 감독님은 그 뒤로 3~4개월 정도 걸려 시나리오를 고쳤다. 내용이 굉장히 디테일해졌고 초고보다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처음 기획과는 전혀 다른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김종재 감독과 영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가까운 사이인 것 같다. 그와의 첫 만남은 어땠나.
김종재 감독님은 독립영화 신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에게 관심이 많다. 내가 출연한 <내가 사는 세상>(2018) GV의 마지막 회차를 직접 찾아오셨다. 그때 <내가 사는 세상> 연출을 맡은 최창환 감독님과 함께 간단하게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게 인연의 시작이다. 이후 정지영 감독의 <은미>에서 김종재 감님이 조감독 역할을 맡으면서 내게 ‘병태’라는 인물을 추천해줬다. 그 뒤로 본인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며 <생각의 여름> 초고를 보여준 거다.
출연 제안을 받은 배우로서 감독 초고에 대한 수정 의견을 건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텐데, 평소에도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편인가.
음… 다른 배우에 비해서는 좀 그런 편인 것 같다. 작품을 거절할 때도 의견은 제시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유대가 생겼을 때의 얘기다. 이렇게 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때로는 불쾌함을 느끼는 감독님도 있을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공유하는 편이다.
김종재 감독은 당신을 비롯한 주변 독립영화 동료들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 같다.
처음에는 좀 자신 없어 했던 것 같다. 남자 연출은 여자 주인공 이야기를 쓸 때 겁을 내는 면이 있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쓴다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 ‘현실’역에 김예은 배우가 캐스팅된다면, 김종재 감독님이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품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김예은 배우도 직접 추천했다고.
6~7년 정도 잘 알고 지내는 오래된 친구다. 장편 독립영화에 같이 출연하기로 했다가 엎어진 적도 있다. 여자 주인공이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였는데, <생각의 여름>의 기본적인 이야기 뼈대가 그 작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예은 배우를 추천할 수 있었다. 기존 작품에서 보여줬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귀여운 매력이 있는데 그런 점이 잘 드러나면 굉장히 좋을 것 같았다. 본인도 평소의 자기 모습을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했고, 나 역시 그렇게만 된다면 분명 대박 날 거라고 말해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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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름>은 이별 이후 사람들을 만나며 성장하는 시인지망생 ‘현실’(김예은)의 여름날을 다루지만 울적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엉뚱하고 깜찍한 ‘현실’의 행동이 산뜻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신이 있다면.
‘현실’과 친구 ‘주영’(한해인)이 우연히 산에서 만나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무척 좋았다. 촬영 스케줄이 빡빡해서 컷을 줄이고 롱테이크로 촬영했는데 두 인물이 오이를 나눠 먹으면서 예상치 못한 연대를 이룬다. 그러다가 ‘현실’이 돌연 너무 귀엽게 도망도 친다.(웃음) 촬영 당시 나도 같이 모니터를 했는데 명장면이 나왔다 싶더라. 뒤에 남은 분량이 많긴 했지만 ‘일단 됐다!’ 싶었다.(웃음)
현장에서 연기만 한 건 아니라고 들었다. 연출부 역할을 병행했다고 말했는데.
4회차로 완성했던 <내가 사는 세상> 이후 현장 연출부 역할을 해보면 엄청난 공부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를 걷는 소년> 프리프로덕션 당시 조감독으로 작업해보긴 했는데, 어쩌다가 주연 배우 역할을 맡게 돼 본격적으로 현장 연출부로 뛰어다녀본 건 <생각의 여름>이 처음이었다. 마침 내 피드백이 일정 부분 반영돼 발전된 시나리오이기도 했고, 좀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지만 김예은 배우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우정의 마음도 컸기 때문에 연출부 일을 병행하게 됐다.
연출부로서 해야 할 일을 대략 가늠하고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현장에서 가장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있다면.
조연출을 맡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이나 많은 경험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몸으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주로 심부름과 짐꾼 역할을 많이 했다. 소품도 챙겼다. 촬영 도중 ‘현실’이 신는 슬리퍼가 필요한 날이 있어서 ABC마트로 뛰어가 사 온 적도 있고… 좋은 연출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웃음) 배우들 연기를 같이 보면서 ‘이건 괜찮은 것 같아’, ‘여기선 이렇게 하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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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막상 본인 연기를 해야할 때 집중이 안 되는 경험을 해서 당황스러웠다고.
조연출 일로 체크할 게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산 중턱에서 ‘현실’의 판타지에 등장하는 전 남친 ‘민구’의 모습을 촬영해야 했다. 30분밖에 촬영할 시간이 없고 카메라 무빙도 있는 장면이라 기술적으로 힘든 신이었는데… 연기가 안 되는 거다.(웃음) 다행히 얼굴이 많이 나오지 않는 장면이라 후시 녹음을 할 수 있도록 김종재 감독님이 기지를 발휘해주셨다.
어려움이 예상됐을 텐데 그럼에도 연출부를 병행한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작은 규모의 영화에 많이 참여하다 보니 영화를 만들 때 가장 필요한 건 서로 믿어주는 힘이라는 걸 느낀다. 감독이 믿어주면 배우가 날개를 달듯이, 현장 스태프도 서로 의지하면서 공동 작업을 하는 거다. 나도 사람인지라 (배우 역할만 하다 보면) 자기 생각에 갇히는 경우가 있고, 욕심이 올라와서 현장에서 삐죽거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점을 좀 더 생각해보면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상황) 전체를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할 만하던가.(웃음)
아, 연출부 진짜 힘들구나. 앞으로 이 사람들한테 잘 해야겠다…(웃음) 배우가 자기 소품만 잘 챙겨도 큰 도움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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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 <이장> <파도를 걷는 소년> <메이드 인 루프탑> 까지 꾸준하게 주목할 만 한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부장제 이슈를 유머러스하게 관통한 <이장>의 ‘승락’ 캐릭터가 짙은 잔상을 남겼다. 하는 ‘짓’이 어찌나 답답하던지.(웃음)
<이장>으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어서 장수할 수 있을 것 같다.(웃음) 정승오 감독 단편 퀴어 영화 <오래달리기>(2018)라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젠더 이슈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감독님이고, 그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나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장>을 찍을 때는 자기 경험을 솔직하게 얘기해주셨고 나도 내 얘기를 많이 공유하면서 ‘승락’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2년 전 연기를 지금 다시 보면 아쉬운 지점도 많은데, 당시의 나에게는 정말 필요했던 역할인 것 같다. 그 작품을 만나기 전의 나와 만나고 나서의 나는 많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 건가.
그전까지는 그냥 영화가 좋다는 마음,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고 인생을 성공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가 <이장>을 만나면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갖게 됐다. 더 다양한 사람의 의견과 생각을 공부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멍청해진다. 단순히 나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연기가 더 좋아지더라. 많은 독립영화 신 동료들과 기사를 찾아보고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82년생 김지영>(2019)에서 공유 선배가 어떻게 연기했을지도 그래서 너무 궁금했다. 아무래도 남자 배우로서 그런 부분을 더 유심하게 보게 되는 것 같다.
가장 최근 출연한 <메이드 인 루프탑>에서는 성 소수자 연기를 했는데.
<오래달리기> 이후 퀴어 작품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인데, 한국 퀴어 영화계의 거장(웃음) 김조광수 감독님의 러브콜이 왔으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메이드 인 루프탑>은 GV를 더 신경 써서 다녔는데 관객을 만날 때마다 배우는 게 있기 때문이다. 감독님, 정휘 배우와 함께 부산, 강릉의 극장에 여행 다니듯 함께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아직 종영 GV를 하지 못했는데 <생각의 여름>으로 넘어와 인터뷰를 하고 있어서 약간 배신자가 된 느낌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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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어떤 측면에 중점을 두고 연기하고 싶은가.
몇 년 전부터 비슷한 캐릭터를 중복해서 맡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좋은 조력자나 반대로 완벽한 안타고니스트 역할을 완벽하게 이해해서 표현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2017) <모두의 거짓말>(2019)을 연출하신 이윤정 감독님의 신작 오디션을 보기로 했는데, 시골 삶에 갇혀 있는 전통적인 ‘한남’역할(하하)을 연기해야 한다고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웃음) <이장>의 ‘승락’ 역할 때문에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개인적으로는 스트레스였던 시간도 있었지만, 아마 당시 경험이 결국 이번 작품 오디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 작품의 좋은 부품으로 쓰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경험을 익히는 데는 상업영화 출연도 좋은 창구일 것 같다. <신과함께-인과 연>(2017) <협상>(2018) <엑시트>(2019)에서 단역으로 여러 차례 현장을 경험했다.
상업영화 출연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출연해야 한다.(웃음) 뿐만 아니라 독립영화보다는 좀 더 대중적이기 때문에 그런 작품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상업영화를 찍으면 (연극, 독립영화 등) 저마다의 신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 모이는데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 자체가 배움이다.
올해 SBS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불법 동영상을 업로드하는 ‘전진원’역을 맡아 브라운관에도 등장했는데.
사실 그동안 자기 연민에 많이 빠져 있던 시기도 있었다. 세상이 왜 나를 알아주지 않지?(웃음) 그러다 보니 역할도 비슷한 걸 많이 맡았던 것 같다. 물론 스스로를 가엽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있는 캐릭터도 약간의 매력은 있지만…(웃음) <모범택시> 출연 경험은 (역할의 선악을 떠나)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동안 가난한 연인 이야기 속 남자친구 역할을 대표했었는데(웃음) 이제는 남편 역할도 조금씩 들어오기도 하고. 특히 올해는 상업영화나 드라마 복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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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들인지 소개해달라.
지금 촬영 중인 엄태화 감독님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출연 중이다. 티빙 오리지널로 공개되는 장건재 감독님의 <괴이>에서도 ‘순경’ 역으로 잠깐 나온다. 장건재 감독님은 너무 좋아하는 독립영화 출신 선배이기도 하다. 웨이브 오리지널로 공개되는 <젠틀맨>에서는 피해자의 조력자인 변호사 역할을 맡았는데, 기존보다는 롤이 좀 크다.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2016)의 김경원 감독님이 연출하는데 어떻게 하면 잘 연기할 수 있을까 고민된다. 8~9월 중에는 단편 <아들딸들>(2018)을 연출한 유형준 감독님이 기획 중인 장편 영화에서 몇 회차 촬영이 있을 것 같다.
일정이 굉장히 바쁘다. 모두 개인적으로 관리하나. 소속사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혼자 일하기에는 좀 어려워진 것 같다. 매니지먼트를 만나고 싶은데, 솔직히 좀 재고 따지고 있다.(웃음) 단순히 일을 가져다주는 에이전시 개념이 아니라 나라는 배우가 어떤 시점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게 좋을지, 그 변화의 과정에서 좋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동업자를 만나고 싶다. 혼자 일하다 보면 내 생각에 갇히게 되니까, 내년 초까지는 꼭 정하려고 한다.
독립 영화계에서 출발한 선배 배우들에게 조언을 받아보면 좋지 않을까.
독립 영화로 시작해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선배들의 발자취를 많이 따라가고 있다. 박종환, 구교환, 서현우, 배유람 선배처럼 상업 영화로 진출한 뒤에도 꾸준히 독립 영화를 하는 선배들이 멋있게 느껴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D.P>에도 잠시 출연하는데 거기서 (구)교환 선배와 잠시 만나는 장면이 있다. 왠지 더 친절하게 챙겨주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고마웠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캠핑하는 취미가 생겼다. 도시에 있는 걸 잘 못 견딘다. 파주 쪽으로 나가서 친구랑 같이 그늘막을 치고 커피를 내려 마시면 피크닉처럼 좋다. 소중한 시간이다.
사진 제공_(주)인디스토리
2021년 8월 13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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