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클라이밍>은 임신을 ‘축복’으로 다뤄온 여타의 콘텐츠와는 다른 시선으로 접근한다. 임신 전후로 여성이 맞닥뜨리게 되는 어떤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구속, 때론 180도 변화가 요구되기도 하는 임신이 지닌 양가성에 주목한 작품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했다는 김혜미 감독을 만났다. 뜯어볼수록 강렬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여지가 많은 <클라이밍>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올해 제45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 장편 콩트르상 경쟁 부문 진출을 축하드린다. 소감 한마디. (웃음)
단편으로도 해외영화제에 나간 경험이 별로 없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얼떨떨하다. 작년과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상영되긴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분이 보진 못했거든.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 어떻게 다가갈지 확신이 없었는데, 이 이야기가 해외까지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인가 싶어 놀랍기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이란.
임신하면서 느낀 낯선 감정들이 시작이었다. 임신 후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을 다룬 이야기는 많은데 그 외의 여러 감정에 대해선 잘 안 알려지고 다뤄지지 않는 것 같았다. 외적인 변화에 대해 풀어내는 이야기는 꽤 있지만, 임산부의 내적인 감정과 그 변화에 집중하는 이야기는 드문 것 같더라. 이야기(작품)로 만들 정도로 강렬한 경험이었고, 직접 느낀 감정이라 진정성 있게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그런가.
여성이 임신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산모로 변신하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나’로 살았던 개인에게 임신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단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한번은 꿈속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술 마시면 안 되는데!’ 하면서 너무 놀라서 깬 적이 있다. 현실은 임부인데 의식과 생각은 여전히 임신 이전의 나인 거지. 이때 과거의 나와 현실의 내가 교차하면서 정말 임신한 건가 싶기도 하고, 앞으로 엄마로서의 삶만 남은 건 아닐까 혹시 내가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녀가 몇 살인지 물어도 될까.
열 세 살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 <클라이밍>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3~4년 동안 작업해 작년에 완성했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여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을 거다. 이런 경험이 또 다음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건 아닌가. (웃음)
음… 다음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지만, 육아는 정말 또 다른 이야기였다. 편견이 컸던 게, 육아란 아이를 키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시기는 매우 짧고, 결국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더라. 아이도 나에 대해, 나도 그 아이에 대해 말이다. 명령과 복종의 수직관계가 아닌 이해와 대화로써 풀어나가야 하더라. 더불어 양육을 하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편견 역시 많이 깰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믿음과 대화로 풀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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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속에서 임신한 저 세계의 ‘세현’과 클라이밍 대회를 준비 중인 현실의 ‘세현’은 고장 난 핸드폰을 통해 연결된다.
(말했듯) 임신하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또 지금까지의 나는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신체적, 사회적 제약과 변화는 임신과 동시에 발동하는 데 비해 의식과 정신은 한 발 시차를 두고 따라가는 듯했다. 이런 경험을 모티브로 삼아 임신과 비임신의 상황을 평행세계로 놓고, 꿈과 현실 그리고 비현실을 넘나들면서 이런 괴리된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
탯줄-자일(밧줄)을 매우 임팩트하게 활용한 인상이다.
<클라이밍>의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연출, 영상, 캐릭터 등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모든 것이 얽혀졌을 때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클라이밍 선수인 ‘세현’에게 자일은 생명줄과 같다. 암벽등반 자체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앞으로 나가는 행위이고, 이때 자일에 의지해 목숨 걸고 오른다. 그 자일은 뱃속의 아이에게는 생명줄인 탯줄과 같다.
아이와 클라이밍 ‘세현’은 어떻게 보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아이는 태어날 것이고 그로써 클라이밍 세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걸 상징적으로 표현해봤다. <클라이밍>에서 산모 세현이 젖을 물리는 순간 클라이밍 세현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이 모성의 첫 시작이 아닌가 한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고민과 갈등을 이겨내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생기는 본성 같은 거다.
<클라이밍>를 본 첫 느낌은 ‘어떻게 이런 작품이?’라는 놀라움이었다. 일단 개성 있는 작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디즈니·픽사 등의 귀엽고 예쁜 캐릭터나 익숙한 이미지로 간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기대할 것 같아 기존의 대작들과 차별화해 확실한 인상을 주려 했다. 또 작은 영화라 관객에게 보일 기회가 많지 않을 거로 생각해 강렬한 스타일로 가서 한 번 보면 각인되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다. 운이 좋아 개봉하게 됐지만, 만들면서는 그 여부가 불투명했거든. 한 번이라도 더 봐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던 거지.
캐릭터의 신체 비율을 비현실적으로 한 것도 실제와 비슷하게 하면 어색함이 두드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컵을 잡는 등의 일상적인 동작도 디즈니·픽사만큼 자연스럽고 안정적으로 액팅하기 힘든 게 현실이거든. 제작비와 기술에 한계가 있으니, 이런 제약을 <클라이밍>만의 스타일로 받아들이도록 비주얼을 가져갔다. 눈의 아우트라인(외곽선)을 일부러 진하게 한 것은 인물이 느끼는 불안, 공포, 혼란 등을 눈을 통해 전달하기 위해서다. 독특하고 그로테스크한 아트웍을 의도했는데 (어느 정도) 원하는 방향으로 잘 나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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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 애니메이션으로 보였는데 3D로 작업했다고.
3D 애니메이션을 2D 애니메이션처럼 보이게 하는 카툰랜더링 방식으로 작업했다. 내게도 3D는 익숙한 작업이 아니었는데, (웃음) 정지신 3D 팀장님이 크게 역할 해줬다. 캐릭터의 정면, 옆면, 뒷면 등을 비례에 맞춰 그린 후 3D 애니메이팅 과정을 거쳐 액팅을 부여하고 그 위에 연기 등을 추가한 후 카툰랜더링으로 완성하는 방식이다. 카툰랜더링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많이 쓰이는 기법 중 하나로 시간 절약에 효과적이고, 디테일의 경우 2D로 그려 3D화한 후 카툰랜더링 과정을 거치는 거라 디테일을 강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작화도 그렇지만 분위기도 의도한대로 그로테스크하고 또 상당히 오싹하기까지 하다. 혼자 보는데 무서웠다. (웃음)
조명, 음악, 사운드가 중요했다. 조명은 욕심내고 싶었으나 여건상 화려하고 다양하게 세팅은 세팅을 할 수 없어, 대신 강하고 명확하게 가져갔다. 사운드와 음악은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많은 곡과 음향이 풍성하게 들어가 있다. 감정선 하나하나의 변화를 음악과 사운드로 짚어주려고 했고 그렇게 음악감독님께 요청드렸다. 사운드 믹싱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도 음악에 반영되도록 부탁드렸는데 다행히 마다하지 않고 꼼꼼하게 신경 써주셨다.
음악은 어떤 분이 맡았나.
김동욱 음악 감독이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오가며 왕성하게 작업하는 분으로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다. KAFA(한국영화아카데미) 다닐 때 서로의 첫 작업을 함께했거든. 내가 만든 첫 단편에 그가 음악을 맡았는데 그도 데뷔였던 거지. 이후 엄청 친해져서 여러 작품을 같이 하다가 나는 출산과 육아로 작업을 쉬었고 그는 작업을 이어가 명성을 쌓았다. <클라이밍>으로 오랜만에 같이 작업했는데, 내 디테일한 요청을 다 들어 반영해줬다. 정말 고맙다. 녹음 작업도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큰 녹음실을 대여할 경우 비용이 크고 시간도 한정돼 있어, 작업이 딜레이 될 경우 그 부담이 커진다. KAFA 시절의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덕분에 드문드문 이용하면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선호하는 작화나 스타일이 있는지.
기존에 작업했던 단편을 보면 그림도 분위기도 다 다르다. 주제와 연출 의도가 정해지면 이에 맞춰 캐릭터와 아트웍의 분위기가 정해진다. 어떻게 보면 ‘필살기’ 혹은 주력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웃음)
이번 <클라이밍>의 아트웍에 참고한 자료가 있다면.
이번엔 유튜브를 많이 찾아봤고, HBO의 작품 중 기묘한 분위기의 옴니버스 공포물이 있어 그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말했듯) 영화는 캐릭터, 영상과 편집, 연출, 분위기 등이 유기적으로 맞아떨어져야 그 자체의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동경이 있어 영화의 모든 요소를 유기적으로 조화시키려 노력한다.
관객이 집중했으면 하는 포인트를 짚는다면.
음… 그냥 자연스럽게 보면 좋을 것 같다. 영화를 볼 때 당시의 상황에 따라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유난히 공감되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볼 당시에는 그냥 지나쳤으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새롭게 다가오는 장면도 있다. 그렇게 상황과 시간이 유기적으로 만나는 것이니 영화를 자유롭게 감상하고 느끼셨으면 한다.
창작자로서 애니메이션의 매력은 뭔가.
생각하는 이야기를 이미지로 구현할 수 있는 점이 아닐까 한다. 실사 경험이 없어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애니메이션이 연출의도를 좀 더 은밀하고 깊숙하게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내 의도를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질문! 요즘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은.
<클라이밍>의 리뷰를 보면서 신기하면서도 기쁘다. 악플은 무섭지만, 그래도 무플은 더 무섭다. (웃음)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해 나름의 완성도로 만든 작품을 누군가에게 보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영화를 본 관객이 느낌과 생각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이를 내가 확인하는 것 모두 내겐 새로운 경험이다. 작업하면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불안한 감정이 컸고, 내 방식이 제대로 전달될지 확신할 수 없었거든. 이런 순간이 올까 싶었는데 이렇게 왔다는 게 즐겁고, 감사하다.
사진제공_아워스
2021년 6월 21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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