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서울의 회사에서 7년 동안 일하던 ‘정은’(유다인)은 지방의 하청업체로 부당하게 파견된다. 바다 근처에 위치한 송전탑을 보수하는 현장에서 정장 차림의 ‘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쩔 도리 없이 최하위 업무 평가를 받아든 그는 해고 일보 직전이다. 악다구니만 남은 ‘정은’은 어떻게든 회사에서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자비로 구입한 안전복을 차려입고 직접 송전탑에 오르려 한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기만 하던 팀의 ‘막내’(오정세)는 결국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그러나 타인의 도움으로 인생의 난관을 수월하게 극복하고 서로 연대하는 낙관적인 드라마는 아니다. ‘막내’는 한창 자라는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 낮에는 송전탑 보수, 밤에는 편의점 일과 대리운전을 소화하며 자신을 ‘갈아’ 인생을 버티는 중이다. 이 삶은 어떤 보상도 없이 비극적인 마무리를 맞을지도 모른다. ‘정은’은 언제 어떻게 바스러질지 알 수 없이 흘러가는 인생에서도 일말의 인간성을 보여준 ‘막내’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여유가, 아직은 없다.
이태겸 감독은 “타인을 이해하는 건 인생사 모두의 난제”라고 말한다. ‘정은’은 ‘막내’가 떠난 뒤에야 그의 삶을 비로소 생각한다. 남겨진 그의 가족을 볼 때, 언제고 그와 같은 처지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동료를 볼 때, 서울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던 ‘정은’의 감각이 아프게 확장한다. ‘정은’은 ‘막내’ 대신 홀로 송전탑에 올라 끊긴 전기를 연결한다. 그러나 고공에서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바다는 말이 없다. 우리는 늦지 않은 시점에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반대로, 늦지 않은 시점에 타인에게 제대로 이해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가 건네는 어려운 질문이다.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송전탑을 보수하는 지방 하청업체로 부당 파견된 주인공 ‘정은’(유다인)을 주인공으로 한 사회 반영적인 영화다. 왜 이 영화를 만들게 됐나.
<소년 감독>(2008) 이후 기나긴 암흑기를 겪었다.(웃음) 목표한 영화를 눈앞에 두고 안 되고, 또 안되는 시간이었다. 밥맛이 꼭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대체로 누워서 아무것도 안하고 절망의 눈동자로 시간만 보냈는데, 그러다가 ‘사무직 중년 여성이 지방 현장직으로 파견되었는데 그 상황에서 버텨냈다’는 기사를 봤다.
글 한줄기에 영감을 받았나 보다.
감정이입이 됐다. 암흑기라 그랬는지 몰라도, 동기부여가 되더라. 시나리오를 한 번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세를 하겠다든가 대박을 터뜨릴 거라든가 하는 생각으로 작품을 준비할 만한 심리 상태는 못 됐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들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는 편은 아니라서, IMF 이후 정규직이 줄어들고 ‘직장’이라는 곳에서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조사를 해보니 기사 속 상황이 어떻게 진행된 일인지 그 그림이 좀 보이더라.
송전탑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고공 신과 보수 장면 등 현실적인 묘사를 담았다. 실제 취재를 곁들여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당초 취재를 하러 갔던 송전탑은 산속이었다. 실제 송전탑 보수를 하는 분들의 알음알음 소개로 산속을 따라다녔다. 길이 없어서 낫으로 풀을 베고 엉겨있는 덩굴을 정리하면서 길을 만들어서 가더라. “접지봉 챙겼냐”고 서로 물어보기도 한다. 선로작업을 하려면 송전탑에 연결된 전선을 자르고, 전기를 끊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그 안에 사람을 충분히 사망시킬 만한 전류가 남아있기 때문에 ‘접지봉’이라는 걸 이용해 잔여 전류를 땅 밑으로 흘려보내야 한다. 대체 이게 무슨 세상이지? 싶었다. 우리 대부분은 지나가다가 송전탑을 봐도 이런 장면을 상상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분명 누군가는 그 송전탑을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가 통하는 거다.
그런데 영화 속 공간은 풀숲이 아닌 바다 근처의 송전탑이다.
송전탑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인간과 맞대어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직업인 ‘정은’이 조직과의 관계에서 겪는 고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미장센을 고려해야 했는데, 첫 시나리오대로 촬영해보니 송전탑의 덩치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송전탑 전체를 조망하기도 힘든 데다가 그 외에는 보여줄 만한 구조물도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바다로 배경을 바꾸니 송전탑이 온전히 보였다. 파도처럼 바다 자체가 지닌 성질도 영화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정은’은 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장을 입고 출근하고, 일없이 사무실에 앉아 시간만 보내다가 퇴근한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는 지난 사연을 설명하지는 않는데.
우리 영화는 흐름이 뻔한 편이다. 스릴러처럼 반전이 있는 게 아니라 전개가 단순하다. 인물에 대한 설명까지 앞서 해버리면 관객이 그 내면의 진실을 느끼는 데 오히려 방해된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정은’이라는 인물이 지방의 하청업체로 내려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겠나. 굳이 거기에 가야 하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안 되나, 대체 어떤 취급을 받았길래 술을 그렇게 많이 먹게 됐나. 하나의 이유나 사건으로 그 사람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면의 힘으로 주인공의 감정이 전달되도록 노력했다.
‘정은’이 젊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 인물을 어떻게 구현할지 더 고심했을 것 같다.
내 입장은, 내가 여성의 삶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초고는 내가 썼지만 그 뒤부터는 직장 경험이 많은 김자언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김 작가가 나로서는 모를 것들을 알려줬다. 남성이 많은 직장에 다니는 여성은 주로 어두운색 정장을 입는다고 하더라. “여자가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인사팀장’(원태희)의 대사도 김 작가에게서 나온 말이다. 알면 알수록, 여성이 직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내가 쉽사리 단정할 수 없겠더라. 그 내용을 최대한 그대로 작품으로 가지고 와 ‘정은’역을 맡은 유다인 배우와 소통했다.
자연스럽게 ‘정은’ 역을 맡게 될 배우의 역량도 무척 중요했겠다. 유다인을 낙점한 이유는.
‘내면 연기’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지나가던 사람을 공격해서 경찰서에 가게 된 한 개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왜 화가 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문제는 지난 10년간에 걸쳐 생긴 가정사와 관련돼 있을 수도 있다. 배우는 인물의 그런 내적 진실을 알고 연기해야 한다. 말 한마디에 정체성과 무의식까지 다 묻어나야 한다. 영화에서 ‘정은’의 이야기는 현장의 사업장 위주로 전개되지만, 그의 진실은 내면에 있다. 영화에서는 그 내용을 (의도적으로) 생략했지만 ‘정은’을 연기하는 배우에게는 엄청 중요한 부분이고, 장례식장 시퀀스와 엔딩에서는 그것을 바깥으로 표현해낼 수 있어야 했다. 30대 여성으로서 유다인이 그런 역할을 잘 소화해줄 것 같았다.
‘막내’는 그런 ‘정은’을 살펴주는 인물이다.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무작정 현장 일에 달려들고 보는 ‘정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준다.
‘막내’는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건 아니다”라고 느끼는 지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다. ‘정은’이 송전탑 앞에서 평가를 받을 때 ‘계단 올라간다 생각하고 한발짝 두발짝 올라가면 된다’고 말하는데 그때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실 이렇게 손을 내미는 일 앞에서 사람은 굉장히 신중해진다. 도리어 내가 상처받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은’과 ‘막내’는 송전탑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세계 앞에 선다. 두 사람이 놓인 현실을 반영한 듯, 각종 송전탑 소음을 활용한 배경음악의 존재감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송전탑과 도구의 마찰음이나 전기음 같은 현장 소리에 직업병으로 얻게 되는 이명을 넣어 영화 음악을 만들었다. 관객에게 영화의 사실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주요 테마가 영화보다 1년 앞서 완성됐고, 나는 그 음악을 떠올리며 영화를 찍었다. 영화 음악을 맡으신 두 분의 감독님은 플루트를 활용한 재즈 클래식을 하시는 분들이고, 영화 음악은 처음이다. 창의력이 많은 분들이고 발전 가능성도 크게 느꼈다. ‘음악이 안 나온다’고 하면 광주 작업실로 달려가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영화에 대해, ‘정은’의 상황에 대해 떠들었는데, 그러다가 ‘아 잠깐만!’ 하고서는 5분 넘는 ‘살아내기’라는 곡이 탄생하기도 했다. 여러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굉장히 즐거운 작업이었다.
송전탑 보수, 편의점 아르바이트, 대리운전까지 ‘쓰리잡’을 뛰던 ‘막내’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정은’의 울분이 폭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바쁘게 산다. 그런 와중에 자기 내면의 선함을 드러낼 일도 많지 않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힘들어지니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막내’는 ‘정은’에게 손을 내민다. 그런데 ‘막내’역을 연기한 오정세는 시나리오를 보고 착한 사람이 꼭 그에 걸맞은 대가를 얻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 그와 함께 인물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했고 현실적인 ‘막내’ 캐릭터를 만들었다.
원청 ‘인사팀장’은 보상금을 건네기 위해 ‘막내’의 장례식장을 찾고, ‘정은’을 악랄하게 몰아붙인다. 주인공의 결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과 달리 ‘인사팀장’의 성격은 다소 단선적으로 그렸다.
굉장히 고민이 많았다. 원청도 누군가의 하청일 수 있고,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도 자기만의 입장이 있는 인간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연출하면, 영화가 현실의 야만성을 지나치게 약하게 보여줄 것 같았다. 관객이 최대한 주인공의 심정에 이입할 수 있도록 ‘정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확실한 이야기 패턴을 유지하려고 했다.
‘정은’은 결국 홀로 송전탑에 오른다. 전기가 끊긴 장례식장에서 빠르게 썩을 수밖에 없는 ‘막내’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위태로운 바다 상황을 뒤로하고 고공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어떤 뭉클함이 느껴졌다.
‘정은’은 ‘막내’가 건넨 손을 잊지 않았다. 죽은 ‘막내’에게 더는 무언가를 갚을 길이 없게 되자 ‘뭐라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회사에서 꼭 살아남겠다던 ‘정은’의 기존 의식구조가 한층 넓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건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는 일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인생사 모두의 난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 폭을 확대시키는 작품을 좋은 문학이나 영화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어떤 작품을 좋은 영화로 꼽나.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 재활 교육원 선생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아이를 제자로 받는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는 아이를 이해할 수 없지만, 선생님이기에 제자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도 좋아한다. 내 다음 작품도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언급해봤자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을 테니 의미가 없어 말은 안 하겠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시사회장에서 내 영화를 볼 수 있는 게 큰 행복이다. 앞으로는 암흑기가 좀 짧았으면 좋겠다. 아예 없을 순 없겠지만.(웃음) 아내가 취직을 해서 내가 육아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3월 달에 돌이 된다. 정서적으로 행복하다.
사진_이종훈(스튜디오 레일라)
장소제공_비마이게스트
2021년 2월 3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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