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고졸사원이 대리 승진을 위해 토익학원에 다닌다. 자영, 유나, 보람 삼총사는 회사가 페놀을 무단으로 방출하는 현장을 목격 후 내부고발을 결심한다. 고졸이라는 이유로 회사 생활 중 부당한 처우를 받지만, 자신들이 속한 회사에 자부심을 느끼고 진심으로 아끼기 때문. 그렇기에 회사가 외국 자본에 헐값에 매각되는 상황 또한 좌시할 수 없다! 95년을 배경으로 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고졸여사원들을 주축으로 정의를 드러내고, 외국자본에 회사를 지켜내는 과정을 다룬 통쾌한 드라마다. 분위기, 의상, 미술 등의 디테일한 재현으로 레트로 감성 뿜뿜이다.

“일명 ‘꼽사리’라고 하죠, 셋이 항상 나를 우쭈쭈해줬다니까요” 고아성, 이솜, 박혜수 세 배우 플러스 감독까지 마치 4총사 같았다는 배우들의 말에 이종필 감독이 화답한다. 세 배우들의 만남은 운명이라며, 이를 위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존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그에게 우쭈쭈 받으며 즐거웠던 작업얘기를 들어봤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공개 후 반응이 좋다.
제작진, 스탭 그리고 배우들과의 단톡방이 여러 개 있는데 영화의 반응에 관해 톡이 수시로 울린다. 긍정적인 반응이 많은 편인데, 거기에 나까지 가세하면 안 될 것 같아 히딩크 감독의 ‘I’am still hungry’ 이 짤로 답을 대신한다.(웃음) 솔직하게 말하면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상업영화이니 흥행했으면 좋겠고, 이게 꼭 이익을 크게 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제작진과 배우, 스탭들 모두 영화를 향한 애정이 깊기에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영화라 많은 관객이 알아봐 주고,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90년대 레트로 감성을 잘 살렸더라. 당시 사회 특히 대기업 사내 분위기를 디테일하게 묘사했던데, 그때 직장 생활을 했을 것 같진 않은데(웃음), 자료 조사는 어떻게 했나.
당시 중학생이었다. 먼 과거가 아니라 자료는 많았다. 왜 애정하는 대상에겐 하나라도 더 해주려는 마음이 들지 않나. 맛집이나 달인 소개 프로그램을 보면 조금이라도 귀찮아하지 않고 정성을 들여야 맛있다는 소리를 듣더라. 그런 요리사의 심정으로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자료의 기사, 영상 등을 하나하나 다 찾아봤었다. 미술과 영상은 제작팀의 철저한 노력 덕분에 시대 모습과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재현하게 된 것 같다. 오히려 미술과 영상팀이 내게 ‘어설프게 보이면 안 되잖아요’ 이러더라. 이런 마음으로 뭉쳐 이룬 결과물인 거지. 또 삼진그룹 사내 문화 묘사는 제작사(램프) 대표님이 당시 직장 생활을 했던 분이라 인터뷰를 했었다. 팀의 구성원, 자리 배치, 고졸 사업 업무 등등 질문하니 ‘별거 없다’고 하던 분이 시시콜콜 매우 디테일하게 알려주시더라.

‘자영’(고아성)-‘유나’(이솜)-‘보람’(박혜수) 세 여성 캐릭터 간의 케미가 참 좋았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 감독 입장에서 여성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어렵진 않던가.
캐릭터를 살린 것은 배우의 공이라 내가 한 것은 별로 없다. 다만 나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보다 강형철 감독의 <써니>(2011)에 좀더 감흥 받은 사람이다. 여성 간의 우정을 보고 감흥을 크게 받음에도 직접 만들기는 힘들었는데, 다시 말하지만 세 배우가 100% 다 한 거다. 시나리오에 없던 부분도 만드는 대단하신 분들이다. (웃음)

예를 든다면.
음, 국수 먹는 시퀀스. 그 장면에서 자영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나’가 국수를 먹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 ‘보람’한테 ‘이자영한테는 얘기하지 마’ 이러거든. 그 대사는 시나리오에 없던 건데 친구사이의 관계성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이솜 배우가 고심해 준비한 거다.

그렇군. 딴소리지만, 국수가 맛있어 보이더라. 또 세 친구가 포차에서 먹던 떡볶이가 정말 먹음직스럽던데 도대체 어딘가. (웃음) 세 캐릭터가 중심축이라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였을 것 같다.
떡볶이! 스탭들 모두 먹고 싶어 했었다. 포차는 세트이고 떡볶이는 특별히 공수해온 거다. 캐스팅은 일단 ‘자영’역부터 물색했었다. 누가 좋을지 고민하다 고아성 배우가 떠올랐다. <전국노래자랑>(2013)을 할 당시 주연을 맡았던 류현경 배우와 같이 만난 적이 있어,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거든. 당시에 얘기도 잘 통하고 언젠가 같이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훌륭한 배우인 데다 나이대도 딱 맞아 제안을 했더니 답이 없는 거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더니 씩 웃으며 ‘당연히 하죠’ 라더라. 그다음 ‘유나’역엔 이솜 배우를, 이건 좀 사연이 길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긴 사연 좀 들어보자. (웃음)
내가 연출하기 전에 잠깐 연기 생활을 했었다. 그때 이솜 배우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푸른 소금>(2011)에서 나는 조폭 똘마니로, 이솜 배우는 주인공 친구였다. 당시 촬영 후 돌아갈 차편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아주 시크하게 ‘탈래요?’ 이러는 거다. 그래서 얼른 탔지. ‘유나’는 지식을 향한 목마름이 커 책도 많이 읽고 그만큼 인정욕도 큰 친구라 아는 척도 나서기도 잘하고, 삐딱하면서도 뒤로는 잘 챙겨주는 캐릭터거든. 이솜 배우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현장에서 보니 조용하고 예의가 바르더라. 그런데 나와의 인연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보람’을 빼놓으면 섭섭하겠다.
마지막으로 ‘보람’역이 문제였는데 똑똑하면서도 어눌하고 약간 핀트가 나간 것 같은 친구라 그런지 캐스팅 제안을 몇 군데 돌렸는데 거절당했었다. 그러던 차에 박혜수 배우가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출연한 <청춘시대>를 좋게 봤던지라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 박혜수 배우 왈 ‘보람’ 캐릭터가 마음에 무척 들고, <청춘시대>를 선배들과 함께한 경험이 아주 좋았고 많은 것을 배워서 이번에도 고아성, 이솜 언니와 꼭 함께하고 싶다더라. 결국 셋이 함께할 운명이었던 거지. 좀 과장하자면 그들이 만나기 위해 내가 이번 영화를 하게 된 거 아닌가 한다.

와우, 운명이라니! 세 배우가 말하길 당신 포함 4총사 같은 분위기였다는데 가볍게 묻자면, 4총사의 일원이 된 소감은. 또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통해 캐릭터를 발전시켜 나갔다던데, 그 과정은.
그들이 나를 끼워준 거다. 일명 ‘꼽사리’라고 하지. 셋이 항상 우쭈쭈해줬었다. 세 친구의 이야기이고, 시나리오라는 큰 줄기 안에서 배우가 생명력을 불어넣는 거라 주로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다. 처음에는 일대일로 만나 배우가 느끼는 애매한 부분에 대해 정답은 아니더라도 내 의견을 보탰다. 특히 유나의 경우, 캐릭터의 정서적인 면, 다시 말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외에 내면이 보이면 좋겠다고 해서 같이 만들어나갔다. 내 말주변이 부족해 글로 적어 주기도 했었다. 박혜수 배우는 리딩을 처음 해보니 토씨 하나까지 똑같이 하려고 하길래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편하게 하라고 조언했었다. 어쭙잖게 연기한 경험이 있어 아는데 미묘하게 본인의 리듬과 호흡이 묻어날 수밖에 없어 연기는 편하게 하는 게 최고거든. 그렇게 따로 또 같이 만나 시간을 가지며 맞춰갔다. 관객이 즐기는 만큼 만드는 과정도 즐겁게 하고 싶어 리딩 연습을 때론 한강에서 돗자리 깔고 하기도.

우문이지만, 배우 간에 신경전이 종종 생기곤 하는데…
전혀 없었다. 그들이 각자 나에게 교육하더라. 자신 아닌 상대 배우를 더 챙기라고 말이지. 몰랐는데 세 배우가 만나기 전부터 무조건 사랑하기로 했다고 한 말을 촬영하면서 전해 들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감독으로서 세 배우에 대해 단평한다면.
어려운데… 고아성 배우는 이름 때문인지 별 같은 느낌이 있다. 실제로 사인을 할 때 별을 그린다. (웃음) 이솜 배우는 장만옥 같은 느낌? 실제로 장만옥을 참고로 스타일링했다. 박혜수 배우는 감동스러운 면이 있다. 누군가의 노래를 듣고 감동받은 것도 처음이고, (기자 주: 박혜수는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출신임) 정말 뜬금없이 전화해 통화 마지막에 한마디 덧붙인다. 함께 작업한 시간이 정말 좋았다면서 끊는데 묘하게 감동이다. 영화가 다소 만화 같은 톤이 있으니 캐릭터로 비유하자면, 자영은 <달려라 하니>의 하니, 유나는 팀 버튼 감독의 <유령신부> 주인공, 보람은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가 딱이다.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영리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고졸 여사원이 지닌 개인사를 풀어놓으려면 이야깃거리가 한둘이 아닐 텐데 과감히 인물들의 전사를 생략하고 군더더기 없이 끌고 간다. ‘보람’과 ‘봉 부장’(김종수)간에 형성된 깊은 감정 교류를 보여주기 위해 ‘보람’의 전사만 아주 살짝 언급할 뿐이다. ‘봉 부장’은 가장 인간적이지만, 대기업 생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상업영화에 ‘영리하다’는 수식어는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하다. (웃음) 나도 들은 얘기로 부장 다음 단계가 임원인데 그냥 부장으로 남으려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더라. 봉 부장은 왠지 그럴 것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캐릭터마다 대응하는 인물이나 상황으로 짝을 지어주곤 한다. 가령 자영은 그가 목격한 페놀 유출 현장과 이후 핍박받는 상황, 유나는 ‘성장’했다고 칭찬해주는 부장과 얄밉게 구는 대졸 사원으로 그 짝이 있는데 보람은 어떻게 갈지 고민했었다. 보람은 수학천재였지만 영수증이나 맞추고 있으니 스스로 자괴감이 얼마나 들겠나. 또 뭔가를 꼭 해야 하냐고 반문하는 다소 엉뚱하고 슬픈 감성을 지닌 친구라 따뜻한 인물을 곁에 배치하면 좋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 특히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좋아해 보람-봉 부장을 유사 부녀 관계로 가져갔다. 김종수 선배가 아픈 연기를 위해 감량하는 등 연기를 너무 잘해 주셨다. 멋있는 어른이 드문 요즘 좋은 어른의 표상으로 보이게끔, 최대한 꼰대처럼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하셨다.

막바지, 고졸 여사원을 중심으로 회장과 임원진 등 삼진그룹 파와 외국계 자본을 대표하는 외국인 파가 영어와 한국어로 맞받아치는 장면은 마치 배틀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출연자들도 많고 동선도 복잡해 보이던데, 촬영 중 에피소드가 있다면.
영화를 통해 어떻게든 통쾌함과 승리했다는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목에 맞춰 영어로 통쾌함을 끌어 올려봤다.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을 보면 자신을 괴롭히는 사육사를 향해 유인원이 덤비는 장면이 있다. 혹시 봤는지? 딱 그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고졸사원들이 단체로 ‘NO!’라고 외치는 장면을 만들었다. 대립각을 세우는 집단이 보통 엎치락뒤치락 액션으로 마무리되곤 하는데, 우리 영화와 치고받는 액션은 너무 톤이 안 맞으니 그렇게 영어 배틀하듯이 갔다. 오글거려 보일 수도 있어 수위 조절에 신경 썼다. 또 보통 조·단역의 경우 어디에 설지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 시퀀스는 한 명 한 명 정확히 정하고 들어갔다. 세 친구 빼고 토익반 여섯 명을 전면에, 그것도 세 명씩 친한 그룹별로 배치했다.

나만의 컷을 꼽는다면.
90년대 배경의 상업영화라 모험이나 새로운 시도보다는 안정적으로 가져간 편인데 과감히 시도한 컷이 있다. 후반부 ‘자영’이 핍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와 맞서는 이유를 설명하는 신이다. 자영이 서 있고, 몽타주처럼 출근하는 사람들이 흘러가는데 왕가위 감독을 좋아해 그의 영화 속 장면을 참고했다. 또 한 컷은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를 오마주한 것으로 중반부쯤 세 친구가 막차 놓치지 않으려고 계단을 막 뛰어 내려가는 장면이다.

언짢을 수도 있는 질문인데 네임드 배우(류승룡, 배수지)가 출연하고 제작 규모도 꽤 컸던 전작 <도리화가>(2015)의 흥행이 부진했었다. 실패에서 얻은 교훈(?)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까. (웃음)
전혀 언짢지 않다. 일단 <도리화가>가 왜 망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는데 다 내 잘못이더라. 뭐가 잘못이냐면 너무 관습을 따른 거지. 으레 짐작해 상업영화는 ‘이래야 해’라는 막연한 생각에 관습을 답보하다 보니 나 자신도 만족 못했고, 그러니 관객도 당연히 외면할 수밖에. 그래서 느낀 게 관객이 관습적인 것에 지쳤다고 할까, 피로도가 쌓였다는 것과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번엔 상업영화로 뻔하지만 뻔하지만은 않게, 또 관객이 어떤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건지 잘 모르니 일단 내가 만족할 만한 것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당신에게 영화란 무얼까.
영화는 직업이고 회사다. 하다 보면 힘든 일이 없겠냐마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인생의 한 시기를 보내며 작업하는 게 좋다. 그 시간의 기록처럼 얻은 결과물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비슷한 고민을 지닌 동시대의 사람과 나누는 것, 그게 대중영화가 아닌가 한다.

마지막 질문! 소소하게 행복한 일은?
요즘 영화에 관해 올라오는 리뷰와 반응을 살펴볼 때 행복하다.

사진제공_롯데엔터테인먼트

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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