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부산행>을 상영하고 나서 추석 때 가게에 뭘 사러 갔는데, 초등학생들이 팔을 꺾고 ‘웨엑!’ 하면서 다니더라. 드라마 <방법>을 방영하고 나서는 인터넷에서 어떤 회사 정수기 앞에 ‘받침대에 물 버리면 ‘방법’해버릴 거예요’라고 써둔 걸 봤다. 그런 (변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2016년 한국 영화계에 유례없던 ‘좀비 열풍’을 불러일으킨 연상호 감독은 2019년 웹툰 <지옥>으로, 2020년 드라마 <방법>으로 장르 콘텐츠 활성화에 불을 지폈다. 좀비 디스토피아는 물론 지옥으로 가는 시간을 ‘고지’ 받는 사회, 저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방법’ 등 비현실적인 소재와 설정일지라도 일단 재미있게만 만들면 “아이들도, 어머니도, 장인어른도 좋아할 수 있다”는 걸 몸소 느낀 시간이다. 연상호 감독이 자신의 킬러 콘텐츠로 대중과 교감하는 즐거움을 톡톡히 맛봤다는 건, 지난 4년간 장르 콘텐츠를 향유는 국내 관객층이 그만큼 확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경험 끝에 등장한 신작 영화 <반도>는 연상호 감독의 최근 고민까지 담아낸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에서 실사영화로, 실사영화에서 만화로, 만화에서 드라마로 옮겨 다니며 창작물을 내놓은 그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콘텐츠를 수없이 목격했다. 그렇다면, 구태여 극장을 찾아서 봐야만 하는 영화란 뭘까. 예상 가능하지만 아직까지는 분명한 대답, 대형 화면과 규모 있는 음향시설을 통해 만나야 더 재미있는 확실한 오락 영화. <반도>는 그런 영화다. 개봉일 15일 하루 35만 명을 동원하면서 코로나19로 앓아누운 2020년 극장가에 기록될 오프닝 스코어를 썼다.
<반도>는 ’<부산행> 4년 뒤’를 배경으로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등장인물도 겹치지 않는다. 2편의 이야기가 1편에 이어 시작되는 <콰이어트 플레이스2>(개봉예정) 같은 연속성을 기대한 관객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작품을 좋게 본 분들은 다음 작품에서도 같은 걸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걸 계속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사이비>를 실사로 리바이벌하기 위해 <부산행>을 선택한 게 아니고, <부산행>을 리바이벌하고 싶어서 <염력>을 선택한 게 아니듯이 <반도>도 마찬가지다. 반복하는 것도 힘들고 그렇게 했을 때 (전과) 같은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보장도 없다. 마찬가지로 <반도>처럼 오락적 요소를 (많이) 넣은 영화를 또 만들 수 있냐고 하면 그 역시 의문이다.
<반도> 기획 당시와 그때 떠올렸던 중요한 아이템들이 궁금하다.
<부산행> 속편 이야기가 나오니, 투자배급사는 상당히 환영했다. 내 경우에는 일단 기획개발을 해보고, 해볼 만 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일단 <부산행>과는 다른 독자적인 영화로 가는 게 좋겠다고 결정하고, <부산행> 이후의 상황을 상상해봤다. 우리나라는 태풍이 자주 오고 하수 관리를 하지 않으면 금방 홍수가 나는 나라인데 그동안 좀비가 쓸려가지는 않았을까?(웃음)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상상이 재미있더라. 영화로 구현하는 즐거움도 있을 것 같았다. 워낙 포스트 아포칼립스 류의 창작물을 좋아하는데, 그런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제목은 <부산행2>보다 <반도>가 더 어울릴 듯했다.
<반도>는 확실한 오락 영화다. 특히 10대 주인공 ‘준이’(이레)가 좀비 떼를 헤쳐나가며 주도하는 카체이싱 장면은 대중적 만족감을 선사하리라고 본다.
어린 친구가 덤프트럭을 몰고 다닐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떠올렸다. 그래서 배우도 진짜 10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구니스>(1985)를 떠올리면서 10대가 활약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사실 이런 류의 영화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배경 자체가 주인공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 안의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다. 주변국에서는 (아수라장이 된 반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받아줘야 된다, 말아야 된다 시시각각 의견이 변하고, 그 와중에 일본에서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는 설정이었다. (생존자가) 배를 타고 나갔다가 다시 배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의 (또 다른) 주변국을 떠올렸고, 홍콩을 생각했다. 내가 어렸을 때 인기가 많았던 홍콩 누아르 영화의 성격을 (영화로) 가져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 홍콩에 가지는 않았다. 한국 특유의 건축 양식이 잘 드러나지 않는 동네 세네 군데를 찾아서 홍콩의 거리처럼 세팅해 찍었다.
카체이싱 장면에서 덤프트럭에 치이는 좀비 떼들도 그렇고, 특수효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반도> 특수효과를 담당한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에 따르면 “프리비주얼 과정부터 약 19개월이 소요됐고, VFX 작업에만 약 250여 명이 투입됐다”고 하던데.
어디가 특수효과고 어디가 아니냐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거의 나노 단위로 섬세하게 (지점을) 나누어 특수효과를 넣었다. 아포칼립스라는 배경을 (실제로) 세팅할 수 있는 (넓고 자유로운) 공간이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천항, 구로디지털단지 등 외부 장면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같은 세트를 이용하되 CG로 (배경을) 갈아엎었다. 내가 그동안 영화를 하면서 생각해온 기법을 거의 총동원했다고 보면 된다.
이제 상업 영화와 VFX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접어드는 것 같다. 앞으로는 세트장에서 촬영한 영화가 그 자체로 장르가 될 만큼 희귀해질 거라는 주장도 나온다. 당신은 애니메이션 작업을 오래 해왔으니 그 면에서는 다른 감독보다 한발 앞서있는 느낌이다.
<반도>처럼 CG가 많이 들어간 영화가 난 오히려 더 편하다. CG의 영역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단계와 거의 같기 때문이다. <반도>의 경우 예산이 적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판을 벌일 만큼 많은 예산은 아니었다. <부산행> <염력>보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훨씬 오래 잡고, 거의 모든 장면을 미리 만들어뒀다. 카체이싱 장면도 나, 무술감독, CG팀이 3~4개월 동안 회의하고 준비하면서 촬영 전에 이미 필요한 것을 완성했다. 앵글, 애니메이팅, 편집, 음악까지 다 붙인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필요한 배우 연기를 촬영한 것이다. “자, 이번 컷은 좌회전 신입니다. 레디, 액션!” 하면 (배우가) ‘핫!’ 하는 연기를 한 번 하고 “컷!”을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웃음) 나노 단위로 (쪼개서) 찍었다. 배우 입장에서는 대체 지금 뭘 찍는 건지 몰라 힘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미리 완성해 놓은 영상과 앞뒤 상황을 보여주면서, 지금 이 장면을 찍을 거라고 알려줬다.
<반도> 기자간담회 당시 배우들은 이구동성으로 촬영이 빨리 끝나서 좋았다고 하더라.(웃음) 촬영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면에서는 상당히 좋은 결과를 냈겠다.
내가 찍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짧은 회차였다. <부산행>도 80 몇 회차였는데, <반도>를 58회차에 찍었으니 다들 미쳤다고 했지.(웃음) 사실 회차라는 것이 예산 규모를 상당히 좌우한다. 기획개발 단계에서 적어도 이백몇십 억은 들어가겠다는 계획이 섰는데, 한국 영화산업 토양에서는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싶어 예산을 줄일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오래 잡고, (앞서 말한 것처럼) 미리 많은 것들을 준비해서 50회차대까지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는 변수가 많지 않았다. 변수가 많아서도 안 됐고.
당신을 두고 <부산행>으로 ‘좀비 열풍’을 몰고 왔다고 흔히 표현한다. 웹툰 <지옥>과 드라마 <방법>까지 두고 보면, 당신 덕에 장르 콘텐츠를 즐기고 누리는 우리나라 향유층이 전보다 확장됐다는 생각이다. 그 기준이 연령이든, 성별이든.
<부산행>을 하고 나서 추석 때 가게에 뭘 사러 갔는데 초등학생들이 팔을 꺾고 ‘웨엑!’ 하면서 다니더라. 드라마 <방법>을 방영하고 나서 인터넷에서 어떤 회사 정수기 앞에 ‘받침대에 물 버리면 ‘방법’해버릴 거예요’라고 써뒀다는 걸 봤다. 그런 (변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게 영화가 줄 수 있는 영향력 아닐까.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사람들이 강시 영화를 좋아해서 다 같이 (두 팔을 들고 강시 시늉을 내며) 이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웃음) 그럼에도 지금처럼 좀비물이 가족오락영화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사실 <부산행>도 초등학생이 좋아하는 영화일 줄은 몰랐거든. 그때 초등학생이던 고등학교 동창 아들들이 이제 중학생 정도 된 것 같은데, <반도>를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 하더라.
당신도 어린 시절에 영화관 가는 일을 즐겼나.
‘국민학교’ 다닐 때.(웃음)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 <쥬라기공원> 같은 블록버스터를 엄청 흥분해서 보러 간 기억이 난다. 극장에 가면 뭔가를 체험할 수 있어서 신기했다. 그런데 요즘 관객이 극장에 간다고 할 때의 의미는 좀 다른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고민하기 시작한 부분이기도 하다. 케이블 드라마가 영화적으로 변했고, OTT 콘텐츠는 이미 그보다 더 영화적이다. 그럼 극장은 뭐지? 어쩌면 <반도>는 최근까지 했던 그 고민의 결과물이다. 액션 중심의 체험형 영화. 지금 시대의 극장에 걸맞은 영화를 만든 것이다. 다만 앞으로는 체험형 영화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액션이라는 장르에 갇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환각을 경험해볼 수 있는 영화가 나올지도 모른다. 드라마로 호흡을 길게 보여주던 이야기의 마지막 회는 극장에서 직관적인 이야기로 보여주는 형식도 가능하다.
체험형 이야기가 나오니, 4DX나 스크린X, IMAX 같은 특수관이 떠오르는데. <반도>는 특수관에서 봤을 때 더 즐거운 영화인가.
4DX 버전을 최종 확정하기 위해 직접 4DX로 <반도>를 관람한 날, 솔직히 너무 재미있었다.(웃음) 다음 작품 헌팅 때문에 전날까지 스타렉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몇 시간씩 달렸는데, <반도> 4DX관에 들어가서 시작부터 (의자가) 흔들리니까 이게 헌팅의 연속인 건가… 싶기도 했고.(웃음) 이레 배우가 “꽉잡아!” 하면 마음속으로 ‘뭘 하려고!’ 하면서 옆의 팔걸이를 꽉 붙잡게 되더라. 4DX와 스크린X를 같이 접할 수 있는 버전을 아직 못 봤는데, 그러면 더 즐거울 것 같다. 특히 스크린X는 <염력> 때보다도 기술이 개발된 것 같았다. <염력> 때만 해도 스크린X 버전에 쓰일 (영상)소스를 고려하면서 촬영을 했는데 이제는 B캠에 있는 영상이나 스틸만 가지고도 스크린X 버전을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이 됐더라. IMAX 버전은 미국 IMAX사에서 직접 (음향)믹싱을 해왔는데, 건조하게 작업한 내 버전과 달리 음악을 굉장히 과하고 감정적으로 살려왔다. 난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는데…(웃음) 싶었지만, IMAX라는 큰 관에서 보니 그 방향이 맞는 것 같았다. 고리타분하게 보자면, 이런 특수관(기술)이 영화 그 자체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적극적으로 관람하게 한다고 본다. 난 특수관에서 볼 때마다 (같은 영화가)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 좋다.
여러 리뷰를 통해 <반도>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기대를 품고 극장을 찾는 관객이 있는 반면, 그 때문에 아쉬움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류의 작품이 <매드맥스2>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자장 안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것 같다. 워낙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드맥스> 시리즈가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 때 일본에서도 영화와 배경이 똑같은 만화 <북두의 권>이 나왔다. 더 유명한 예로는 <스타워즈>와 <건담>의 관계도 있다. 나는 창작자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걸 자기식으로 표현하는 게 대중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 대결을 할 것도 아니고.(웃음) 물론 그것과는 차별화된 무언가를 <반도>에서 보여줘야 된다는 마음은 확실히 있었다. 그 영화가 광활하고 평면적, 직선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액션이라면 <반도>는 고가도로와 지하차도가 있는 한국의 입체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액션이고 거기에 좀비까지 등장한다.
만약, <반도>의 후속편을 또 만든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질감의 이야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반도>의 악역을 구상할 때 몇몇 집단을 떠올렸다. 영화 콘셉트가 액션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악역을 타락한 군대로 구상했지만, 아포칼립스에서는 기존 세상의 윤리의식과는 다른 자기들만의 것을 내세우는 윤리주의자, 광신도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반도>는 엄청난 오락 영화인데, 만약 그런 이야기가 후속편으로 나오면 사람들은 ‘이건 또 뭐냐’ 하는 반응일 수도 있다.(웃음) 그만큼 완전히 다른 콘셉트로 이야기를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일단은 <방법> 영화판을 만들고 있다. <부산행>에서 함께 했던 안무가와 함께 매일같이 주술로 시체를 움직이는 모습만 생각만 하고 있다. 너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적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동작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요즘 ‘강시’가 다시 보인다. 아시아에서 나올 수 있는 정말 위대한 크리쳐였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많은 분이 ‘진짜 연상호’의 모습은 뭐냐고 물어본다. 명확한 직업이 없다 보니, 가끔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웃음) 영화업계에서 나는 애니메이션을 하다 온 외부인이었다. 그런데 드라마업계나 만화업계를 가보니, 나는 영화를 하다가 온 사람이다.(웃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장르 간 단절이 심했다. 영화끼리, 만화끼리, 애니끼리, 드라마끼리… 자기들 영역이 너무 확고했다. 나도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오래 하고 나서 실사 영화로 이름을 알리니 좀 어색하더라. 하지만 앞으로의 세계는 점점 (콘텐츠가) 혼합된 형식으로 갈 거고, 지금도 이미 (영역 경계가) 많이 깨졌다고 본다. 이왕 어느 쪽 영역에서도 ‘찐’이 아니라면, 그러면서도 다행히 (지금처럼) 일거리를 제안받는다면, 뭐든 어떻겠냐는 생각이다.(웃음) 결론적으로는 프리랜서다. (그렇지만) 집에 가면, 일과 관련된 건 하나도 없다. 애들과 논다. 난 그때가 제일 좋다. 완전 집돌이다.
사진 제공_NEW
2020년 7월 17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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