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 <메기>,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등을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 이주영이 야구선수로 분해 관객을 찾는다. 한 달여 간의 트레이닝을 거쳐 대역 없이 모든 투구를 소화해 낸 그는, 10대 수인을 연기하면서 그간 어느 정도 잃었다고 생각했던 뚝심과 용기를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남과 비교하지도, 주변의 시선에도 동요하지 않고 자기 길을 묵묵히 가는 수인의 고집스러움, 이주영과 닮았다.
영화 오프닝 크레딧에서 ‘96년도부터 프로야구리그에 여성 선수가 뛰는 것이 허용됐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 역시 놀랐다. 이런 법이 있다는 것에 한 번 또 제정된 지 오래됐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런데도 프로 리그에서 뛰는 여자 선수가 아직 없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최윤태 감독과 미팅 후 더 많은 이야기를 집중해서, 다른 관점으로 들려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야구소녀>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주수인’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중점적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라 그 부분을 잘 풀어나갈 수 있을지 감독님과 많이 얘기를 나눴다. 남자 감독으로서 궁금한 부분이나 여성으로 살면서 느끼는 것 등등 서로 궁금한 점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 있으나, 그 모습을 희망적으로 풀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결말도 희망적인 방향으로 가져갔다. 희망적이고 착한 캐릭터가 모여 전하는 착한 이야기, 이게 우리 영화였으면 했다.
결말 이야기가 나와서 묻는다. 하고 싶은 야구를 계속하게 된 수인은 이후 행복했을까?
많은 분이 비슷한 질문을 하신다. 사실 마냥 행복한 결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수인이가 희망했던 일차적인 꿈을 이뤘고, 그것으로 비슷한 길을 가고자 하는 후배에게 포문을 열어준 느낌이었다. ‘최 코치’(이준혁)가 수인에게 여학생의 입부지원서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고교 유일 여자 야구선수였던 수인을 모델 삼아 그 친구가 꿈을 키운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수인이 (프로라는) 또 다른 길을 다시 한번 열어준 게 아닐까. 그 정도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수인이 자신 앞에 놓인 역경의 원인을 실력에서 찾는 지점이 좋았다. 여자라는 게 단점도 장점도 아니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지적한 듯 그는 성별보다 실력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현재 구속 134km를 던지는데 150km를 던지게 된다면 수월하게 프로에 입단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위해 열심히 단련한다. 외부에서 보내는 ‘여자는 안돼’라는 회의적인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또 다른 남자 선수들과 자신을 비교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 역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장벽이 있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에 기준을 두려고 하는 편이다.
어떤 장벽일까.
아역 배우 출신이나 전공자 등 일찍 연기를 시작한 분들에 비해 나는 늦다면 늦게 시작했다. 다른 과를 다니다가 전과했거든. 새로운 공부를 한다고 하니 집에서 걱정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배우) 일이 앞길을 예측하기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니 말이다. 다행히 부모님이 평소 ‘하고 싶으면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는 주의다. 정말 감사하다. 수인처럼 가족 특히 엄마가 그렇게 심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 그건 매우 힘들고 슬픈 일 아닌가.
배우가 되고자 한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교양으로 연극 수업을 수강했었다. 들으면서 처음엔 연기하는 배우들이 마냥 신기했다. 앞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 감정을 표출하는 직업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 신기함이 ‘나도 해보고 싶다’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프로구단에 트라이아웃해 직구, 커브, 슬라이더, 너클볼까지 여러 구종을 시구한다. 평소 야구에 관심도는.
솔직히 말하면 문외한에 관심도 거의 없었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테이블세터, 트라이아웃 등 생소한 단어가 많고, 시합 장면도 나오기 때문에 전반적인 룰과 운영 규칙 등 관련 기본 지식을 공부해야 했다. 만약 평소 야구팬이고 관람도 종종 갔다면 시나리오를 읽고 한 번에 이해했을 텐데 말이지.(웃음) 수인이 주 무기로 너클 볼을 개발하나 트라이아웃 신을 위해 구종 별로 다 배우고 연습해야 했다. 알고 보니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가 많이 없더라. 연습해 보니, 볼 자체가 회전이 없으면서 정교한 제구가 필요해 진짜 쉽지 않았다.
최윤태 감독이 요구한 야구 실력은 어느 정도였나. CG나 대역 없이 소화했다던데.
감독님이 초반엔 큰 기대를 안 하셨다.(웃음) 처음엔 대역을 쓸 수도 있고, CG도 있고, 앵글 활용도 있으니 안심하라고 하셨었다. 그런데 훈련을 하다 보니 그런 것들에 기대기 싫어지더라. 대역을 쓴다면 더 좋은 모습을 뽑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최대한 직접 하고 싶어 결국 대역을 안 썼다.
극 중 수인은 110~130km 정도 속도로 던지는데 실제는 어땠나.
정말 안간힘을 다해 던져도 60km가 나올지 말지였다. 마운드에서 포수까지의 거리가 상당해 직구는 던질 수 있는데 커브는 힘들었다. 아마 공이 날아가는 궤적은 살짝 CG 처리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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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을 준비하는 선수들과 한달 정도 함께 훈련했고, 트레이닝을 통해 ‘수인’ 캐릭터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면.
한 달 훈련으로 수인의 구력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이고,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조차 오만이고 실례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고 훈련에 들어갔다. 공을 던지는 게 어깨와 팔, 허릿심뿐만 아니라 손목 스냅과 악력이 중요하더라. 악력을 키우기 위해 극 중 수인이 악력기를 쥐고 밥 먹는 것처럼 계속 쥐고 있었다. 굳은살이 생기기도. (웃음) 프로 입단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야구부원들과 함께 훈련했는데 그 기간 중 실제로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친구도 있었다. 그의 생생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 좋았고,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힌트를 얻었다. 또 극 중 수인만 혼자 여자라 화장실 한 칸을 라커룸처럼 쓰지 않나. 나 역시 남학생 틈에서 훈련하며 그 감정에 다가갈 수 있었다. 소외감과 포기를 강요하는 듯한 환경에서 꿋꿋이 버틴 수인이 참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추운 겨울에 촬영했는데 부상은 없었나.
정말 추웠다.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촬영했었다. 계속 운동장 한가운데 있자니 너무 추워 연출부에서 소품 넣어두는 창고를 섭외해 그곳을 열어 주셨다. 짬짬이 몸 좀 녹이라고 말이다. 그 안에 웨이트 기구가 있었는데 준혁 선배와 내가 들어가자마자 막 운동해서 열 내곤 했다. 선배와 서로 우리 지금 뭐 하는 거냐면서 몸을 덥혔던 게 기억난다.(웃음) 계속 운동하던 몸이 아니라 어깨와 허리 등의 관리가 필요했지만, 다행히 관리하는 분이 방향을 제시해줘 잘 따라가기만 하면 돼 부상은 없었다.
일부러 체중을 감량한 건가. 아니면 훈련이 힘들어서 저절로 살이 빠진 건가.
야구복을 처음 입어봤는데 생각보다 아주 타이트했다. 조금만 체중이 불어도 핏이 예쁘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영화가 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다소 만화적인 요소나 청량감 있게 다가가는 부분도 있어 비주얼적으로 예쁜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살을 좀 빼고 촬영에 들어갔다.
나만의 한 컷이 있다면. 즉 좋아하는 혹은 아끼는 장면을 꼽는다면.
수인이 ‘최 코치’(이준혁)에게 자기 실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제대로 야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첫 신이기도 하다. 그 전 장면에서 프로에 가겠다는 수인에게 최 코치가 안 된다고, 네가 어떻게 프로가 되겠냐고 해서 수인이 잔뜩 오기가 발동해 자기 실력을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우리 영화의 포문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야구소녀>가 현실적인 드라마이자 스포츠 영화인데, 스포츠 영화의 색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앞으로 수인이 나아갈 수 있는 동력과 오기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영화에 빠져들도록 하는 장면이다.
<꿈의 제인>(2016), <메기>(2018) 등을 통해 탄탄한 팬을 확보한 독립영화계의 대표주자다. 최근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를 통해 대중성을 높였다.
두 영화 모두 캐릭터와 톤이 매력적이라 선택했었다. 독립영화는 그 팬덤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고, 드라마나 상업 영화는 현실적으로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메인스트림으로서의 장점이 있다. 독립영화를 이만큼 했으니 이제는 메인스트림으로 치고 나가 볼까 이런 생각은 아니다. 새로운 장르에서 이전에 없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언제든지 다시 독립영화를 할 수 있다. 또 좀 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때는 거기에 맞는 작품을 할 생각이다. 작품을 통해서 취할 것 혹은 리스크를 생각하고 들어가도 꼭 그 예상대로 들어맞지는 않더라. 그래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선택하려 한다.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는 트랜스젠더 요리사, 이번엔 프로 입단을 꿈꾸는 여자 야구선수로 보이시한 매력을 선보인다.
요즘 소수자나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거나 그들에게 애정을 가진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시류에서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낀 작품을 하게 된 거지 특별히 내가 선호하는 장르나 이미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안 해봤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역을 선택한다.
요리와 야구 등 작품이 늘면서 새로운 능력도 생기겠다. (웃음)
그런 특정 스킬이 있는 게 캐릭터에 다가가기 쉽고, 개인적으로도 재미있다. 작품을 하지 않았다면 언제 야구를 할 것이며 칼질을 전문적으로 배우겠나. 이렇게 배울 기회 자체를 얻는다는 게 흥미롭다. 또 요즘은 어떤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 그런 요소가 한 두개는 들어 가 더욱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데뷔한 지 거의 10년 차다. 그간의 시간을 돌아본다면.
2012년 처음 단편 영화를 했다. 2016년 드라마와 장편영화로 이름과 얼굴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했는데 그러기까지 (아무도 봐주진 않아도) 수면 밑에서 열심히 발버둥 치고 있었다. 대중과 관계자가 볼 때 배우로서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겠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평소 했던 것을 그대로 하고 있는데, 요즘에 들어 그 힘을 조금씩 느낀다. 2012~2013년 정말 알려지지 않았을 때 연기를 더 사랑하면 사랑했지, 지금보다 덜 사랑하진 않았거든. 아무도 모르게 했던 것들이 쌓여 이제야 조금 보이기 시작한 게 아닐지..그래서 이 정도 했으니 요행을 바란다든지, 연기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다.
수십 년 경력을 지닌 배우들도 연기는 할수록 어렵다고들 한다.
<메기> 때 함께 한 문소리 선배도 아직도 연기가 어렵고 잘 모르겠다고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오랫동안 해온 선배를 보면 그 힘듦과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 왔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하물며 나 정도 되는 배우가 연기에 대해 뭐라 뭐라 하는 것은 정말 오만이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내가 특출 난 능력이 있다기보다 그런 힘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극 중 수인의 모습과 닮았다.
고집스러운 것 등 어느정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들이 수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됐다. 20대 후반에 10대 후반을 연기하면서 이미 어떤 마음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수인처럼 밀고 나갈 수 있는 뚝심과 용기를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수인을 연기하면서 그 마음을 기억해 내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평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면.
음, 지금까지 슬럼프라고 느꼈던 시기가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순간이 예상치 못하게 왔던 것 같다. 스스로 만족했고 주변 평가도 관심도도 나쁘지 않은 데 갑자기 현타가 올 때가 있다. 바이오리듬 때문일 수도 있고, 콘트롤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 때문일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찾아오곤 한다. 그럴 땐 그냥 그 시간을 인정해 버리려고 한다. 그게 제일 쉬운 방법인 것 같더라. 슬럼프 혹은 현타 온 원인을 파고들기보다 그냥 뭔가 이유가 있어 그렇겠지, 내가 지금 힘들구나 하고 인정해 버린다. 몇 번 그 시기를 거치니 이젠 좀 더 쉽게 인정하는 단계가 됐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더라. (웃음)
마지막 질문!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일은.
요즘 인터뷰, 라디오 출연 등 <야구소녀> 관련 홍보를 매일 하고 있다. 이전 영화들과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지금 영화계가 너무 힘들지 않나. 몸담은 한사람으로서 극장의 어려운 사정이 체감되고 또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를 보지 못해) 안타깝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더 되고 싶은 마음에 더욱 열성적으로 홍보 중이다.
2020년 6월 19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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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싸이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