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관상>의 수양대군, <신과함께>의 염라, <사바하>의 목사까지…(웃음) 늘 조금씩 변화하는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절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항상 새롭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내 특별한 노력보다는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게 사실이다. 연출자, 스태프, 동료 연기자와 호흡 맞춰 일하는 경험이 늘어날수록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구성원이 모이게 되는 것 같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이정재라는 배우를 또 다른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준다. 그 도움 덕에 용이하게 작품을 해나가고 있다.
2010년의 <하녀> 이후 지금까지 조금씩 더 자연스럽고 힘 있는 연기를 선보이는 느낌이다.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아서 과욕을 부렸던 때도 있다. 이제는 그런 에너지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요즘은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호흡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화는 혼자 하는 모노드라마가 아니라 다 같이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바하>의 ‘박목사’는 기본적으로는 교인이지만, 사이비종교로 일컬어지는 집단을 추적하는 인물이다. 한 종교의 신념과 그 변질을 다루는 작품에 출연하는 게 배우로서 조금은 부담스럽지 않던가.
‘박목사’는 가끔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종교인을 자칭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을 고발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실존 인물을 영화화한 것이다. 장 감독을 통해 그분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만약 그를 연기한다면 내 필모그래피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물론 영화적 묘사 때문에 종교와 관련된 오해의 소지가 생긴다면 배우로서 굉장히 난처했을 것이다. 다행히 기독교인 ‘박목사’와 불교인 ‘해안 스님’(극 중 진선규)이 합심해서 나쁜 놈을 잡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장 감독이 지능적으로 논란을 피해 갔다고 본다.(웃음)
<검은 사제들>(2015)을 연출하고 <시간위의 집>(2016) 각본을 쓴 장재현 감독의 신작인 만큼 많은 관객이 오컬트 요소를 기대했을 법한 작품이다. 한데, 뜯어보니 쓸쓸한 감정이 묻어나는 미스터리 추리물에 더 가깝다.
시나리오를 다 읽었을 때는 탐정 영화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단순히 무서운 영화와는 좀 다르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법 자체가 재미있다. 초반부터 등장인물에 관한 궁금증을 겹겹이 쌓아버리는 미스터리 구조 때문에 혹시라도 어렵고 복잡한 영화인가 싶을 수는 있겠지만, 중반부터는 모든 건에 관한 설명이 꼼꼼하게 잘 돼 있다고 본다. ‘정나한’(극 중 박정민)이 영화를 마무리 짓는 순간 결국 관객도 연출자가 어떤 얘기를 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겠더라.
장재현 감독과의 협업은 어땠는가. 전작에서 뚜렷하고 분명한 색깔이 묻어나는 연출자다.
장 감독은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강렬한 색깔을 지닌 연출자다. 자기만의 독창성을 남에게 이해시켜서 한 컷 한 컷 찍어 내고야 마는 그 집요함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웃음) 그래서인지 나에게 요구하는 표현법도 좀 독특했다. 이전에도 감독의 요구는 웬만하면 다 따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예컨대 어떤 표현법을 요구하던가.
내가 대사를 뱉으면 자꾸 ‘그게 아니라 이런 느낌인데요…’ 하는 식이다.(웃음) 이 부분에서 어미를 올려서 소리 낼 것이냐 말 것이냐, 화를 더 낼 것이냐 참을 것이냐 같은 세세한 것까지 다 물어보며 연기하는데도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 것 같더라. 아, 그럼 차라리 당신이 읽어봐! 내가 찍을 테니까!(웃음) 그랬더니 정말 시나리오의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읽어주더라. 나는 내 휴대폰 카메라로 그 모습을 싹 찍었다.
감독도, 당신도 대단…하다.(웃음)
장 감독도 어떨 때는 ‘아, 이거 아닙니다 선배님. 다시, 다시!’ 하면서 세 네 번을 반복하긴 하더라.(웃음) 나는 집에서 그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그렇게 5~6일정도 연습을 같이 했다. 연출자가 원하는 느낌을 잘 살리고 싶었다.
‘박목사’라는 역할을 소화하는 데 도움이 되던가.
꽤 도움이 됐다. 혼자 연습하면 아무래도 기존의 연기 습관이 튀어나오게 마련이니까. 장 감독은 ‘박목사’라는 인물 안에 자기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장 감독 특유의 말투, 호흡법, 띄어 읽기도 많이 참고했다. 무엇보다 장 감독은 ‘그랬습니까’같은 직접적인 말투보다는 ‘에~ 그랬어요?’ 하는 식의 툭 찌르는 듯한 말투와 습성을 요구했다. ‘박목사’가 상대방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떠보고 그때의 반응을 지켜보는 인물이라 그랬을 것이다.
연기 방식을 탐구하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적극적인가 보다. 오랜 시간 연기해오면서 쌓은 자신만의 인물 접근법과 소화 방식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내 연기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체면 불고하고 뭐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자꾸만 만나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니까, 어떤 연출가는 그렇게 오랫동안 연기한 사람이면 본인이 알아서 준비하면 되는 거지 뭘 계속 만나자고 하느냐는 경우도 있었다.(웃음)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저 사람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가 하나라도 더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어떤 일을 하든, 정말 좋은 방식이라고 본다.
가끔은 쑥스러운 순간도 있다. 이런 건 어때? 나 잘 했냐? 하면서 묻는데 연출자가 ‘아 별론데요…’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 이 자식이, 그래도 내가 선밴데!(웃음) 하지만 체면을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배우 생활은 편해지는 것 같다.
<사바하>에서는 박정민, 이다윗, 이재인 등 신진 배우와 함께 출연했다.
장 감독은 물론이고 그토록 자기 색이 분명한 배우와 함께 일하다 보면 느끼는 게 있다. 그들의 신선한 힘은 도저히 능가할 수가 없다. 노련미는 내가 더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의 힘은 가히 파괴적이다. 나도 어릴 때는 힘 좀 썼는데 말이다.(하하하) 그럴 때는 만약 저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을 내가 따라 해보면 어떨지를 상상한다. 나만의 총알을 비축하려면 그들의 것을 배워야 한다.
드라마에서도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저 양반은 제안해도 안 하겠지 싶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드라마 제안이 딱히 많이 들어오지는 않는다. 일 년에 한두 편 정도?(웃음) 요즘 <스카이 캐슬>같은 드라마를 보면 소재는 물론이고 영상 매무새와 음악까지 상당히 좋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사바하> 음악감독이 그 음악감독이더라고.(웃음) 그래서 드라마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기는 한데… 그동안 워낙 쉼없이 쭉 달려왔더니 일정이 잘 맞지 않았다. 방송은 편성 일자를 잡아놓고 촬영을 하는지라, 애초에 그 일정을 맞추지 못할 것 같으면 합류하기가 어렵더라.
정우성과 함께 창립한 ‘아티스트 컴퍼니’에서 영화 제작과 기획을 맡고 있다고.
주변에서 ‘당신들이 선배인데 힘 좀 실어 달라’는 제안이 여러 차례 있었다. 워낙 오래 영화 만드는 일에 몸담았으니, 힘을 보탤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못 할 건 없다고 봤다. 그렇게 시작한 일인데 참 재미있다. 완성되지 않은 시나리오를 같이 기획하는 건 어떠냐, 공동 제작은 어떠냐…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회의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난다. 영화 만드는 일이 갈수록 더 재미있는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오랜 시간 영화계에 몸담았고 많은 일이 있었다. 일종의 소회를 전해준다면.(웃음)
힘든 일이 생기면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제는 그런 일이 모든 사람에게 간혹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안다. 특별히 내 상황만 한탄스럽고 원망스럽지는 않다. 이런 일이 나에게도 생겼구나 하면서 받아들이려는 요즘이다.(웃음)
사진 제공_CJ엔터테인먼트
2019년 3월 4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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