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암수살인>의 시작은. 연출 계기가 궁금하다.
시사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본 것이 시작이었다. 복역 중인 살인범이 또 다른 범행이 있다고 형사를 도발하고, 형사는 그 범죄를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두 인물에 호기심이 생겼다. 당장 다음다음날 부산에 내려가 취재를 시작했다. 한편으론 의심도 있었다.
어떤 의심인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형사의 모습이 아닐지 마음 한편에서 의심이 들었고, 만일 그렇다면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부산에 내려가 방송에 나온 형사님께 정중하게 부탁하고 주변 동료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이후 만들어진 게 아닌 진짜라는 확신이 들었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형사님과 신뢰를 쌓아 나가는 동시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진행형인 사건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어려웠을 것 같다. 고려해야 할 부분도 많았을 테고 말이다.
맞다. 완결이 안 된 사건을 쓰는 게 쉽지 않았지만 동시에 묘미도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방영 당시 현실만 다뤘지만, 난 그 이후 진행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 말이다.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 극 중 ‘형민’(김윤석)처럼 본인이 쫓겨났다고(좌천당했다고) 형사님이 전화를 주셨었다. 기분이 참 묘하더라.
‘형민’의 모델이 된 형사님은 어떤 분인가. 김윤석 배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사라기보다 회사원 같은 느낌이었다고 하던데.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관습적인 형사의 모습이 아니셨다. 형사들이 보통 캐주얼 한 복장을 하는 데 반해 그는 정장을 주로 입었었다. 그 모습이 그분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대한 예의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모습이 신선했고, ‘형민’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많이 반영됐다.
영화화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는데,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동력은 뭘까.
이걸 왜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2012년부터 자문했었다. 스스로 설득이 안 되면 중간에 지치게 되거든. 그 결과 우리 사회의 파수꾼 같은 형사 한 명쯤 있으면 좋을 것 같고, 그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오랜 시간 준비하면서 중간에 부침도 있었지만, 완성할 수 있다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많이 힘들지 않았다.
<암수살인>은 ‘형사 VS 연쇄살인범’의 대결 구도를 지닌 범죄 수사물에서 흔히 볼 수 폭력과 욕설과 액션이 주가 되는 장르적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결’이 다르다고 표현하는 이유일 것이다.
형사와 살인범의 대결은 수없이 재생산돼 왔다. 보통 피해자가 있고 형사는 그 범인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우리 이야기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닌다. 살인범은 이미 잡혀 있고,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밝힌다는 점이 새로웠다. 그렇기에 일반 범죄 수사물의 공식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기대하는 요소가 있는데…. 쾌감을 더하기 위해 극의 분위기나 방향을 살짝 수정할 생각은 들지 않던가.
처음부터 ‘암수살인’의 희생자를 자극적으로 소비하려 하지 않았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 영화가 지닌 결과 방향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오는 긴장과 물리적 쾌감을 어디에서 끌어 올리고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다.
그 결과는.
관객을 적극적으로 극에 동참시키자고 생각했다. 관객이 극 중 형사인 ‘형민’(김윤석) 입장이 되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도록 한 거다. ‘형민’과 똑같은 입장에서 살인범 ‘태오’(주지훈)라는 괴물을 만나게 되는 거지. 보통 범죄물을 보면 관객은 진실을 알고 형사만 모르는 구성이 많다. 하지만, 우린 형사나 관객이나 지닌 정보의 양을 동일하게 유지했고, 그럼으로써 관객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직접 추리하도록 유도했다. 또,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촬영에 신경 썼다.
촬영에서 특이점이 있다면.
실제 부산의 공기와 구도심의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세트가 아닌 대부분을 로케이션으로 촬영했다. 공간에서 실제적인 에너지가 흐르길 바랐거든. 조명도 마찬가지인 게 인위적인 조절보다 최대한 자연광을 활용했고, 망원렌즈를 주로 사용하여 다큐멘터리처럼 두 인물의 대결을 관망하는 듯 보이게 하려 했었다.
극 중반 ‘형민’(김윤석)의 진심이 드러나기 전까지 그가 살인범 ‘태오’를 통해 얻으려는 게 무엇인지 애매하기도 하다.
‘형민’ 캐릭터를 완전히 셋업한 상태로 초반에 보여줄지 아니면 양파껍질 벗기듯이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다가 결정적으로 그의 진심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찬찬히 보면 ‘형민’의 행동이 하나씩 이해될 거다. 초반 그는 ‘태오’가 사람을 죽여 본 놈이라고 확신하기에 어떻게든 그의 죄를 증명하려 하고, 이를 위해 온갖 비위를 맞춰가면서 단서 하나라도 얻으려고 노력한다. 이후, 그의 진심이 서서히 드러난다. 아마도 클라이맥스는 ‘너(강태오)한테 관심 없고, 모든 것이 다 피해자를 그들의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대사일 거다. 또, 검사(문정희) 앞에서 ‘기소가 잘못될 경우 나 혼자 쪽팔리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실제 형사님께서 내게 해준 말이었다.
살인범과 형사, 두 인물 캐스팅에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왜 김윤석과 주지훈이었나.(웃음)
인물 중심의 범죄 수사극이고 더군다나 몸으로 부딪치는 흐름이 아니기에 누가 연기할지가 관건이었다. 우린 역수사방식, 즉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서 오는 쾌감이 없기에 자칫하면 긴장감을 놓칠 수 있다. ‘형민’은 그 긴장감을 단단하게 붙잡아 둬야 하는 인물로 텍스트보다 서브 텍스트가,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관적인 베테랑 형사이지만 사회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조용하지만 용광로 같은 눈빛이 살아 있는 인물인데, 그 긴장감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로 (솔직히) 김윤석 선배밖에 생각나지 않았었다. 다행히 선배가 시나리오를 좋게 보고 출연을 결정, <1987> 을 끝내고 바로 합류해 주셨다.
살인범 ‘강태오’역의 주지훈은 어떤가. <신과함께-인과 연> 과 <공작>으로 누구보다 바쁜 여름을 보낸 그인데…
‘강태오’는 쉽게 규정되고 납득되는 살인범이 아니다. 너무 눈에 띄는 인물이고 감정이 극단적으로 변하고 그 스펙트럼이 넓은 인물이다. 김윤석 선배가 캐스팅된 상태에서 누가 ‘강태오’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때, 우연히 영화 <아수라>를 보게 됐다. 그 내로라하는 배우 사이에서 기 눌리지 않고 ‘문선모’를 연기한 주지훈에게 시선이 가더라. <아수라>가 욕망을 좇는 불나비 같은 ‘문선모’ 이야기로 보이고, 그의 내재된 욕망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졌었다. 이후 주지훈의 전작을 다 훑어봤다. <좋은 친구들>(2014)의 경우 워낙 연기를 잘했는데, 나만 몰랐더라. (웃음) 보고 나서 바로 ‘강태오’를 찾았어! 했지.
‘강태오’가 배우로서 탐낼 만한 캐릭터임은 분명한데, 그만큼 위험 부담도 큰 역할이다. 그(주지훈)가 쉽게 수락했나. (웃음)
아마 대본과 윤석 선배를 향한 신뢰감 덕분 아니었을까. 감독인 나야 아직 검증 안 된 신인이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건 내가 구상한 ‘강태오’보다 훨씬 입체감 있게 그가 살려냈다는 거다. 사투리 연습도 정말 성실히 했고, 그 안에서 디테일한 표정과 감정선을 연기했지 않나. 박수 쳐주고 싶다. 게다가 캐스팅할 당시는 주지훈 배우가 ‘태오’역에 적역이었을 뿐인데, 요즘 이렇게 가장 핫한 배우가 됐으니…. 내 입장에선 로또 맞은 것도 같다!(웃음)
배우에게 특별히 연기 주문한 부분이 있다면.
캐릭터, 기존 범죄물과 결이 다른 지점들, 각 장면이 지닌 목표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대화를 많이 나눴을 뿐 디테일한 디렉션은 거의 없었다. 윤석 선배는 작품 전체를 보는 눈이 매우 탁월하기에 믿고 맡겼던 것도 있다. 공간과 상황 속에 배우가 몰입하길 바랐고 그 모습을 몰래 포착하는 연출법을 채택했다. 직접 개입하는 연출은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 배우의 연기가 유기적이고 더 생동감 있었던 것 같다. 어설프게 개입했다면 더 안 좋았을 거다.
곽경택 감독이 제작과 시나리오에 참여했다. 주지훈 배우의 사투리 지도도 손수 했다고 들었다.
‘곽경택 영화 같아’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자랑스럽다. 감독님은 내 영화적 스승으로 그분의 영화적 유전자가 나에게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암수살인>을 하기로 마음먹고 어려울 때 손 내밀었더니 감독님께서 흔쾌히 도움 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전히 준비 중이었을지도 모르겠다.(웃음) 게다가 사투리 코치도 직접 하셔서 큰 고민거리를 덜어 주셨다. <암수살인>에 영화적 성취가 있다면 많은 부분 곽경택 감독님과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이 영화가 지향한 바를 지지해 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문법과 다른 길을 가는 게 힘 있는 제작자 혹은 거장들이나 가능하지 나 같은 신인 감독에겐 힘든 일이다. 누군가 힘 있는 사람이 굳게 지지해줘야 하는데, 다행히 나한테는 그런 지원군들이 충분히 있었고, 그렇기에 의도한 대로 만들 수 있었다.
<암수살인> 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는지.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지만, 감히 봐주셨으면 하는 포인트가 있다. <암수살인>은 범인을 쫓는 게 아닌 피해자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역수사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다. 새로운 시도가 주는 감흥이 있을 것이고 배우들의 미친(?), 존재감 있는 연기가 긴장감과 쾌감을 주리라 본다. 좀 더 욕심낸다면 관객이 영화에 담긴 사회적 함의에 묵직한 울림을 느끼고, 이후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계해서 존재하는 영화로 생각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다.
<닥터 K>(1999), <세이 예스>(2001)의 조감독을 거쳐 <봄, 눈>(2011)으로 데뷔했다. 이번 <암수살인>은 메이저 영화 첫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영화 속에 담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영화가 섬과 섬 사이의 다리 같은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그런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세상에 공개할 때 동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 거다. 그게 오락적인 재미일 수도 있고 인간에 관한 깊은 통찰을 전하는 것일 수도 있을 거다. 그런 어떤 의미가 있어야 창작자로서 허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내 삶에 충실하는 한편 세상을 향해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 놓으려 한다. 만약 영화만을 생각해서 영화 외의 삶, 즉 일상을 잘 못살아간다면 너무 좁은 세계에 매몰되고 말 거다.
평소 좋아하는 영화는.
관객인 나에게 파토스를 전달하는 영화가 좋다. 고전 작품인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1952) 그리고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2007)을 좋아한다. 특히 <조디악>은 <암수살인>의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적이지 않은 호흡과 템포로 집념을 그린 점이 좋았다.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만날 수 있을까.
생각 중인 게 있긴 하다. 인간의 욕망을 주제로 다루고 싶다. 욕망을 채우려고 달려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에 대한 함의를 담으려 한다. 장르적으론 범죄물로 상업적 쾌감도 있을 거다. (웃음)
마지막 질문! 최근 행복한 일이나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면.
일상적인 게 행복한 것 같다. 세 아이와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가장 행복하다. 그때는 어떤 근심도 안 생기는 것 같다. 또, 영화 현장에 있을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진짜 영화 하길 잘 했다고 새삼 깨닫는다. 특히, 100여 명이 넘는 스태프가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하고 한편으론 경이로울 정도다.
2018년 10월 15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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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