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완성본을 본 소감은.
시나리오 보면서 제작진과 얘기했던 대로 잘 나온 것 같다.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데, 접근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실화에 기반했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니지 않나. 적절하게 극화해 영화로 재탄생한 거로 생각한다.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2015)에 이어, 이번에는 곽경택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 김태균 감독과 함께 했다. 곽경택 감독이 각본과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뭔가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웃음)
개인적으로 좋은 선례라고 생각한다. 김태균 감독이 곽경택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이번 <암수살인>으로 메이저 영화에 데뷔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연출부 출신 감독을 위해 각본을 쓰고 제작까지 맡아준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간 오랜 시간 영화판에 몸담으며 많은 연출부 친구를 만났지만, 실제 입봉하는 이들이 정말 드물다. 아무리 친하고 돈독한 관계를 쌓았다 해도 감독으로 데뷔하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인데, 이번에 곽경택 감독님이 물심양면 도와주지 않았나. 게다가 ‘강태오’를 연기한 지훈이의 사투리 연기를 손수 지도하기도 했다.
많은 작품 제안이 들어올 거로 예상되는데, 그 중 <암수살인>은 선택한 이유는.
일단 다른 작품들과 결이 달랐다. 사실 들어오는 시나리오의 반 이상이 국정원, 공작원, 형사물이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 배우들이 비슷한 상황일 거다. 관객도 그렇겠지만 배우 입장에서도 피로감이 든다. 그 와중에 만난 보석 같은 시나리오였다고 할까. 결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 자체도 독특했다. 게다가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하니 은연중에 힘이 느껴졌었다.
형사대 연쇄살인마의 대결 구도인 범죄물치곤 이렇게 액션이 드물기도 힘들 것 같다.
그렇지. 극 중 형사 ‘김형민’(김윤석)과 살인범 ‘강태오’(주지훈)가 접견실에서 여섯 번을 만난다. 서로 웃으면서 상대의 간을 본다고 할까. ‘형민’은 ‘태오’를 취조하거나 심문하는 게 아니니 오로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여 그의 입을 열게 하고 교묘하게 실수를 유도해서 단서를 잡아채야 하는 상황이다. 신나게 한번 싸웠으면 시원하겠다 싶은 순간도 있었고 힘들기도 했지만, 액션과는 다른 묘미가 있었다.
극 중 ‘암수살인’을 쫓는 형사 ‘김형민’의 실제 모델이 있을 텐데, 혹 만났었는지.
내가 촬영하는 동안 두 번 정도 방문하셨었다. 50대 중반 정도 나이로 아주 조용하고 말수가 적으신 분이다. 형사보다 마치 일반 회사원 같은 모습이고, 특별히 뭔가 물어보기 전에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과묵한 분이시다.
‘형민’을 연기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이미 범인이 드러난 상태라 어디서 긴장감을 끌어 올릴지가 관건이었다. 더욱이 액션이 주는 쾌감도 배제된 상태 아닌가. 이런 약점을 안고 갈 만큼 시나리오가 치밀해야 했는데, 다행히 그 안에 다 들어있었다. 그만큼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시나리오였다. 우리 영화 이후 다양한 형사물이 나오지 않을지 기대해 본다.
그간 <거북이 달린다>(2009), <극비수사>(2015)에서 보여줬던 형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대사나 행동 그리고 복장까지 말이다. 이번에는 힘을 뺀, 자제와 억제의 연기를 보여준다.
그 힘 뺀 연기가 재미있으면서 매력이었다. 극 중 ‘형민’(김윤석)은 화가 난다고 주먹을 휘두를 캐릭터가 아니거든. 정말 화가 난다면 그는 아마도 그냥 나가 버릴 거다. 또, 흔히 범죄 수사물에서 많이 봤던 형사들처럼 일주일 내내 같은 옷 입고 설렁설렁하고 다니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원래 마약수사대 출신으로 형사과로 전출된 상황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마약수사대가 훨씬 좋은 보직으로 아마도 기본적으로 자켓을 입었을 것이고, 본인의 성격상 단정한 차림새를 했을 거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연기한 배역에 모두 애정이 있겠지만, 이번 ‘형민’역은 좀 더 각별해 보인다.
빈말이 아니고, ‘형민’은 지금까지 맡았던 형사 중 가장 마음에 들고 형사로서의 능력치 역시 높은 인물이다.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차분하고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접근해서 사건을 해결하지 않나. 필요 이상으로 영웅주의를 내세우지도 않고 소신껏 수사하는, 오롯이 이성과 노력으로 캐 나가는 강인한 인물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형사를 연기했던 <거북이 달린다>(2009)나 <극비수사>(2015)는 직업이 형사인 가장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형민’은 뼛속까지 형사로 사건을 인지하고 해결하는 것을 천직처럼 여기는 인물이다. 김태균 감독과 여러 번 논의했던 부분이 결말이었는데, 극 중 범인을 체포하고 사건이 종결되는 것으로 마무리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모든 ‘암수살인’의 피해자가 확인돼야 마침표가 찍힐 수 있을 것이고 아마도 영원히 마침표는 없을지도 모른다.
극 중 불같이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태오’(주지훈)와 달리 ‘형민’은 줄곧 차분하고 어떻게 보면 냉소적인 면도 있는데, 촬영하며 욱하는 순간은 없었나. (웃음)
왜 없었겠나, 당연히 욱했었지. 특히 취조실에서 ‘형민’이 ‘태오’로부터 범행을 자백받는 모습을 블랙 미러를 통해 검사가 밖에서 지켜보는 신이 있다. 이때, 영화 봤으니 알겠지만, ‘태오’가 깐죽거리며 모든 것을 다 뒤집어 버린다. ‘형민’이 어찌나 유린당하던지…. 오죽하면 그 점잖은 ‘형민’의 입에서 욕이 나올까. 순간 나도 한 대 치고 싶기도. (웃음)
극 중 사비를 털어 ‘태오’를 구워삶으며 자백을 유도하고, 심지어 순경으로 강등되기도 하는데, 어디까지가 실화인지 궁금하다.
음, ‘태오’의 자백을 바탕으로 현장 검증한 후 기소해서 재판대에 세우고, 그 결과 무죄판결을 받은 건 사실이다. 기소하기까지 그토록 큰 노력을 기울였는데, 무죄판결 받을 당시 ‘형민’이 느꼈을 좌절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다. 또 그 일로 파출소 순경으로 강등된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보며 어떤 진정성을 느꼈다면 아마도 실화가 주는 강한 힘 덕분일 거다.
‘태오’역의 주지훈과의 호흡은.
난 정말 바라만 봤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가 그가 집중할 수 있도록 바라봐 주는 거였다. 서울 토박이인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부산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핸디캡이라 할 수 있다. 크랭크인 몇 달 전부터 연습한 거로 알고 있다. 게다가 일반인도 아닌 감정의 극단을 오고 가는 연쇄살인마 아닌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음….
‘태오’ 역이 배우로서 탐이 나면서도 선뜻 맡기 어려운 역이다. 성공할 경우 칭찬을 받을 수 있지만, 너무 강렬한 역할이라 비교당하기 쉽거든. 가령 연쇄살인범과의 대립이라는 면에서 관객들이 <추격자>(2008) ‘지형민’(하정우)을 떠올릴 수 있다. <다크 나이트>(2009)의 ‘조커’(히스 레저), <노인을 나라는 없다>(2007)의 ‘안톤’(하비에르 바르뎀), <양들의 침묵>(1991)의 ‘하니발’(안소니 홉킨스) 등 유명 배우들이 펼쳤던 명연기와 비교되기 십상이다. 탐이 난다고 다 던지고 도전한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사실 ‘악역’ 하면 당신도 만만치 않다. <타짜>(2006)에서 ‘아귀’, <황해>(2010)의 ‘면정학’ 최근 <1987>의 ‘박처장’까지 말이다. 혹시 주지훈에게 악역 연기 관련 조언을 하진 않았나.
그는 스스로 컨트롤을 잘하는, 그의 호흡대로 연기하는 배우다. 말했듯 나는 그저 옆에서 지켜볼 뿐이다. 어차피 카메라 앞에서 선후배는 없는 거니 말이다.
그간 많은 작품들이 공권력에 불신을 표현했다면, 이번 <암수살인>은 제작진이 밝힌 바 있듯 우리 사회의 파수꾼 같은 형사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공무원이란 결국 나라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다. 무능하고 비리를 일삼는 이들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들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극 중 ‘형민’과 같이 맡은 바 일에 소임을 다하는 분들이 더 많을 거로 생각한다. 영화를 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암수살인’을 파헤치는 분들이 있고, 그분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건을 해결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작년 연말과 올 초 <1987>의 ‘박처장’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는데, 이번에는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우문이지만, 어떤 역할이 더 어렵던가.(웃음)
이번 ‘형민’을 보고 많은 분이 힘 뺀 연기라고 하는데, 사실 힘이라는 게 일부러 빼려고 한다고 빠지고 힘주려 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다. <1987>의 경우 자기만의 신념이 있는 강력한 악당이 필요했기에 지독한 악역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됐었다. 당시 장준환 감독님이 ‘당신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낚였었는데(?) 정말 힘들었었다. 분량이 많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번 <암수살인>은 처음부터 계속 등장하며 나름 긴장감을 조절해줘야 했다. ‘태오’(주지훈)가 놀 수 있도록, 즉 광기를 마음껏 표출할 수 있도록 밑에서 깔아줘야 했거든. 광기에는 이성으로 이성에는 감성으로, 직선으로 치고 들어오면 원으로 방어한다고 할까. 여하튼 감정을 계속 바꾸며 긴장감을 조성하고 유지해야 했는데 그 과정이 매우 재미있으면서 보람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형민’(김윤석)이 그를 비웃는 ‘태오’(주지훈)를 향해 “너를 이겨 먹어서 내가 모하니?”라는 대사가 마음에 와닿더라. 영화가 지닌 메시지를 농축한 한마디라고 본다. 기억에 남는 대사나 장면을 꼽는다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도 그 대사가 가장 좋다. 그리고 형민이 ‘이제 정년퇴직이 13년 남았다, 그(태오)가 15년 후에 나오면 그때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니니, 그의 살인을 막을 수 없다’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사회적으로 강력 범죄 형량이 너무 낮다는 의견이 있어 더 다가오는 대사였다.
촬영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면.
에피소드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우 두 명이 응급실을 갔었다. 지훈이는 위경련 비슷한 증상으로 선규는 급성 독감으로 말이다. 지훈이가 사투리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방증 아닌가 한다. 선규의 경우는 당시 몹시 추운 곳에서 촬영하다 보니 독감에 걸렸었다. 우리가 세트 촬영이 거의 없고 대부분 로케이션 촬영이었다. 장소를 헌팅한 후 빈 공간에 세팅하다 보니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심했었거든. 다음 날 아침 촬영하러 나오니 밤새 열이 올라 응급실 다녀왔다고 하더라.
그간의 필모를 보면 장르와 역할이 정말로 다채롭다. 작품 선구안도 매우 좋아 보인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 촉이 발달한 걸까. (웃음)
선구안이라…. 아무래도 오랜 시간 연극했던 게 도움이 많이 된다. 연극의 경우 기본 한 달, 잘 풀리지 않는 경우엔 몇 달에 걸쳐 대본을 분석하곤 한다. 영미 희곡의 경우는 원서와 번역본을 나란히 놓고 하나하나 집요하게 비교 분석하기도 했었다. 대학 동아리 때부터 그런 학구적 분석이 습관이 됐고, 영화 작품 분석에도 유효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암수살인>에서 관객이 집중해서 봐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김형민’ 형사도 살인범 ‘강태오’도 아닌, '암수살인'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영화의 동력이다. 엔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미 해결돼 끝난 사건이 아니다. 아까 잠시 언급했듯이 우리 시대의 파수꾼에 대한 이야기라고 감독님과 얘기했었는데, 그 파수꾼이 꼭 형사일 필요는 없을 거다. 중요한 건 주변에 대한 관심이라고 본다. 또, 밀도 있게 사건의 이면을 빠지지 않고 건드렸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기쁠 것 같다.
다음 작품을 소개한다면.
음, <미성년>이다. (기자 주 김윤석 연출, 김윤석 주연) 이번 인터뷰는 <암수살인>만 얘기하기로 했다!
마지막 질문!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나 인상적인 일이 있다면.
언론배급시사 때 영화 보고 좋다고 많은 분이 말해줘서 참 행복했다.
2018년 10월 10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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