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자신의 생일에 죽으려고 마음먹었던 남자(지용석)는 타인의 희생 덕분에 다시 삶을 살 수 있었다. 3대 독자를 잃은 엄마(예수정)는 매해 아들의 기일에 찾아오는 남자를 마치 ‘아들’인 양 반기며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이렇듯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호한 상황 속에서 <행복의 나라>는 행복 하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극 중 타인의 목숨값을 무겁게 지고 사는 남자 ‘민수’를 연기한 배우 지용석은 한 달여를 홀로 여행하고 자서전을 쓰며 극 중 인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행복의 본질과 자신에 대해 뒤돌아보는 값진 시간이었지만, <행복의 나라> 완성 후에는 꽤 오래 좌절과 괴로움의 시기를 보냈다고 지용석은 말한다. 영화의 개봉이 불투명하고 영화제 탈락이 반복되자 정신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단지 배우로서만이 아니라 영화 전반에 너무 깊숙이 관여한 탓이다. 이제 <행복의 나라>의 개봉을 목전에 둔 지용석, 긴 터널을 지나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다고 한다. 개봉으로 파생되는 어떤 결과물에 대한 기대보다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한 요즘이란다.
<행복의 나라>가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아 판타스틱 장편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축하한다. 영화에 관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영화는 자살을 시도한 청년 ‘민수’(지용석)를 구하려다가 한 청년이 목숨을 잃고, 그 후 8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를 그린다. ‘민수’는 그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의 제사에 매해 참석했었다. <행복의 나라>는 마지막 제사 참석 후 벌어지는 사건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극 중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기일은 ‘민수’(지용석)의 생일이다.
그러게. 8년간 매해 자신의 생일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민수’(지용석)의 심정이 어땠을까.
영화가 삶과 죽음 그리고 용서와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상당히 무거운 감이 있다. 어떤 점에 끌렸는지.
‘민수’(지용석)는 겉으로 본다면 사랑하는 임신한 아내와 단란한 가정, 직장과 집 등 흔히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갖춘 인물이다. 하지만 8년 전의 사고 후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고, 이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민수’의 그런 면에 끌렸었다. 나도 비슷했던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 경제적으로 문제없이 적당히 잘 살았고, 만약 내가 힘들다고 불행하다고 얘기한다면 칭얼거림으로 치부될 만한 외적인 조건을 갖췄음에도, 그런 조건과 관계없이 행복을 갈구했었다.
꽤 괜찮은 삶의 조건을 갖췄음에도 행복을 갈구했던 이유가 뭘까.
글쎄, 그걸 알면 갈구하지 않았을지도.(웃음) (아마도) 어릴 때부터 주위에선 어떤 결과에 만족하고 다음번에 잘하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그게 싫었고 자책하곤 했었다. 나 스스로가 만족을 못 했다고 할까.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더 갈구한 게 아닐지.
<행복의 나라> 촬영 시기는. 연출을 맡은 정민규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다.
2016년 8월에 촬영했으니 거의 2년 전이다. 시간이 촉박해서 20일 정도 10회차로 촬영을 마쳤었다. 정민규 감독은 당시 어떤 일을 계기로 친해졌고 잘 맞아서 같이 작업하게 됐었다. 사실 ‘민수’라는 캐릭터가 쉽게 이해되는 인물이 아니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리고 최대한 상업 영화적 문법을 배제하고 다르게 연기 플랜을 짜보자고 했었다. 그 결과 내 경우 다른 배우와 사전 미팅 없이 바로 촬영장에서 처음 만났다. 극 중 제사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정말 ‘희자’를 연기한 예수정 선배를 비롯해서 다른 배우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라 어색했었다. 물론 다른 배우는 모두 리허설을 함께 했었고, 나만 빠진 거였다.
그 장면에서 흐르는 어색한 침묵이 단순히 연기만은 아니었나보다! (웃음)
바로 그 어색한 침묵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배우간에 거리감을 뒀던 거다. ‘민수’는 그 가족 중 섬과 같은 존재거든. 사실 그런 제안을 하는 게 (예수정) 선생님께 실례가 될 수 있기에 정말 조심스러웠다. 새파란 후배가 사전에 얼굴도 안 보고 실제 촬영 때 보자고 한다는 게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극 중 ‘희자’(예수정)는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이끈 ‘민수’를 향해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는 지닌 인물인데, 다행히 선생님도 미리 ‘민수’를 안 보는 게 좋겠다고 흔쾌히 응해주셨다.
다른 인물 속에 ‘섬’ 처럼 앉아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민수’(지용석) 혼자 등장하는 장면이 많고 대부분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대사를 하는 경우에도 ‘민수’의 얼굴만 보이는 신이 많다. 상대역과 주고받으며 연기하는 게 보통인데, 이번에는 나 혼자만 하려니 어떻게 앉아 있어야 할지 어렵더라. ‘민수’의 성격상 괴로움을 너무 드러내도 안 되거든. 영화 속 모습은 그나마 편집돼서 그 정도이지 실제로는 롱테이크가 더 많았고 더 길게 촬영했었다.
극 중 ‘민수’를 짓누르는 무언의 압박감에 관객 입장에서도 숨이 막힐 정도인데, 그 감정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았겠더라.
촬영 때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일부러 촬영장에서 주변과 어울리지 않고 불편하게 있었다. 혼자 아주 우울하게 있다 보니 다른 동료 선배들과 얘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그 점이 많이 죄송하다.
촬영 전에 혼자 여행 다녀오라고 감독님이 주문하셨다고 들었다. 감독님이 말하길 여행에서 돌아온 당신은 ‘민수’ 자체였다고.
한 달 정도 지금까지 안 가본 곳 위주로 다녔었다. 강원도는 많이 가봤으니 삼척 밑으로 경상도 바닷가 쪽을 돌았다. 해변과 항구, 읍내나 5일 장 등을 보며 뭔가 꽂히면 쉬었다 가고, 숙박비가 저렴하면 또 며칠 머물다 가곤 했다. 사람들과 접촉을 안 하고 최대한 혼자 지내며 그렇게 온전히 ‘민수’가 돼보고자 했다. 여행 갔다 오라면서 정 감독이 나에게 주문한 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자서전을 쓰는 것, 또 하나는 혼자 지냈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보는 거였다.
홀로 여행하는 시간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지금까지 며칠 혼자 여행하곤 했었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혼자 다녔던 적이 없었다. 자서전을 쓰면서 많은 걸 얻었다. 술 마시면 고백하는 정도가 아닌 정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 즉 나 자신의 치부를 써보라고 했거든. 쓰다 보니 내 인생에 생각보다 굴곡이 많았다. 여자 친구와 싸운 것, 가족과 갈등한 것 등을 돌아보니 내 안에 여러 감정이 쌓여 있더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됐다.
성장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 돌아보면 무언가 성장한 게 맞다. 한 달 동안 여행하며 자서전 쓰고, 돌아와서 영화를 찍을 때까지는 아주 행복했었는데, 그 이후가 괴로웠다.
이유는.
<행복의 나라>는 내가 단순히 배우로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거의 정 감독과 함께 만들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후반 작업하는 4~5개월 동안 내 모든 걸 쏟아부었었다. 촬영은 20일 만에 완료한 데 비해 후반 작업에 공을 많이 들였다. 편집본만 해도 수십편이었을 정도다. 그렇게 야심 차게 준비하고 정성을 들였는데 목표로 했던 영화제에서 다 떨어지고, 개봉도 불투명해졌으니 정신적으로 힘들더라. 한때는 <행복의 나라>에 열중했던 1여 년의 시간을 지우고 싶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힘들었던 시간을 거쳐 결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다행히 (주)인디스토리 측에서 가편집본을 보고 배급을 결정해줬고, 우리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의 계기가 됐다. 그런 와중에 개봉 지원이 되면서 편집을 다시 해보자 싶었다. 나와 정 감독이 치기 어린 마음에 덤볐으니 - 당시 손연진 편집 기사를 우연히 만난 것도 한몫했다 - 객관적으로 편집할 필요가 있겠더라.
재편집 전후의 차이는.
일단, 배급을 맡은 (주)인디스토리가 더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도 왜 진작 이렇게 편집하지 않았냐는 반응이었다. 사실 정 감독은 재편집을 반대했었는데, 완성된 재편집 본을 보더니 만족했다. 이전 것은 우리가 너무 자부심?에 취한 나머지 편협한 시각으로 접근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연기 못한 부분 위주로, 감독은 자신이 연출 못한 부분 위주로 편집을 고집했던 거다. 결국 객관적이지 못했던 거지.
그렇게 <행복의 나라>를 다시 사랑하게 된 건가.(웃음)
하하, 원래 아픈 손가락 같았는데 다시 애정도가 올라갔다. 배우로만 참여했던 영화의 경우는 평이 어떻든 그 영화 자체로 다 좋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내 역할이 섞여 있고, 영화에 관해 너무 깊숙이 잘 알다 보니 마냥 좋게만 볼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놔줘야 할 때가 됐다. 시원섭섭하다.
극 중 ‘민수’(지용석)로 인해 3대 독자를 잃은 ‘희자’(예수정), 8년 동안 묵묵히 제사를 찾아가는 ‘민수’, 두 인물 모두에 공감이 가는 동시에 그들의 행동이 이해 안 되기도 한다.
극 중 표현되지 않은 전사를 써보자면, ‘민수’는 스스로 ‘희자’를 찾아갔을 거다. 극 중 ‘민수’가 운영하는 세차장에서 세차하듯이 그렇게나마 속죄를 하고 싶었겠지. ‘희자’가 은연 중에 내비치는 과도한 부담감에 허우적대면서도 오랜 시간 말을 못 하고 찾아가지만, 가정을 이루고 나서는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온전히 행복해지고 싶었을 거로 본다.
극 중 기독교를 믿는 ‘희자’(예수정)가 지극 정성으로 아들의 제사를 지낸다. 또, ‘민수’(지용석)의 아내가 액땜을 위해 팥을 준비한다든지, ‘민수’가 한밤중 야산에 올라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죽은 사람의 물건을 태운다든지 기독교와 민간 신앙이 충돌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희자’(예수정)와 ‘민수’(지용석)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 필요했었고, 당시 정 감독이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무속 행위에 꽂혔던 듯하다. 또, 보통 기독교인은 기일에 추모 기도를 하는데, 추모 기도로는 의도했던 상황을 표현하기엔 약해 보일 듯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설정했다.. 아니면, ‘민수’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희자’의 의도일지도? 이렇게 얘기하니 (예수정) 선생님이 경악하시더라.
그렇다면 정말 ‘미저리’겠지! 극 중 의중을 가장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 ‘희자’(예수정)이다. 그녀가 ‘민수’(지용석)를 아들 대신으로 극진히 여기지만, 한편으론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서서히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 시나리오에는 그런 ‘미저리’ 같은 ‘희자’의 마음이 투영된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 영화의 테마가 ‘행복’이 아니라 ‘복수’가 될 듯해서 수정했고, 마지막 표정은 (예수정) 선생님께 맡기기로 했다.
그 마지막 표정이 소름 돋더라. 예수정 배우와의 호흡은.
좀 전에 얘기했듯, 첫 촬영이 첫 만남이었고, 우울한 감정을 이어가느라 촬영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었다. 우리 영화 촬영할 때 선생님이 마침 <신과 함께>를 하고 계실 때라 아주 바쁘시기도 했고. 한 번은 6분 이상 되는 롱테이크신이 있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한 번에 해내시는데 정말 대단하시더라.
이제 ‘민수’ 얘기 말고 ‘지용석’에 관해 이야기 좀 해보자. ‘민수’ 캐릭터에 공감하려면 우울함이라고 할지 그런 유사 감정과 어느 정도 친해야 할 것 같은데, 성격은 어떤 편인가.
외향적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상황에 따라 다른데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건 맞다.(웃음) SNS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고, 어디 가서 분위기 메이커는 잘 못 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으로 데뷔했다.
변호사 2역이었는데 워낙 단역이라 데뷔라 하기도.... 학교에서 단편 영화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가 무언지.
잠깐 말했듯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위로 누나 둘이 있는데, 말 그대로 FM 스타일이었다. 반면 나는 전혀 아니었거든. 그렇다고 소위 노는 학생이었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학교를 그만뒀고, 우연히 안석환 선배의 <남자 충동>이라는 연극을 보고 거기에 확 꽂혔었다. 이후 연기를 해보고 싶어서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늦게 연극과에 진학했는데 막상 입학하니 영화가 더 눈에 들어왔다. 영화과와 함께 작업하다 보니 과에서 아웃사이더가 돼 있기도. 그런 인연으로 독립 영화, 장편 영화에 이어 드라마까지 하게 됐다.
SBS 수목 드라마 <대풍수>(2012), 일일 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2013)로 안방극장에서 시청자와 만났다.
일일드라마를 6개월 했는데, 내가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카메라 공포를 얻기도 했으니.... 하루에 소화하는 신이 정말 많은데, 선배님들은 너무 잘하시더라. 진짜 존경스러웠다.
<행복의 나라>를 ‘아픈 손가락’이라고, 이제는 떠나보낼 때라고 했는데, 예비 관객에게 한마디 한다면.
얼마 전 진행된 시사회의 반응을 보니 무겁지만, 좋은 영화인 것 같다고 하시더라. 영화 속 캐릭터들의 행보가 이기적일 수 있으나 한편으로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보며 행복의 본질을 생각하는 작은 계기가 되면 좋겠다. 여러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있고, 무겁지만 끝까지 본다면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한다.
좋아하는 영화를 꼽는다면.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을 좋아한다. <행복의 나라>를 하며 그 작품을 많이 생각했었다. 자기 자식을 죽인 소년을 용서하는 이야기인데 용서하는 과정에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묘한 감동이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마지막 질문! 최근 행복한 순간이나 인상적인 기억은.
<행복의 나라>가 개봉하게 된 거다. 영화가 세상에 공개되는 게 긴 터널을 벗어나 한 줄기 빛을 보는 것 같다. 개봉으로 파생되는 어떤 결과보다 한 분에게라도 더 보여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2018년 7월 17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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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