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ㅡ편집자 주.
제7회 중앙디자인콘테스트 입상, 디자이너 인생 전환점
브랜드 ‘박윤수’ 옷 사려고 부띠끄 앞 줄 서던 8~90년대
기성복 시대 왔지만 컬렉션만 58회 ‘한 우물 파기’ 승부
‘덩케르크 컬렉션’과 새 브랜드 ‘빅팍’ 출시로 끝없는 생존 노력
패션은 사치 아닌 생활, 미학적 허기짐 채우려면 공부 필요해
서울패션위크 바이어 500명 중 10명만 내 옷 사줘도 성공
잘못 들춰내기보다 잘한 일 칭찬해주는 선배 되고파
청담동에 위치한 브랜드 ‘박윤수’의 작업실이자 쇼룸은 정성이 많이 든 공간처럼 보인다. 1층은 아담한 정원 같고, 이곳 작업실은 상당히 섬세하게 가꿔진 느낌이다.
박윤수 저 사람 돈 많이 벌어서 청담동에 건물까지 지었다고들 하는데(웃음) 이곳에 처음 집을 산 건 80년대다. 집을 작업실로 고쳐 일했다. 그때만 해도 길이 제대로 닦이지 않아 주변이 전부 비포장도로였고 저-어 옆은 버스 종점이었다. 백화점으로 편입되지 말고 디자이너 브랜드끼리 이곳에 예쁘게 모여 있자는 당시 선배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80년대라 하면 젊은 친구들에게는 잘 와 닿지 않는 시기일지도 모른다.(웃음)
당시 대통령이 전두환이었고, 군부정권이 유흥과 스포츠로 국민 관심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웃음)
엄혹한 시절부터 패션계에 몸담아 지금까지 매년 서울패션위크에서 컬렉션을 선보이며 활약 중이다. 중앙디자인콘테스트에서 입상한 게 디자이너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고 들었다.
당시는 남자가 여자 옷 만드는 걸 썩 반가워하는 시대는 아니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도전해야 했던 암울한 상황에서 제7회 중앙디자인콘테스트에 입상했고 나를 알릴 좋은 기회를 얻었다. 지금은 매체가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방송국이나 월간지에 노출될 기회가 흔치 않았다.
입상 이후 바로 자기 브랜드를 시작했다. 다른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경험을 쌓지 않고 바로 자기 이름을 건 사업을 시작했으니 설렘만큼 두려움도 컸을 것 같은데.
요즘 애들 말로 하면 창업을 한 셈이다. 예전에는 디자이너에게 기회가 많은 시대였다. 90년대 중반까지는 패션 업계가 호황기였다. 수입 옷이 들어오지 않았고,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 일단 옷을 만들면 입어주는 소비자가 많았다. 옷을 목 부분까지만 만들어도 예약 판매됐던 때니까.(웃음) 당시에는 ‘잠자면 박윤수 옷은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세일을 시작하면 잠도 안 자고 기다렸다가 찾아온 고객이 몇 백 미터씩 줄을 섰다. 쇼룸에는 열 명씩만 끊어서 들여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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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제일 많이 팔아본 옷이 있다면, 어떤 종류인가.
기업형 회사도, 기성복 회사도 아니니 특정 옷을 몇천 장, 몇만 장씩 팔아본 경험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만큼 많이 팔아보고 싶다.(웃음) 그래서 요즘은 친환경 소재로 대중이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보려는 시도 중이다. 특별하고 철학적인 옷을 만들면 특수한 사람만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서, 평범한 이들은 그런 좋은 옷을 입고 갈 데가 없다.(웃음)
맞는 말이다. 살롱 문화가 있는 나라도 아니고, 파티를 즐기는 민족도 아니고.(웃음)
예쁜 옷 만들어놓고 박물관에 보낼 건 아니니까… 많은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패션 산업이 기업화되고 기성복의 시대가 도래한 것도 벌써 예전이다. 이제는 자라, 유니클로 같은 해외 스파브랜드가 시장을 휩쓴다.
우리나라 기업이 제일모직, 반도패션(현 LF) 같은 브랜드로 옷 장사를 시작하면서 기성복 시대가 도래했고, 해외 브랜드가 수입되면서 자본 경쟁이 시작됐다. 패션은 더이상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이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패션 전공자들은 전부 해외 유학을 한다. 좁은 내수시장을 벗어나 전 세계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회는 적고 경쟁은 치열해졌다.
그게 최근 우리나라 패션업계가 겪는 현실적인 문제일 것이다. 본인 이름을 건 디자이너 브랜드로 30년 이상의 경험을 축적한 당신이지만, 변화하는 흐름 앞에서는 분명 고민도 있을 것이다.
물론이다. ‘박윤수’라는 브랜드는 오래된 만큼 클래식하다. 소비자도 꽤 줄었다. 그래서 6년 전 새 브랜드 ‘빅팍’을 런던에서 런칭했다. 옷은 젊어졌고, 타겟은 해외 고객이다. 아직 글로벌 브랜드라고까지 말하기는 좀 어려워도 (전에 비하면) 전 세계 사람이 내 옷을 사 간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다. 컬렉션도 마찬가지라서 매 시즌 노력하지 않으면 바이어는 지난 시즌과 비슷하다거나, 별로 신선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더는 내 옷을 주문하지 않는다.
기존 브랜드의 판매량이 준다는 걸 실감한 모양이다.
당연하다. 요즘 패션이나 뷰티 산업의 유행은 정말 광속으로 변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젊은 친구들은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통해 전문가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한다. 그런 시대에 패션을 하는데 어떻게 쉽겠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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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후드가 7~8만 원 정도일 때 우리가 만든 건 40만 원 정도니 그렇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옷은 외주를 주고 대량으로 박음질하지 않는다. 자수 하나도 한 땀 한 땀 직접 단다. 옷이 담은 혼이나 철학만이 낼 수 있는 소위 간지라는 게 있지 않겠나.(웃음) 당연히 그런 ‘신상’을 사면 출혈은 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기분은 세일하는 옷을 ‘득템’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다. 옆 나라 일본은 신상을 사기 위해서도 줄을 선다. 갓 지은 밥 먹는 맛을 아는 것이다. 우리도 지금보다 국민 소득이 좀 더 높아지면 그들과 비슷해질 거라고 본다.
사회적 분위기도 ‘옷 입는 일’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유행에 따라, 단정하게 입으면 된다는 정도다.
특히 우리나라 남자들은 옷 입을 줄을 모른다. 패션이 획일화 돼 있다. 하지만 남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일본은 여성복보다 남성복 판매율이 더 높다. 명품을 입으라는 게 아니다. 지드래곤처럼 입자는 것도 아니다.(웃음)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어떤 색깔 맞춰볼지 고민하다 보면 주말이 기다려진다. 스타일링한 대로 입어보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패션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훈련으로 길러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고픈 걸 해결하는 덴 성공했지만, 아직 미학적 허기짐을 채우는 공부는 많이 부족하다. 그건 사치가 아니라 ‘생활’이다. 특히 TV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패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모두가 패션에 애정을 갖는 시대를 기약하며(웃음) 매 시즌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모양이다. 데뷔 이후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데뷔 이후 매년 컬렉션을 선보인 한국 디자이너는 내가 유일할 것이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18년간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했고, 58번의 컬렉션을 선보였다. 끊임 업이 일하는 현역이라는 것만큼은 나 자신도 인정한다. 패션 업계 사람들 역시 나로부터 많은 에너지를 받을 것이다. 오랫동안 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왜 이렇게 스스로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지…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웃음)
컬렉션이 끝나면 디자이너에게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오라는 큐사인이 떨어진다. 다른 때는 당당한 제스처를 취하곤 했는데 최근에는 울컥했다. 나중에 유튜브로 다시 보니 걸음걸이에서도 목이 멘 게 느껴지더라.(웃음) 요즘 들어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15분의 러닝타임 안에 스토리를 넣고 작품을 선보이며 나라는 디자이너를 보여줘야 하는 동시에 비즈니스도 해야 한다.
가장 인상에 남은 컬렉션이 있다면.
지난 시즌에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덩케르크>를 모티브로 밀리터리 컬렉션을 선보였다. 너무 큰 감동을 받아 10번이나 다시 본 영화다. 영화 OST와 오래된 비행기 이미지를 쇼에 활용했다. 솔직히 말하면, 컬렉션을 많이 했지만 매번 소름이 돋는 건 아니다. 안 그럴 때도 많다.(웃음) ‘덩케르크 컬렉션’은 베스트 3위 안에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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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박윤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웃음) 서울패션위크에 바이어가 많이 안 온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바이어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는 해외 어느 곳에서 작은 양품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우리 디자이너의 옷을 한 벌이라도 산다면 우리의 바이어가 되는 거다. 어떤 이는 초청받아 왔음에도 (성실하게) 여러 디자이너 부스를 찾아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초청된 500명 중 10명만 내 물건(옷)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준다면 성공이라고 본다. 나쁜 점만 생각하고 들춰내면, 패션계는 전부 고사한다. 잘 하는 건 응원도 해줘야 한다. 나를 비롯한 업계 선배부터 각자의 이해관계를 정리하고 후배를 격려해야 한다. 그래야 업계가 존경받고 후배들도 일을 잘 할 수 있다.
패션 업계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어떤 편인가.
우리나라는 패션을 정책 산업화하려고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을 통해 엄청난 지원을 한다. 디자이너가 뉴욕, 밀라노, 상해 가서 쇼와 전시를 해도 (명분만 맞으면) 그 비용을 지원해준다. 게다가 대학을 갓 졸업한 신진 패션디자이너에게는 세 번의 쇼를 하는 동안 서울시가 자금을 대주는 프로젝트도 있다. 아마 이 정도 지원을 하는 건 우주에서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웃음)
시선에 따라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디자이너로서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젊을 땐 억만장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웃음) 이제는 연륜이 붙은 멋진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 그건 여러 의미일 것이다.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가득해야 한다. 남들 잣대로 성공했다고 평가받을지언정 안주하면 안 된다. 늘 가슴 떨리는 디자이너로 살고 싶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런웨이에 올라가는 순간. 그 30초를 위해 6개월간 엄청 발버둥 치지만 디자이너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다.(웃음)
2018년 4월 23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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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 '박윤수', '빅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