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괴물들>은 명백한 피해자가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가해자로 둔갑하는 불편한 과정을 그린다. 약자인 동시에 비열한 자, 이 복합적인 인물에 낙점된 건 이원근이다. 아이처럼 순수한 얼굴과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의뭉스러운 표정을 동시에 선보인 <여교사>(2016)의 고등학생 ‘재하’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캐스팅이다.
성 소수자로 출연한 <환절기>(2018)에 이어 학교폭력 피해자를 연기한 <괴물들>(2016)까지, 연이어 두 편을 개봉한다.
<괴물들> 언론시사회장에서는 특히 긴장을 많이 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북을 치더라. 전날 밤, 잠도 거의 못 잤다.
왜 그렇게 떨었나. <환절기> 언론시사회장에서는 비교적 덤덤한 모습이던데.
<환절기>는 완성된 작품을 세 번이나 본 상태였다. 반면 <괴물들>은 나도 그날 처음 봤다. 기자들이 질문하기 시작할 텐데… 촬영한 지 좀 지나서인지 영화에 대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더라. 그날 저녁에 영화를 다시 한번 봤다. 촬영 당시 힘들었던 기억이 그제야 생각나더라.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도 아쉬움은 여전하다.
어떤 아쉬움일까.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 15세 관람가 정도를 생각하고 영화를 준비했다. 그런데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학교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아야 하는 청소년이 정작 이 영화를 못 보게 돼 너무 아쉬웠다. 물론 성인 또한 자기 학창시절을 돌아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크게 고민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학도 가야 하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했고… 그래도 학교폭력 기사를 볼 때만큼은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빈번했고, 심각한 수준이었다. 요즘은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생, 중학생을 만나면 괜히 말을 한 번 걸어본다. 너무 공부만 해도 안 좋으니 게임도 하고 놀기도 하라면서.(웃음)
고등학생은?
무서워서 말 못 건다.(웃음)
당신의 학창시절은 어땠나. 학교폭력을 직접 목격해본 적 있는지.
나는 굉장히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고에 입학해서 쇠 깎고 자격증 따고… 컨베이어벨트 같은 삶을 살았다.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기계처럼 말이다.
그래도 크고 작게 괴롭힘을 당해본, 혹은 가해본 기억은 누구에게든 있을 것이다.
중학교 때 나도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런데 강도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폭력이라면 폭력일 수 있었지만, 정작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으니 폭력은 아닌 것 같다.
극 중에서는 이른바 빵셔틀에 정신적, 신체적 폭력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장면을 연기해야 했다.
정말 힘들더라. 특히 빵셔틀 장면 촬영은 간발의 차로 제한 시간 안에 빵을 사서 교실에 도착해야 한다는 설정 때문에 항상 철퍼덕 엎어져야 했다. 요령 있게 넘어지질 못해서 무릎에 멍이 다 들었다.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정말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영화에 나온 것보다 폭력신이 훨씬 많았다. 촬영장에 갈 때마다 맞는 장면을 찍었다.
맞을 때마다 그에 어울리는 감정 연기를 해야 한다. 울부짖는다든가, 소리를 지른다든가. 그런 촬영이 쉼 없이 이어지니 지치더라. 그래서 악몽도 많이 꿨다. 꿈에서 나는 얻어맞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런 날 보면서 비웃는다. 때리지 말라고 발버둥 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감독님께도 괴롭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금방 끝날 거라고,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다독여 주셨다. 그러곤 금방 분장팀에 가서 빨리빨리 준비하라고 재촉하시고…(웃음)
스크린에서는 주로 외롭고, 쓸쓸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역을 주로 맡았다. 김하늘, 유인영과 함께한 <여교사>는 물론이고 배종옥과 함께한 <환절기>, 그리고 이번 <괴물들>까지.
매번 표현해볼 만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 있었으니까. <환절기>의 ‘용준’은 위태로운 인물이고 <괴물들>의 ‘재영’은 연약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학교폭력 피해자인 ‘재영’을 연기할 때는 우리 집 강아지에게 힌트를 많이 얻었다. 간식을 먹고 싶으면 주인인 내 눈치를 살랑살랑 본다. 옳거니. 이게 강자와 약자의 관계구나. 그 깨달음을 연기로 가져왔다. 외모에도 물론 신경 썼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을 뺐다.
극 중 박규영이 연기한 지적장애 여성 ‘예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재영’은 ‘예리’를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마치 제물처럼 바친다.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데, 영화의 가장 불편한 대목이기도 하다.
나 역시 ‘재영’이 학교폭력 가해자인 ‘상훈’(이이경)을 너무 대놓고 ‘예리’의 집에 초대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다. 좀 더 자연스러운 연결고리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도 10대라면 누구든 충동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는 부모님 지갑에서 몰래 돈을 꺼내도 뒤돌아서면 죄책감이 없을 수 있는 때 아닌가. 당장 왕따에서 벗어나고 싶은 ‘재영’도 자기에게 필요한 욕구만 가득했던 것 같다.
교복 입은 학생 역할을 자주 맡았다. 실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주로 연기한 셈인데.
교복은 입고 싶어도 더 못 입는 시기가 자연스레 올 거로 생각했다. <괴물들> 이후로는 갑자기 뚝 끊긴 것처럼 교복 입은 역할이 들어오지 않는다. 이렇게 어린 역할을 벗어나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좀 아쉬운 마음도 있다. 교복 입고 교실에 들어서는 기분이 좋았는데…(웃음)
맡는 역할 마다 묘하게 섹시한 느낌이 있는 편이다.
만약 나에게 그런 느낌이 있다면, 그건 그 역할을 창작해낸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일 것이다. 인물에 대해 이해하고 연기하려고 한다. 실제의 나는 웃음기도 없고 말수도 적다. 워낙 차분한 성격이고 친구도 많지 않다. 전형적인 내향적인 사람이다.(웃음) 부모님이 너무나 엄하셨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까불 수가 없었다.
지금도 현장 분위기를 많이 타는 편이다. 현장 분위기가 무거우면 나도 굳고 떨기 시작한다. 사실은 그게 다 내 손해다. 다시 한 번 촬영하고 싶어도 눈치 보느라 그 말을 못 하겠다. 이 성격을 떨쳐내야 한다.
당신… 대체 어쩌다 배우가 된 건가.(웃음)
원래는 공무원이 되려고 했다. 실업계 진학 뒤 기술을 배운 것도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아버지 그늘 아래서 늘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았다. 나도 그게 익숙했으니까. 그러다가 소속사 대표님께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 처음엔 사기겠거니… 하고 연락해볼 생각도 없었다.(웃음) 고등학교 때도 한두 번 캐스팅 제안이 있었는데 그것도 다 사기였다.
사기라는 걸 어떻게 알았나.(웃음)
여차여차해서 지금 대표님과 계약을 맺게 됐는데, 혹시라도 이중 계약 상태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셨다. 그때 고등학생 때 받았던 명함을 보여드렸는데 “이거 다 없는 회산데?” 하시더라.(웃음)
부모님 입장에서는 걱정도 되셨을 듯하다. 특히 당신이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다면…
그러셨을 수도 있다. 가족 중에 연예계에 종사하는 분이 단 한 분도 없다. TV에서만 보던 직업을 아들이 하겠다니… 내가 부모라도 당연히 걱정했을 것 같다. 잘 모르는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면 겁이 나지 않겠나. 그래도 내가 성인이었기 때문에 해보고 싶은 대로 하게끔 놓아둬 주셨다.
배우가 되고 나서는 부모님이 해 주시는 조언 종류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
그렇게 강인하고 보수적이었던 우리 아빠가 이제는 매일 나에게 전화해서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물으신다.(웃음) 요즘에는 자꾸 나와 내 친구들이랑 같이 술을 먹자고 그러신다. 자기가 해줄 수 있는 말이 많다고 말이다. 우리 대표님도 혼 내줄(?) 수 있는데 대체 왜 안 불러 주냐는 농담도 하신다.(웃음) 오늘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원근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자세히 말해줄 수 있는데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되냐고.(하하하) 이 정도로 성격이 부드러워지셨다.
아무튼 어릴 땐 정말 무서우셨다. 요즘 모습이 좋기도 한데… 예전이 그립기도 하고.
당신에게도 그런 부드러운 면이 있을지 모른다.
음… 나는 나를 외로운 사람이라고 칭한다.(웃음) 그래서인지 심신이 피곤하면 누구를 만나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상처를 회복하고 치유한다. 이기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왜 자신만 생각하냐고 말이다. 썸이 있어도 그래서 발전이 안 된다.(웃음)
최근에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다면. 지난해 이맘때는 <이퀄스>(2015) <로렌스 에니웨이>(2012) <엘리펀트 송>(2014) 같은 작품을 꼽았다.
<고스트 스토리>가 정말 좋았다. 유령밖에 안 나오는 영화인데 그게 그렇게 먹먹하더라. <녹터널 애니멀스>(2016) <분노>(2016)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2012) 같은 작품도 좋았다. 보통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여운이나 상실감이 오랫동안 남는 것들이다.
<환절기>와 <괴물들> 모두 2016년 ‘열일’의 결과다. 앞으로 또 어떤 작품으로 관객 앞에 서게 될까.
새로운 나를 보여드리고 싶다. 물론 늘 그럴 수 없다는 건 안다. 그래도 작품마다 저런 부분은 많이 유연해졌네, 저런 부분은 힘이 생겼네, 전에 못 보던 느낌이 있네, 싶은 느낌을 주고 싶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친구들과 난생처음 스키장에 갔다. 정말 큰 결심이었다. 워낙 새로운 걸 접할 때 겁이 많다. 활발한 성격이 아니라 활동적인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부러워만 했다. 한 시간 정도 야간 스키를 탔는데 그게 정말 행복했다. 친구들한테 이끌려 무작정 중급 코스로 올라갔는데 내려오는 건 알아서 하라는 거다. 100번쯤 넘어졌다. 머리 위를 보니 친구들은 이미 리프트를 타고 다시 올라가고 있더라.(웃음)
2018년 3월 6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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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리틀빅픽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