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대선을 2주 앞두고 선거 영화를 개봉한다. 설레기도, 긴장되기도 할 것 같다.
양날의 검이다. 누구는 기막힌 타이밍에 개봉해 좋겠다고 한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은 반대로 생각했다. 정치에 대한 피로도가 높은 상황에서 과연 돈 주고 이 영화를 보려고 할까? 현실만큼 재미있을까? 물론 재미라는 표현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웃음) 현실 정치 상황이 이 정도로 다이내믹 할 줄 알았으면 영화의 표현을 좀 더 세게 해도 될 뻔 했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하지만 개봉 일정이 이렇게 잡혔으니, 어떡하겠나.(웃음)
3선에 도전하는 서울시장 ‘변종구’ 역을 맡았다. 정치인을 연기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외국에서 워낙 훌륭한 정치 드라마를 많이 만들어내지 않았나. 처음 <특별시민>이라는 기획을 접했을 때 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나 영화 <킹 메이커>(2011)가 떠올랐다. 언론 이야기이긴 하지만 <굿나잇 앤 굿 럭>(2005) 같은 작품도 생각났다. 정치적인 이야깃거리로 치면 우리나라도 장난이 아니게 많은 곳인데(웃음) 영화인들이 제대로 합심하면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당치 않은 포부로 대들었다. 그런데 진짜 힘들더만.(웃음)
어떤 점이 힘들던가.
한 바구니 안에 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은 두 시간 안팎으로 정해져 있다. 감독과 배우가 모여 술을 마시면서 어떤 이야기를 집어넣고 뺄지 회의를 하니 필요한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나더라. 그 모든 아이디어를 반영하려면 결국 시리즈물로 촬영해야 하는 방법밖에는 나오지 않는데, 그것도 현실적인 여건이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일 아닌가. 좌우지간 정해진 시간 안에 풍요로운 이야기를 담아보려 했지만 너무 빽빽하게 들어있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 정치를 풍자하는 듯한 장면도 다수 등장한다.
블랙코미디 요소를 가미하고 싶었다. 시종일관 진지하기보다는 경쾌한 느낌을 주면서도 가시가 돋은 느낌을 의도했다.
대표적인 장면을 꼽아준다면.
서울시에 대형 재난이 발생한 후 대책본부에 세워진 캠프에서 서울시장 ‘변종구’가 초밥을 먹는 장면이다. 바로 직전에 구조대에게 “생존자가 있다는 확신을 하고 최선을 다하자”고 간절하게 말해놓고, 금세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캠프 안 쇼파에서 자빠져 자다가 몰래 반입된 스시 벤또를 먹는다. 본래 시나리오에는 없었지만, 세월호 사건 이후에 벌어진 여러 상황에 착안해 만들어낸 장면이다. 유머러스하게 비꼬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상당히 신경을 썼다.
작업과정에서 초반 시나리오가 꽤 변형된 편인가 보다.
관객에게 공개된 버전과 시나리오의 처음 버전은 상당히 다르다. <명량>(2014)과 <대호>(2016)를 끝내고 난 뒤에 팔레트픽쳐스의 박신규 대표가 회사 차원에서 개발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서너 개 정도 보여줬다. 한 번 골라보라고 말이다. 그때 <특별시민>을 처음 봤는데, 이야기가 너무 엉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 미드는 물론이고 정치 영화가 얼마나 잘 나오는데, 이 정도 이야기로는 택도 없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정치드라마가 본격적으로 기획된다는 점은 확실히 솔깃하더라. 바로 박인제 감독을 만났다.
소주 한잔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 건데? 무슨 생각으로 연출하려는 건데? 하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더라. 다 듣고 나니 그럼 같이 한 번 해보자는 말이 나오더라. 초고 단계의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단계부터 참여해서 이 역할은 누가 맡았으면 좋겠고, 저 역할은 누가 소화했으면 좋겠는지 의견을 냈다. 그렇게 3년 정도 작업한 결과물이 <특별시민>이다.
함께 출연한 배우 중에 직접 출연을 권한 배우도 있나.
정치인과 언론의 미묘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문)소리라는 배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다발을 사 들고 당시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을 하고 있던 소리를 찾아갔다. 내가 맛있는 술 사줄 테니 좀 출연해주라. 하면서.(흐흐흐)
연기를 하면서 실존 인물을 참고하기도 했는지.
그렇지는 않다. <특별시민>은 누군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특정 정치인을 욕하자고 만든 것도 아니다. 관객이 나를 보며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야? 하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나 주제의식이 좁아진다고 생각했다. 그 인물이 보여준 삶의 궤적에 영화가 갇혀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별로 재미 없는 일이고 말이다.
재미가 없다는 건.
어찌 보면 연기하는 사람의 자존심일 수도 있는 말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만들어내는 서울시장 ‘변종구’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명량> <대호> 등 사극을 연기한 최근 경험에 비춰보면, <특별시민>은 꽤 색다른 경험이었을 듯하다.
과거에는 ‘내가 그 배역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신중함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부 다 해보고 싶다. 어쩌면 조금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새로운 배역이 고프다.
어떤 종류의 새로운 배역인가.
팀 버튼 감독을 참 좋아하는데, 그가 만드는 판타지 세계에 괴물 같은 역할로 출연해보고 싶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 같은 작품을 볼 때마다 정말 부러웠거든. 물론 <미녀와 야수>(2017) 처럼 판타지를 실사영화 한 작품도 좋다. 우리나라 CG 기술도 많이 좋아졌으니, 그런 작품이 만들어져 내가 출연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항상 목놓아 기다리는 멜로물도...(웃음)
오. 격정 멜로!(웃음)
아니, ‘걱정‘ 멜로겠지.(하하하)
그렇다.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여러 역할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젊지만(웃음) 나이를 먹으면 접해볼 수 있는 역할이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자꾸만 스멀스멀 욕심이 올라온다.
<루시>(2014) 이후 해외에서 당신이 원하는 SF나 판타지 장르물 섭외가 여러 차례 있었을 듯하다.
제안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아임 쏘리’ 하면서 거절했다.(웃음) 내가 영어가 서툴다. 외국 작품에 출연하는 데 아주 근본적인 문제로 작용한다. 뤽 베송 감독이 <루시> 출연을 제안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우리말로만 연기를 해야 된다는 강박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서툰 언어로 대사를 하느라고 감정을 어색하게 표현하게 된다면? 배우로서, 굳이 그런 부자연스러운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싶었다. <루시>도 그런 이유로 거절했었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 아무래도 출연이 어려울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다른 배우를 찾아보라고 말이다.
설득 당한 경위는.(웃음)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면서 뤽 베송 감독이 날 찾아왔다. 나도 막상 그를 만나니까 감탄이 나오는 거야. 어후, 막.(웃음) 당신 <레옹>(1994) 만든 사람이잖아!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 하면서.(웃음) 게다가 영어를 안 써도 괜찮은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 어차피 당신은 루시를 데려와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니까, 그녀가 당신의 말을 못 알아 듣는 게 더 공포스럽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니 그냥 한국말로 연기를 하면 자신도 자막을 넣지 않겠다고 하더라. 관객도 함께 답답하고 두려울 거라면서.
내용이 내용인 만큼, 설득력 있는 제안이었다.
세계적인 수준의 작품성을 보여준 뤽 베송 감독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할까? 그들이 속해 있는 시스템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그런 것들은 함께 만나 작업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우니까 말이다. 그걸 알게 된 게 참 좋았다. 아주 똑~같더라고 우리랑.(웃음) 원하는 대로 촬영되지 않으면 성질도 내고.(하하하)
앞으로도 비슷한 제안이 온다면.
같은 영화인으로서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할지 궁금하다면 혹시 모르지만, 할리우드 작품이라고 해서 특별히 목매지는 않을 듯하다.
그만큼 국내 영화계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게 더 많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자신감도 느껴지고.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영화에서 안 찾아주면 연극 하면 되니까.(웃음) 물론 스케일 차이는 있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면 부담감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서 충무로까지 거리도 가깝잖아.(하하하) 장난스레 말했지만, 주변 후배나 동료들이 함께 작업하자고 찾아주고, 작품에 대해 의논해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내가 참 행복한 놈이다. 복에 겨운 놈이다.
함께하는 영화인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전에는 없던 감정인데, 요즘에는 영화 촬영 현장에 함께 머물면서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마음이 짠해질 때가 있다.
촬영 현장에서 커트 소리가 나면 일단 내 연기는 끝난다. 물론 연기에 대해 늘 신경 쓰고 있어 예민한 상태지만 그래도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그런데 그 시간대에 현장 스탭들은 오히려 상당히 분주해진다. 무대 세팅을 바꾸느라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고, 배우의 분장을 고쳐주고, 조명이면 조명 카메라면 카메라, 미술팀, 소품팀까지… 너무나 일사불란하게, 그러면서도 헌신적으로 일을 한다. 감독도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다.(웃음) 마치 의학 다큐멘터리에서 세포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착착착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어느 순간 한 발자국 뚝 떨어져서 그 장면을 스케치하듯 바라보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이런 곳이구나, 싶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작품의 주제의식에 동의한다는 이유로 함께 모여 일하는 공간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게 그렇게 짠하다. 어떨 때는 숭고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 참 멋있는 일 중에 하나다.
참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촬영 역시 고생스러운 면이 많지만, 어느 일은 고생을 안 하겠나. 그러니 배우인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함께 작업한 이들의 노력이 헛되면 안 되니까 말이다.
노력이 헛되지 않는다는 건, 꼭 흥행 이야기뿐만은 아닐 듯하다.
물론 노력이 보상받는 데는 흥행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설령 관객이 좀 서운할 정도로 적게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작업을 공유하는 가운데서 오는 포만감이라는 게 있다. <파이란>(2001) 때 그런 걸 느꼈다. 그 영화, 완전히 ‘폭망’했잖아.(웃음)
음.(하하하)
그때 <파이란>의 메인 상영관이 지금은 없어진 종로의 극장 씨네코아였다. 경쟁작은 ‘니가가라 하와이’ <친구>(2001) 였고.(웃음)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에서 <친구>가 대박을 치는 통에 <파이란> 스크린 수는 개봉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더라.(웃음) 당시 <친구> 홍보팀에서 교복을 입고 극장 앞에서 찌라시를 나눠주는데 나한테도 다가오길래 “저리 안 가 이 씨끼들아!”(웃음) 하고 말했던 기억도 난다.
흥행 면에서는 저조했지만, 당신에게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파이란>은 마치 학생 때 찍던 독립영화처럼 규모가 너무 작았다. 촬영 당시 날씨도 너무 추워서 그 흔한 구경꾼도 없었다. 장백지는 독감을 달고 살아서, 오죽하면 다시는 한국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다.(웃음) 그렇게 개봉을 했는데도 <친구>에게 밀렸다. 하지만, 나중에는 ‘파이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매니아 층이 형성되더라. <파이란>을 만든 스탭과 배우들이 모두 ‘우리가 이 작품을 만들었다’ 하는 자부심 같은 게 생겼다. 심지어 명보극장에서 무대인사를 하고 났을 때는, 어떤 아저씨가 화장실에서 발길로 나를 걷어차면서 영화 참 잘 봤다고 말 하더라.
에? 발길로 걷어차면서?(웃음)
그러니까, 평생 가야 영화관을 두어 번이나 찾았을까? 싶은 그런 아저씨였다. 어쩌다가 <파이란>을 본 거다. 약주도 좀 드신 것 같고.(웃음) 그런데 방금 영화에서 본 놈이 화장실 옆에서 같이 오줌을 누고 있으니, 그런 방식으로라도 영화 참 잘 봤다고 표현을 한 거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좀 황당했지만, 그래도 뿌듯하더라.
기억에 많이 남았겠다.
그렇지. 그런 작업이 고픈 거다. 물론 매번 모두가 똘똘 뭉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건 허황한 욕심일 수도 있다. 매 작품이 흥행이 되는 게 이룰 수 없는 꿈이듯이 말이다. 그래도 <특별시민>이 끝나면 또다시 그런 작품을 해보고 싶다. 작은 규모지만 문학적 향기나 인간적인 냄새가 옹골차게 차 있는 영화 말이다.
그렇지. 정말 너~무 좋은 작업이었다. 아, 그런데 <특별시민> 인터뷰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되나?(웃음) 아, 뭐! 할 수도 있지.(하하하)
<파이란> 외에도 당신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 있다면.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도 참 애착 가는 작품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를 떠올리면서 촬영해서 더 그렇다. 푼수처럼 건달과 어울려 다니다가 그렇게 두들겨 맞고 말이다.(웃음) 자기 생존을 위해서도 있지만, 그 시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똥물에 발 담그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건 모든 아버지의 공통점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런 행위 자체가 합리화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조악한 세월을 살아온 아버지 세대에 바치는 헌사 같은 영화였다. <대호>도 마음에 남는다. 흥행 성적은 비록 저조했지만, 산과 자연을 좇는 자신의 가치관을 수호하면서도 항일 정신을 잃지 않고 결기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였으니까. 하, <대호>만의 어떤 감수성이 있는데 그게 말로는 더 이상 표현이 안 되네.(웃음)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요즘은 <특별시민> 인터뷰를 하면서 나 나름대로 영화를 결산하고 있다. 내 본래 의도는 이러했는데 막상 관객이 받아들인 건 다르다든지 하는 지점들을 파악한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나른함이 있다. 그때 소주 한 잔을 탁…(하하하) 그게 참 괜찮거든. 아무튼 요즘은 연일 소주에 젖어 살고 있다. 아주 촉촉~하게.(흐흐흐)
2017년 5월 4일 목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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