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지혜기자]
피곤해 보인다(웃음)
새벽 2시에 깬 뒤로 잠을 못 잤다.
영화의 개봉 성적이 많이 걱정되나 보다.
평론가 반응이나 기자들 반응은 좋다. 그런데 평론가와 관객 반응이 정반대일 때가 많잖나. 일반관객 반응이 정말 궁금하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영화가 너무 무섭다는 평가다. 일반관객들은 영화를 보기도 전에 <곡성> 생각만 해도 잠이 안 온다고 하더라. 난 <곡성>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심장을 죄어드는 것 같은 긴장감이 있고, 그 사이에서 ‘종구’가 갈팡질팡할 뿐이다. 상업영화를 찍은 만큼 관객들과 부성애 같은 주제로 소통하고 싶은데, 관객들이 노파심이 많아서(웃음)‥‥.
무섭다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서 오히려 “뚜껑 열어보니 별로 안 무섭더라” 할 수도 있잖나.
그러면 짱이겠는데(웃음)! 영화가 개봉한 뒤 2, 3일 간의 리뷰가 중요하다. 이때 리뷰로 영화를 볼지 말지 결정하니까.
<곡성>을 4번 정도 봤는데, 편집될수록 영화에 공들인 티가 나더라. 나홍진 감독이 정말 죽을 듯이 노력한 게 보인다. 시나리오로 느꼈던 것보다 몇십 배 더 재밌어졌다. 3시간 40분짜리 현장 편집본을 한 시간 이상 줄이니까 박진감도 넘치고. <곡성> 포스터에 “현혹되지 마라”라고 적혀 있는데도, 관객들은 현혹돼서 누가 범인인지 헷갈려 한다. 영화도, 줄거리도, 나홍진 감독이 맛깔스레 잘 만들었다.
편집본이 그렇게나 길었나.
그럼! 6개월을 찍었는데.
공포도 공포지만 <곡성>의 미덕은 해석의 여지를 다양하게 열어둔다는 것 아닌가. 본인은 영화를 어떻게 해석했나.
<곡성>은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것들이, 정말 믿을 만한 것들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에 목숨을 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에 사람들은 인생을 건다. 이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 사랑, 희망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고 지배당한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내 행복을 없애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누구나가 본인의 이익과 믿음을 위해서 살잖나. 그런데 어떤 존재가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행복을 깨뜨리려 하는 거다. ‘종구’의 입장에서는 경찰로 잘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외지인이 들어와 사람들이 죽어나는 거였다. 심지어 자기 딸도 아프고. 그래서 외지인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해결하려 했으나 해결되지도 않고, 결국 자기가 그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그런데 ‘무명’은 이를 가리켜 죄라 한다. 여기에 대해 관객에게 묻고 싶다. 의심하는,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품은 것만으로도 죄가 되느냐고. 이게 내 가족이 죽을 만큼의 죄냐고 말이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나? 죽을 만큼의 죄인가?
글쎄.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살면서,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과한 일들이 주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그런 일에 부딪혔을 때 인간은 앞서 말한 믿음이나 사랑으로 고난을 뚫고 나가려 한다. ‘종구’의 경우에는 그런 원동력이 부성애였고. 비록 ‘무명’은 ‘종구’에게 죄가 있다 말하지만 ‘종구’는 항변하지 않나. 내 딸이 아파서 그러는 거라고, 누군가 내 딸을 죽이려 해서 그걸 막으려 하는 건데 그게 무슨 죄냐고 말이다. 난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종구’는 왜 저런 일을 당했을까, ’효진‘이는 왜 전염병에 걸렸을까, 행복했던 ’종구‘네가 왜 불행해져야만 할까, 궁금해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불행들이 여러분들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걸 깨닫기 바란다. 난 <곡성>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위기가 닥쳤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잘 모르겠으면 두 번, 세 번 봐라. 그러면 범인을 찾을 수 있을 거다(웃음). 큰 힌트를 좀 주자면, ‘일광’이 바지를 벗었을 때 훈도시가 나오잖나. 한국 무당이 왜 훈도시를 입고 있겠나. 이게 힌트가 될 수 있을 거다. 허주 개념도 그렇다. 허주라는 건 무당이 신을 모시려고 내림굿을 받을 때 들어오는 엉뚱한 귀신을 말한다. 들어와야 할 신 대신 들어오는 악귀가 허주다. 악귀를 허주로 모시게 되면 한평생 허주에 끌려다니게 된다. 만일 이 영화를 적그리스도(敵-)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종구’처럼 현혹될 거다. 이 개념들을 확장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혼란스러워하는 관객들을 뒤에서 보고 있자니 참 재밌더라. “어, 이게 뭐야”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나홍진 감독이 플롯을 참 잘 짰지. 대단한 감독이다.
‘종구’는 관객의 대리자로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혼란스러워하며 갈팡질팡하는 인물이다. ‘무명’, ‘일광도사’, ‘효진’ 등 센 캐릭터들 사이에서 치이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어떻게 연기했나?
처음 주연이란 말을 들었을 때, 나홍진 감독에게 그래도 주연배우니 살을 좀 빼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감독은 내게 살을 빼지 말라 했다. 우리 주변의 아버지들, 아저씨들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힘을 빼고 연기하는 게 관건이었다. 연기할 때 제일 어려운 게 힘 빼는 거다. 그리고 욕심을 버리는 것. 사실 연기는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이다. 나만 튀려고 하면 남의 말을 듣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연기가 겉돈다. 연기도 결국 소통이라서 내 말만 하면 관객이 집중을 못한다. 법정스님이 쓰신 책 『무소유』가 이런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법정스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무소유』를 소유하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썼나. 무소유를 소유하기 위한 욕망이 생기는 거다. 연기도 그렇다. 나를 비워내야 한다고 해서 억지로 비워 내려고 욕심부리다 보면 결국 무소유의 소유 같은 일이 벌어진다. 신구 선생님이 내게 ‘배우는 도 닦는 직업인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많이 참고, 인내하고, 상대 배우를 감싸 안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연세가 70이고 연기를 50년 넘게 하신 분도 ‘도 닦는 거다’라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도 닦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벌써 성숙한 빈 곳이 느껴지지 않나. 마치 도인 같더라.
나홍진 감독이 당신을 주연으로 삼은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다(웃음). 감독은 왜 당신을 주연으로 삼았다고 말하던가?
나홍진 감독이 말한 걸 내 입으로 옮기기는 쑥스러운데(웃음). 감독은 내가 코미디와 악역을 넘나든다고 하더라. ‘종구’는 찌질하고 평범하고 소심한 성격이지만 나중에 가서는 가족과 딸에 대한 처절한 사랑과 인간의 의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내게는 그런 면이 모두 있어서 캐스팅 했다고 했다. 그런데 20세기 폭스사가 제동을 걸었다(웃음). 그들로서는 ‘얘가 누군데?’, ‘얘를 왜?’ 했던 거지(웃음). 그런데도 나홍진 감독이 날 끝까지 믿어주고 폭스사를 설득해줬다. 정말로 큰 역할을 내게 줬다.
그거야말로 정말 잘 모르겠다(웃음).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배우로서 다양한 색깔을 품고 있길, 너무나 간절하게 바란다. 정말로 너무 간절하게. 예전에 <점쟁이들>을 찍으면서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만약에 한 알만 먹으면 연기를 전 세계에서 제일 잘하게 해 주는 알약이 있다면 그걸 먹을 거냐고. 효과도 일주일밖에 안 가고 알약 하나에 몇 백만 원씩 해도 먹을 거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수 백? 수 천만 원이라도 사겠다!” 하면서 이 이야기를 엄청 진지하게 나눴다. 빨간 망토만 씌우면 슈퍼맨이 되는데 할리우드 가서 몇억 받으며 영화 찍으면 되잖나. 백억 원 어치 사서 이 백억 받으면 되는데(웃음). 전 세계에서 연기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니까 발리우드, 할리우드 가리지 않고 모두 나를 보러 올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정도로 배우들은 진지하게 죽을 둥 살 둥 연기한다. 어느 감독, 어느 배우든 안 그렇겠나. 나는 그저 부족하지만 해내려고 발악한다. 발악하는 배우(웃음).
<곡성>에서 확실히 소시민적인, 그러면서도 유머러스한 곽도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센 역할, 악역 전문 배우 이미지가 강했잖나. 이미지 변신이 확실히 됐다(웃음).
전문직 많이 했지(웃음). 그래서 나홍진 감독에게 참 감사하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안전빵 악역으로 쓰려 하고 세계 거대 영화사에서도 날 반대하는데, 그는 끝까지 나를 지켜줬다. 전문가들이 봐도 반대하는 나를 주연으로 고집한 거다. 날 죽을 것 같이 믿어준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보통 ‘이 사람은 해낼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나 외에 누가 있겠나. 나홍진 감독의 머릿속이 궁금해질 지경이다. 단지 <황해> 촬영을 하면서 날 보름 정도만 봤을 뿐인데. 잊으면 안 될 일이다.
다른 인터뷰에서 “영화가 흥하려면 셋만 미치면 된다. 감독, 촬영감독, 그리고 주연” 이라고 말했다. 미쳐서 연기한 것 같나(웃음)?
<곡성> 촬영을 하면서 정말 미쳐 있었다. 미친 듯이 했다.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열심히, 죽을 것 같이 <곡성> 생각만 했다. 노력 하나만큼은 스스로에게 떳떳하다. 영화 촬영을 마쳤을 때 스스로가 대견했다. 나를 믿어 준, 나를 필요로 한 사람을 위해 나도 정말 죽을 듯이 노력했다. 그런데 나홍진 감독은 더 하더라고(웃음). 지금까지 나홍진 감독처럼 잔꾀 없이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원래 <곡성>은 3개월 반, 4개월 반 촬영 일정이었다. 그런데 촬영을 막상 해 보니 한 달 반이나 더 찍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수십억의 예산이 오버된다. 한국 투자사도 아니고 외국 투자사인데, 어지간한 고집으로는 투자자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런데 나홍진 감독은 통역을 옆에 두고 정말 열심히 투자자들을 설득하더라.
투자자들이 나홍진 감독의 고집에 기가 질려 했겠다(웃음).
투자만 그런 게 아니다. 촬영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곡성>은 추위, 계절, 로케이션 싸움이었다. 나중에는 완전히 체력이 고갈돼, 걷는 것도 힘들더라. 일반 평지를 걸을 때조차 폴대로 몸을 지탱하며 걸어야 했다. 발목, 무릎, 발가락이 삐는 건 예사였다. 체력이 떨어지니까 감기몸살은 달고 살았지. 나홍진 감독도 체력이 바닥 나서 하루 촬영이 끝나면 응급실에 입원하곤 했다. 밤새 링거를 맞고 촬영현장에 왔다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면서 일주일을 촬영하더라. 그러면서도 자기를 병원에 데려다준 후배는 촬영장에 소문 안 나게 하라고 입단속을 했지. 자기가 이순신 장군도 아니고(웃음). 촬영 팀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작진 모두가 전라도 산 수십 봉우리는 올랐을 거다. 그 몇십 키로그램의 장비를 들고.
매 신마다 내 한계를 느꼈다. 육체적으로 힘든 거야 두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너무 고됐다. <곡성>은 며칠 만에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영화다. 정말 느닷없이 죽음을 맞닥뜨리고 딸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내몰리는 사이 순식간에 집안이 풍비박산된다. 이걸 몇 주, 몇 개월 동안 촬영을 하면서 감정을 잡을 때 톤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이었다. 계절과 로케이션 상황 때문에 영화를 이야기 순서대로 찍을 수도 없었다. 뒤의 이야기를 먼저 찍고, 앞 이야기를 나중에 찍어야 하니 감정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그래서 나홍진 감독에게 “이거 어떡하냐” 하면, 감독은 “난 형이 하는 거 보고 찍으려고 했지” 하고, 난 “너 하는 거 보고 연기하려고 했지” 하기도 했다(웃음). 결국 합의를 본 게, 같은 장면을 여러 버전으로 촬영해 두는 거였다. 처음엔 격앙된 감정으로, 다음엔 조금 낮춰서, 나지막하게 등 한 장면을 여러 번 촬영했다. 그러다 보니 너무 힘든 거다. 돈도 많이 들고. 하루 만에 찍어야 할 장면을 나흘 걸려서 찍으니, 1,500만 원이면 될 게 6천만 원으로 불어났다. 제작진들 역시 문제였다. 당초 계획이 4개월 반이었는데 6개월을 촬영하게 됐으니 이들의 일정도 꼬일 게 아닌가. 온갖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체력방전 문제, 돈 문제에 부딪히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다독이고 갈궜다. 배우로서의 성장을 말하기보단, 그저 모두 함께 끝까지 버텼다는 게 내겐 소중한 일이다.
곡성 근처에도 가기 싫겠다(웃음).
그럴 리가! 거기에 맛있는 밥집이 얼마나 많은데(웃음)! 영화 제목이 <곡성>이라서 그렇지 14, 15개 정도 로케이션 장소가 있었다. 곡성 주민들은 정말 친절하다. 6천 원짜리 밥을 시켜도 반찬이 그릇그릇 넘친다. 사투리를 연습하느라 한 달 반 정도 곡성에서 살았는데 정말 좋았다. 동네 아줌마들과도 친하게 지냈고(웃음). 전라도 사람들이 인심이 좋더라(웃음). 날 알아보는 중고등학생들도 있었는데 조용히 하라면서 잡도리 좀 했지(웃음).
어떻게 당당하겠나. 살아 계실 때 잘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꿈에 나오시면 술상을 봐 드리고 싶다. 살아 계실 때 부모님께 못하면 죄인이다. 처음엔 ‘종구’가 딸을 사랑하는, 그 부성애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부성애를 잘 모르겠더라. 그런데 ‘효진’이가 발작하는 장면에서, 아이를 감싸 안아보니 바로 느껴졌다. 따뜻했다. 우리 아버지도 날 이렇게 안았을 텐데, 난 아버지가 내게 해 준 게 뭐 있냐고 원망하며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 죄인이지. 어떻게 내가 당당할 수 있겠나.
분위기를 조금 바꿔서 마무리하자. 최근에 있었던 즐거운 일은 뭔가(웃음)?
언론시사회 때 기자들이 영화 앞부분에서 웃어준 거. 기술시사회 때는 아무도 안 웃었거든. 영화의 앞부분은 웃으라고 만든 부분이다. 그런데 스텝들이 아무도 안 웃더라. 음향팀은 음향 문제만 고민하고 영상 팀은 영상 고민하고. 조연일 때는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냐며 기술시사회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기술시사회를 가 봤는데 아무도 웃지 않으니 걱정됐지(웃음). 그런데 언론시사회에 가서 기자들이 막 웃으니까, 황정민, 나홍진, 천우희, 이렇게 넷이서 “웃었다, 웃었다” 하면서 좋아했다. 그 날 좀 안도했다. 영화가 잘 돼야 할 텐데!
2016년 5월 11일 수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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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김재윤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