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이하 <청포도 사탕>) 과 <열세살, 수아>는 여성적이고 예민한 감성의 사람들이 선호한 반면, <설행>은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더라. 김희정 감독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며 영화를 좋게 봤다고 말해 줬다. 특히 폴란드 친구들은 남자가 주인공인데다가 총이 나온다는 점에서 <설행>이 전작과 다르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주변에 남자들이 많아서 그런지 <설행>을 전작보다 더 잘 이해했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관념적인 영화를 싫어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솔직히 <설행>은 관념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은 영화라고 느꼈다.
종교와 무속을 언급하다 보니 관념적이라고 느낄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설행>이 특정 종교에 한정된 영화가 아니라 영적인 영화여서 쉽게 접근 가능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영화에 대한 반응이 저마다 달라 재밌다.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설행>이 관념적인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데자뷰와 같은 현상은 일상에서도 우리 모두가 겪는 일이지 않나. <설행>은 그런 경험들의 확장판일 뿐이다. ‘장자의 나비’처럼 현실과 꿈 중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는 상태를 이야기한 거다. 물론 관념적인 부분도 있다. 죽음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지, 산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니까. 하지만 결국 정우가 알코올 중독자이기에 벌어진 일이다.
알코올 중독자 정우로 분한 김태훈의 연기가 돋보이더라.
중독자의 이야기를 그린다고 해서 정우가 술에 취해 괴로워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설행>에는 정우가 술 마시는 장면이 두 세 번만 짧게 나온다. 심지어 그 중 하나는 프리퀄처럼 영화의 중심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영화는 정우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나서 술을 못 마셔서 벌어지는 일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정우가 금주를 하면서 온 몸이 힘들어지고 마른 주정을 하는 거다.
<설행>은 전작들과 다른 면이 많은 영화 같다. 특별히 염두에 둔 부분이 있나.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작품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항상 이야기와 인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흰 눈 밭을 울며 걸어오는 한 남자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라 자연스럽게 시작한 영화다. 단지 전작들에서 내가 놓친 부분들을 염두에 두고 계획한 부분은 있다. <청포도 사탕> 때 로케이션이 많아 정말 고생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한정된 공간에서 한 인물에 집중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저예산 영화를 인천, 서울, 부산을 모두 돌아다니며 찍으니 너무 힘들더라. <청포도 사탕>은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데 날씨까지 안 받쳐줬다. 매일 비가 오는 바람에 실내 장면은 모두 커튼을 치고 찍었다. 돈이 없을 때 도시를 촬영하는 것도 굉장히 나쁜 거더라. 미술적으로 색깔도 지저분해졌다. 저예산 영화를 흑백으로 찍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설행>은 전작보다 조금 더 모노톤으로 촬영했다. 쉽게 말해, 내가 돈이 없는데 너무 많은 곳을 싸돌아다녔구나, 하는 거지(웃음).
<설행>은 영상적으로도 아름답더라.
미술팀이 정말 너무 잘해줬다. 지금 ‘집밥 백선생’과 ‘배우학교’를 하고 있는 미술감독인데 작업을 너무 잘 한다. 사실 <설행>은 촬영, 미술, 녹음, 할 것 없이 모든 스탭이 너무 뛰어났다.
촬영 같은 경우는 대부분 핸드헬드 숏처럼 보이던데 떨림이 거의 없어 놀랐다. 어떤 장면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맞다. 촬영감독이 젊다. 그것도 체력이 안 받쳐주면 못한다. 과거 장면은 카메라를 삼각대에 놓고 찍었지만 현재 장면은 대부분 핸드헬드로 촬영했다. <청포도 사탕> 때 함께 했던 촬영감독인데 마음이 잘 맞아 <설행>도 함께 했다. 굉장히 자유롭고 촬영을 잘 하는 친구다. <청포도 사탕>은 롱테이크 장면도 많아 특히 힘든 영화였는데 정말 잘 해줬다. 사적으로도 워낙 친해서 작업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서로 자주 이야기한다.
중독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
중독은 모든 창작자가 관심 있는 부분일 거다.
중독은 조절되는 게 아니니까. 끊고 싶다고 끊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보통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왜 끊지 못하겠냐고 하지만 의지로 중단이 가능하다면 중독이 아니지. 정신과에 가면 뇌 사진을 보여준다. 술을 보여줬을 때 보통 사람의 뇌는 3~4군데만 빨개지는데 알코올 중독자는 뇌의 2/3가 빨개진다. 뇌가 반응하는 거다. 하지만 가족의 경우, 머리로는 이해해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가족도 인간이니까. 지침서를 보면 끊을 수 있는데 왜 안 끊느냐고 말하지 말라고도 써 있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은 가족병이라고도 한다. 모든 중독이 마찬가지겠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 망하는 거다. 보통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암 같은 내과 병으로 죽는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창작자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니까. 결국 인간의 문제다. 어째서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시킬 만큼 나약한지를 묻는 거다. 아마 사랑하는 가족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알코올 중독이 되는 경우는 없을 거다. 그런데도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사람이 생긴다.
무언가에 중독되어 본 경험이 있나.
요새는 SNS 중독! 요즘은 일하느라고 전자파가 몸에서 흐르는 것 같다. <설행>은 작은 영화라 감독도 마케팅 팀의 일원으로 함께 하는 시스템이다(웃음). 명예 팀원처럼 SNS에도 <설행>에 관련된 글들을 계속 올리고 있다. 난 SNS 사냥꾼이다. 누구든 <설행>에 관련된 글을 올리면 반드시 찾아낸다. 올려만 봐라(웃음).
기자 간담회 때 옆자리에 앉은 기자가 시사가 끝나자마자 <설행>에 관한 글을 짧게 올렸는데 당신이 곧바로 리트윗했다며 신기해 하더라.
그 분이구나! 자존심이 있어서 바로 팔로우 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기사 잘 읽었다(웃음). 이러다 잊어버리고 팔로우를 못 하는 경우도 생긴다.
솔직히 말해 눈 밭에서 펼쳐지는 베드로와의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술을 왜 마시냐는 마리아의 질문에 정우가 아버지가 죽을 것처럼 술을 마시는 걸 봤다고 하는 대사가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정우는 그렇게 해야만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다. 중독은 유전병 같은 거다. 폭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알코올은 특히 그렇다. 보통 사람이 술에 중독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꼬맹이 때부터 부모가 술을 마시는 걸 계속 봐 왔다면 음주에 대한 경각심이 없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다. 혈액으로 전달되는 생물학적인 유전뿐 아니라 나쁜 환경에 노출돼 생기는 후천적 유전도 있는 거다.
그렇다면 영화 속 아버지는 정우의 알코올 중독을 형상화한 건가.
중독을 형상화한 걸 수도 있고 세상의 모든 악을 대변한 것일 수도 있다.
알코올 중독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겠다.
맞다. 러시아 사할린국제영화제에서 <설행>을 본 사람들은 나더러 아동이 알코올에 방치된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고 묻더라. 그들은 알코올 중독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기 때문에 알코올 중독 문제를 진지하게 다뤘다는 데 고마워했다. 알코올 중독이 영화에서 장르적으로 소비되는 경우는 많아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런데 내 영화는 세 편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작은 문제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이야기들이다. <열세살, 수아>는 한 여자 아이가 아빠의 죽음을 인정할 때까지의 과정을 지켜보고, <청포도 사탕>은 죽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서른 살 여자를 들여다 본다. 어떤 소재든 장치로 소비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진지하게 들여다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윤리적인 부분이라고도 생각하기 때문에 그 부분만큼은 예민하다. 다른 영화를 볼 때도 그런 부분에 있어 걸리는 게 있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말한 것처럼 당신은 객관적으로는 커 보이지 않는 문제를 주관적인 관점에서 확장시켜 이야기를 만드는 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말은 쉬워도 실제로 영화에서 사건의 진폭을 확장시키기란 쉽지 않을 텐데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그런 건 없다. 사실 나도 그 부분이 항상 고민이다. 시놉시스로 보면 소소한 사건으로만 비춰지기 쉬운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그래서 드라마를 더 잘 만들고 더 잘 구축해야 한다. 기본적인 드라마 요소들을 잘 뿌리고 잘 거둬야 하는 거지. 드라마가 어설프지 않고 탄탄해야 읽을 때 감이 온다. 상업영화들이 막장이라고 할 정도로 큰 갈등구조를 가진 사건을 많이 다루는 이유는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게 먹히거든. 그런데 영화는 이야기의 드라마를 얼마나 탄탄하게 구축하는지가 우선이다. 그래서 <설행>도 다시 보면 처음 봤을 때는 놓쳤던 부분이 많이 숨어 있을 거다. 어떤 관객은 <설행>을 6번이나 봤다는데 볼 때마다 울거나 웃거나 반응이 다르다고 하더라.
개봉한 지 1주일도 안 됐는데 6번이라니!
전주국제영화제 때부터 봐 온 거다(웃음). 어제도 주차장에서 ‘우주미남 김태훈’이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김태훈과 사진 찍고 있는데 만났다. 어쨌든 <설행>을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설행> 같은 영화는 이야기 고리 하나가 잠시라도 풀어지면 관객이 영화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영화가 이해하기 힘들거나 지루해지는 거다. 그래서 <설행>은 정말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전작들도 마찬가지지만 <설행>은 풍경도 중요한 영화라 특히 그렇다. 편집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나리오부터 연결고리를 촘촘히 엮어놓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걷잡을 수 없다.
차가 흔들릴 때 섹스하는 것 같지 않았나?
설마 의도한 건가.
나도 편집할 때 알았다. 하지만 성적 긴장감은 당연히 염두에 둔 부분이다. 남녀 사이인데다 마리아는 수녀니 긴장감이 더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난 둘 사이에 아무 일이 없을 줄 아니 미끼를 조금씩 던지는 거다(웃음).
준비하는 작품이 있나.
요즘은 <한여름의 판타지아>처럼 조금 편안하게 흘러가는 느낌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가제는 <프랑스 여자>인데 파리에서 국적을 획득해 프랑스 여자로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프로젝트가 여러 개 있으니 어떤 작품이 가장 먼저 영화화 될지는 모르겠다. 여자가 아빠 장례식 이후 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파리 테러 때문에 일이 많이 없어진 거지. 가장 친한 친구가 여자 영화감독인데 둘이서 강원랜드에 빠칭코도 하러 간다(웃음). 경험담이 많이 들어갈 것 같다. 인물들의 대화가 내가 직접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아 작업과정이 재밌을 것 같다. 시나리오도 빨리 나올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빠칭코를 했다는 건 아니다(웃음).
진실인가(웃음).
아는 언니가 블랙잭 딜러였는데 지금 카지노에서 관리직으로 있다. 연극 연기 하려던 사람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덕수궁 근처에 공연 예술아카데미라는 1년짜리 코스가 있었다. 유학 가기 전 23살 때 그 곳에서 연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언니다. 그 곳에서 안내상과 김중기도 만났다. <설행>을 촬영할 때 성당을 찾으러 태백에 간 김에 언니와 만나려고 하기도 했는데 보지는 못했다. 주변에 딜러처럼 색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억해두고 나중에 시나리오에 쓰곤 한다.
<설행>은 전작과 비슷한 듯 다른 면이 많은 영화다.
<설행>은 감수성보다는 분위기에 어필하는 영화다. 그래서인지 전작들보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남자 관객이 적더라. 남자들은 <청포도 사탕>을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어느 50대 일본 남자 관객은 일본 여자 같으면 절대로 영화의 선주처럼 남편에게 거짓말하고 부산에 가는 일이 없었을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납득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러자 극장 맨 앞줄에 앉아있던 일본 여성들이 입을 가리고 웃더라. 한 일본 여배우는 나중에 그 남자가 정말 꼴보기 싫었다고 귀뜸하더라. 일본인들은 서로에게 워낙 친절하니 그 자리에서 남자보고 뭐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는데 남미 였다면 아마 소리 질렀을 거다(웃음).
문화권에 따라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걸 잘 기억하나 보다.
맞다. 그게 장점인 것 같다. 예컨대 인도관객은 환생을 믿느냐고 묻더라. 그들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 거다. 러시아는 알코올 중독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영화에 몰입해서 봤다. 스웨덴은 다소 진지한 편인데 <설행> 속 자연이 스웨덴 같다면서 영화를 가장 좋아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산딸기> 같은 영화라고 극찬해 줬다(웃음). 종교적이고 영적인 부분이 있어 그렇게 이야기한 것 같다. 판타지적인 요소도 있어 남미 문화권 영화 같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도 있었다. 초상화 얼굴에서 피가 나서 번지는 이미지 때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초현실주의가 연상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화는 달라도 근본적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은 모두 똑같다는 게 재미있다. 소재 자체가 관심이 없거나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극장을 나간다.
<설행>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매력이 있더라.
관객들도 영화를 완전히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영화가 아름답게 느껴졌다는 글을 인터넷에 많이 올렸더라. 그런 글을 읽으면 행복하다. 아마도 세상을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지 않는 심성을 가져서 그런 것 같다. 뭐든지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설행>을 ‘종교영화야? 왜 나에게 종교를 강요해’ 하고 공격적으로 받아 들인다. 자기 입장을 먼저 세우고 거기에 입각해 작품을 바라보는 거지.
예전에도 들었던 질문인데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과거가 있지만 과거를 잊고 살지 않나. 그런데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슴 깊이 묻어 둔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건 아마 과거라기보다는 기억에 가까울 거다. 난 작품과 달리 외향적인 사람이다. 내 작품을 본 소설가들은 시나리오를 다른 사람이 써 줬냐고 물을 정도다. 안내상은 <청포도 사탕> 시나리오를 읽고 밤 12시에 전화해서 너무 좋은데 정말 내가 시나리오를 쓴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다(웃음). 난 과거 회귀형도 아니고 찬란한 시절이 있던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 아빠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과 후가 다른 건 있다. 우리 집은 유독 아빠와의 대화가 많았던 집이거든. 그런데 그게 내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기억이란 본질적인 것 같다. 그에 따라 각자가 어떤 과거를 갖는지가 달라질 테니까.
도로가 흔들리고 하늘이 빨개지는 등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들은 시각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막연한 느낌으로만 기억되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직접 구현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
맞다. 내가 생각한 판타지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게 어려운 부분이었다. 사실 지금도 고민하는 부분이고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예산이 많다면 할 수 있는 게 많겠지만 여러 가지 제한이 있다 보니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정말 천운인 게 제작사가 인스터라는 후반업체여서 대부분의 CG를 거의 무료로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장면들을 어떻게 구현했을지 모르겠다. 영화를 만들 때는 처음부터 여러모로 자문을 구하면서 찍었다. 단순하게는 구더기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지부터 화면의 어떤 부분을 어떤 색깔로 바꿀건지까지 모두 촬영감독, CG감독과 논의 했다. 그런 과정도 결국은 시간 싸움인 건데 그런 논의를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본이 많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자본이 없어 한계가 있었다. 컴퓨터 그래픽이야말로 매우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말해줘야 하는 부분이다. 대충 이런 것 같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작업하면서 그런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트루 디텍티브’라는 미드를 보면 매튜 매커너히가 환각증상을 보이는 장면이 있다.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한 장면이다(웃음). 난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 장면을 스탭들에게 보여주며 논의했다(웃음). 찍을 때부터 논의가 돼 있어야 하는 부분이거든.
우츠 국립영화학교를 나온 걸로 안다. 그래서인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동유럽 감독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느껴진다. 스스로는 자신의 작품이 학교의 성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나.
<세 가지 색 >시리즈와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을 연출한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우츠를 나왔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모스크바국립학교를 나왔다. 한국의 송일곤 감독과 문승욱 감독도 우츠를 졸업했다. 아무래도 러시아 영화를 많이 접한 건 맞다. 특히 인물이 침대 위 공중에 붕 떠 있는 <희생>의 이미지는 항상 생각한다. 그때는 CG도 열악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천성적인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감성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내가 만든 영화는 우츠의 기준으로는 내러티브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은 영화였다. 학교에는 훨씬 더 관념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많았거든. 그래서 내 영화가 학교에서는 조금 독특했다. 인물이 땅바닥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물 친화적이고 캐릭터 중심적인 영화를 만들어 왔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설행>이 재미난 행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전작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말한 거다. 보다 더 관념적이라니까(웃음).
그런데 취재를 해 보니 알코올 중독은 정말 치료 불가능하더라. 죽어야 끝나는 병이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들은 끊는다는 말을 안 한다. 끊는 게 아니라 도망다니는 거고, 전문용어로는 ‘멈추고 알아차린다’고 말한다. 레이몬드 카버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도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런데 죽기 전 10년 동안 술을 안 마셨다. 그때 쓴 소설 중에 좋은 게 정말 많다. 카버도 10년 동안 도망 다닌 거다. 술자리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만 술을 권하고 본인은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하더라. 골 때리는 게 정말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물로 속여 마시게 하기라도 하면 그는 한 모금에 끝장나는 거다. 정신과 의사 말로는 알코올 중독인데 정신과 치료를 안 받는 건 뼈가 부러졌는데 뼈가 저절로 붙길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더라. 힘내라는 말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거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려면 영적인 도움이 필요한 거다. 중독뿐 아니라 해결책이 없는 병에 걸린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
초상화의 상처가 덧나는 것도 알코올 중독 재발의 의미인 건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같은 선상에 있다고는 볼 수 있을 거다. 마치 우리나라 전설의 고향 같은 일화인데 재밌지 않나. 이상하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나. 상처가 덧칠하고 노력한다고 사라진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알코올 중독도 마찬가지다.
전작과의 유사점 중 또 다른 하나는 죄의식이다. 당신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나.
아니다. 나도 코미디나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런데 천성이 무서운 거다. 결국 내가 관심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코미디가 아닌 거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만 할 수 있는 성향인 거다. 제작자들은 내가 굽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와 작업하기 싫을 거다. 그런데 난 인간적으로는 굉장히 성격이 좋은 사람이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한다. 다만 생각한 대로 말하지 의중에 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성격이 더럽다. 마음에 안 들면 티가 나거든(웃음). 내가 이렇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고등학교 때는 배우가 되고 싶어 연기를 했다. 감정 표현을 배우로서 하고 싶었는데 배우가 녹록지 않더라(웃음). 그렇다고 감독이 녹록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어쨌든 배우는 몸으로 모든 걸 표현해야 하는데 난 내 몸을 콘트롤 하는 게 싫었다. 살도 빼고 싶지 않고. 물론 날씬하지 않은 배우도 많지만 많은 부분 트레이닝 받아야 하더라. 술도 많이 마시기 때문에 대사 외우는 것도 힘들었다(웃음). 그래서 본능적으로 내가 배우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연기도 연기지만 극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극작과를 갔는데 거기서 <살인의 추억>의 원작 ‘날 보러와요’를 쓴 김광림 선생님이 나더러 졸업 작품으로 연극 연출을 하라고 하더라. 선생님이 보기엔 내가 연출에 더 어울렸던 거다. 그런데 해 보니 재밌더라. 그래서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연출 공부했는데 그 당시 IMF직전 유학 붐이 있었다. 다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로 가는데 난 이상한 객기가 있어 유명한 나라로 가기가 싫더라. 언어도 문화도 생소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24살의 어린 객기지. 아무 것도 모르는 걸 새로 접하는 게 유학 아니야? 이러면서(웃음). 그때 개고생 했다. 살이 그때 최고로 빠졌을 거다. 여하튼 그렇게 돌고 돌아 결국 영화를 하게 된 거다.
정말 먼 길을 돌아왔다(웃음).
그런데 난 음악도 좋아하고 잘 알지는 못하지만 미술도 하고 싶었다. 실제로 데셍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영화는 나의 여러 가지 관심사가 모두 행복하게 만난 거더라. 운이 좋았다. 무언가를 깨닫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다. 늦게 터진 거다. 하고 싶은 걸 하다 보니 그 길 끝에 영화가 있었다. 재밌는 게 삼남매 중 첫째인데 남동생이 영화잡지 ‘스크린’과 ‘로드쇼’를 자주 사 왔다. 그래서 화장실 갈 때 자주 읽었는데 그때부터 나름 시네필이었던 거다. 그래서 영화를 항상 가깝게 느꼈다. 그처럼 어릴 때부터의 관심이 자연스레 영화를 시작하게 한 거지 거창한 목적의식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한 건 아니다. 난 영화를 만드는 생활인일 뿐이다. 생활인이면 돈을 벌어야 하니 생활인 아닌가? 난 반백수나 마찬가지다.
백수라니! 오늘도 대학 강의를 하고 온 걸로 안다.
무슨 강의가 3학기에 한 번 있나(웃음). 작품을 하려면 학교 같은 데 매여 있을 수가 없다. 출근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정말 초중고를 제 시간에 다녔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시간에 딱 맞춰서 모두 등교하는 거! 그래도 이상하게 완벽주의자의 기질이 있어 약속시간에 늦는 법은 없다. 자유로운 것 같은데 완벽주의 기질은 또 있는 거다. 사람은 모두 복잡하지 않나. 아줌마들과 약속할 때가 정말 가장 재밌다. 늦을 이유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그것까지 계산하고 나왔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타박도 한다(웃음).
폴란드에서는 어떤 고생을 했나?
일단 언어 공부를 안 하고 갔으니 매일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는 상처가 장난 아니었다. 다행히 본질적으로 소통하는 걸 좋아해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언어할 때는 그게 최고지 않나. 덕분에 언어를 빨리 배웠고 지금도 안 잊어버렸다. 지금도 폴란드에 가면 항상 공항으로 마중 오는 친구가 몇 명 있다. 한국에도 그런 친구는 없는 것 같다(웃음).
영화감독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주 많다. 본질적인 감수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배워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태도도 배워지지 않는 것 같다. 그 태도가 반드시 좋아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태도가 어떻느냐에 따라 영화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거다. 나쁜 태도를 가진 감독도 있다.
그 태도가 자신만의 개성이고 결국 영화의 색깔로 드러나지 않나.
맞다. 본인만의 고유한 의식과 인간에 대한 태도가 형성돼 있어야 한다. 감독으로서의 또 다른 자질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믿는 게 중요하다.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갖는 것!
확신을 갖는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노력했다는 말이지 않나. 영화는 공동작업이지 혼자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남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관객을 만나기 전에 제작자와 모든 스탭들과의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천재감독이라면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따라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할 만한 것이라는 걸 스탭들이 이해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작업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실제로 스탭들도 즐거워했다. 돈이 안 돼서 그렇지(웃음). 그러니 다른 저예산 영화는 참여 안 해도 김희정 감독 영화는 참여해 주지 않나. 다행히 <설행>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지원해줬다. <설행> 같은 아이디어 영화는 영화제가 돈을 대 줘야지 누가 돈을 대겠나. 전주국제영화제에 술 마신다고 10일 동안 있었는데 매일 다른 스탭들이 내려와서 함께 있는 걸 보고 감동 받았다. 내 스탭들과 계속 즐겁게 같이 일하고 싶다.
감독으로서 당신의 가장 큰 장점이 친화력이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그건 진짜 장점이다. 촬영은 정말 고생이다. 그래서 감독이 내가 예술을 하니까 당신들은 따라만 오라는 식이면 정말 거만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 돈은 못 줄지언정 재미라도 있어야지. 그런데 사람들이 내 촬영장은 생각보다 조용하다고 하더라. 집중도도 높다. 다들 뭘 해야 할지 알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현장인 거다.
다음 번엔 현장에 초대해 달라.
좋다. 나도 빨리 찍고 싶다. 올해 가을에 찍고 싶다. 이렇게 말을 해야지 정말로 이루어진다.
기자 간담회에서 최무성과의 사이가 유독 좋아 보이더라. 배우가 그렇게 감독을 칭찬하며 챙기는 경우는 자주 못 봤다.
그것도 최무성이 그랬다니! 소문 못 들었나. 최무성은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래서 간담회 때 나도 놀랐다. 그 날 정말 없었으면 안 될 존재였다. 최무성이 저런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든 <설행>에 힘이 돼 주고 싶은 거다. 그래서 보면서 어이구, 애쓴다 싶었고 감동받았다(웃음).
다른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우린 분위기가 정말 좋다. 모두 친하다. 어제 김태훈, 박소담과 GV를 했다. 여기 사진 한 번 봐라. 모두 엄청 해맑다. 내가 가장 어둡네. 김태훈은 정말 신났다. 배우들이 말을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라 말은 내가 많이 했다. <설행>에 대해 호불호는 갈리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모두 극찬하더라. 물론 그것 때문에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좋았으니 연기가 더 잘 나온 것도 있지 않겠나.
일을 하다 보면 항상 분위기가 좋을 수만은 없지 않나.
분명 각을 세우는 게 있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을 해 줘야 한다. 뜨뜻미지근하게 컨펌을 계속 기다리게 하는 게 가장 나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뭐든 피드백을 굉장히 빠르게 준다. 술도 그래서 빨리 마신다(웃음). 분명한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친한 경우에 강하게 거절하는 게 마음에 걸릴 수도 있는데 영화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프로들은 알아 본다. 아닌데 맞다고 하는 게 제일 싫다. 현장에서는 오케이 해 놓고 나중에 딴 소리 하지 않는다. 보충 촬영도 없다. 영화 현장은, 특히 저예산 영화 현장은 그런 일의 맺고 끊음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못 찍는다.
배우와 충돌한 적은 없나.
충돌은 없었다. 그런데 정우가 걸어나가는 장면에 대한 해석이 김태훈과 다른 적은 있었다. 김태훈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한 번 찍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도 한 번 더 찍으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 그런데 찍고 보니 김태훈이 찍자고 한 게 맞더라. 김태훈은 정말 좋은 배우라니까. 어쨌든 그럴 때 감독의 역할은 무조건 다른 의견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우선 해 보는 거다. 영화연출 책에도 가능성의 문을 살짝 열어두라는 말이 있다.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모든 걸 닫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세 배우 모두 집중력 좋은 프로 배우다. 박소담은 놀라운 게 장면의 앞뒤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미 알고 있더라. 어린 배우가 그러기 쉽지 않거든.
연출하면서 가장 힘든 건 무엇인가.
돈이 없는 게 가장 힘들더라(웃음). 17회차 촬영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스탭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춥기도 했고. 그래서 앞으로는 저예산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2006년에 <열세살, 수아>를 영진위 제작 지원금 5억으로 찍었다. 그런데 그 다음 작품인 <청포도 사탕>은 2억으로 촬영했다. 예산이 더 낮아진 거지. 그리고 <설행>은 1억으로 찍었다. 전주에서 지원하는 게 1억이니까. 회사가 후반업체라서 많은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무슨 미끄럼틀도 아니고 계속 예산이 떨어지니 힘들더라. 스탭들과 행복하게 작업하고 싶은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한정적이고 맨날 부탁해야 하니 고민이 많았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의 영화는 투자가 많이 될 수 있는 성향의 영화는 아니니까.
투자를 쉽게 받으려면 시나리오를 많이 고쳐야 한다. <열세살, 수아>도 훨씬 더 상업적인 성장영화로 만들 수 있었을 거다. 실제로 버디무비로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난 이야기가 훼손되는 게 싫었다. 머리털 나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 의도해 넣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제작자들이 싫어하지. 그런데 결국 영화가 성공하려면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된다.
우린 전주가 줬으니까(웃음). <설행>은 시나리오를 10개월 정도 썼다. <열 세살 수아>는 5년 걸렸고 <청포도 사탕>은 3년 걸렸는데 <설행>은 가장 짧게 쓴 거다. 정말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웃음) 하여튼 시나리오를 쓰고 투자를 받아야겠는데 방법이 없더라. 그래서 전주 영화제가 정말 신 같았다. 열심히 기도해서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정말 맨땅에 헤딩한 거거든. 전주 영화제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청포도 사탕>을 제작했던 마운틴 픽쳐스 제작사 대표님에게 김영진 수석프로그래머의 전화번호 물어 직접 전화했다. 시나리오가 있다니까 보내보라고 하더라. 그때가 부산 영화제 직전이었는데 영화제가 끝나자마자 전화가 바로 오더라. 그래서 괜찮게 봤다는 감이 있었지(웃음). 간혹 전주국제영화제가 인맥으로 움직인다는 의심도 사는데 내 경우를 들어 보면 알겠지만 그런 게 없다. 난 정말 그때 관계자들을 처음 알았다. 제작은 빨리 시작 됐다. 시나리오 보내고 1주일 만에 만나서 10월부터 사전 제작을 시작해 1월에 크랭크인 했다.
정말 기뻤겠다.
완전 기뻤다. 너무 늦어서 안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미 지원을 받기로 한 프로젝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해마다 3편의 장편을 지원하는 걸 아는데 시도를 안 해 볼 이유가 없었다. 대형투자 배급사에 피칭하는 거 보다 훨씬 나을 걸?(웃음) 그 전에는 프랑스 돈으로 시나리오 썼다. <열세살, 수아>는 칸느 영화제 신인 작가 프로그램에서 지원을 받아 시나리오를 썼다. 각국에서 모인 6명의 감독이 파리 몽마르트 언덕 밑에 있는 아파트 각자의 방에서 4개월 반 동안 시나리오를 쓴다.
경쟁률이 굉장히 치열한 것처럼 들린다.
정말 몇 백 명이 필모와 기획 아이디어를 보낸다. 1달에 1,000유로 가까이를 줬다. 방 안에는 모든 게 다 있었다. 그게 2005년도인데 일주일에 한 번씩 네스프레소 캡슐커피가 4가지 종류로 배달 오더라. 다신 그렇게 못 살겠지(웃음). 여하튼 첫 번째 작품은 그렇게 썼고 두 번째 <청포도 사탕>도 노르망디 예술가의 집이라는 곳에서 지원을 받아 작업했다.
프랑스는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이 좋은 것 같다. 그런 면은 참 부럽다.
맞다. <설행>은 원주의 토지문화재단에서 지내며 작업했다. 돈은 안 주지만 주말 빼고 밥과 숙식이 해결된다. 작가들에 대한 도움이 정말 절실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지원이 없었다면 <설행>도 한참이나 헤맸을 프로젝트다. 그렇게 예술가를 지원해주는 프로젝트가 중요하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만일 영화에는 구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를 말해달라.
각자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쁜 영화도 있다고 본다. 물론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난 자극을 위한 자극을 주는 영화를 안 좋아한다. 그리고 대상을 이용하는 영화는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장애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킨다는 식으로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건 나쁜 영화라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각자 좋아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겠지. 보고 금방 잊어버리는 영화도 필요하지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게 되는 영화도 필요하다. 또 빨래 널다가도 문득 생각나는 영화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잊혔던 기억이 생각나는 영화가 좋다. <열세살, 수아> 리뷰 중 인상 깊은 글이 하나 있었는데 휴가 나온 군인이 쓴 거였다. 영화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엄마의 옛날 흑백사진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엄마도 처녀였고 예뻤던 시절이 있었는데 왜 내가 그걸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감동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기억을 환기 시키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것 같다. 그런 영화를 가깝게 느끼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근래 가장 행복했던 일은 무엇인가.
관객이 많이 들었다면 첫날 스코어라고 대답했을 텐데! (웃음) 얼마 전 라디오에 출연했는데 노래를 선곡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이더라. 평범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직접 해 보니 너무 들뜨더라. 틀고 싶은 노래가 너무 많았다. 너무 신선한 경험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대중과 함께 들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원래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노래 틀어주는 거 좋아하거든. DJ가 이렇게 행복한 직업인지 몰랐다니까(웃음). 그리고 <설행>은 황금가지를 많이 모아야 해서 1년 동안 영화제를 돌아다니느라 개봉이 늦었는데 시사회 때 사람들이 오는 걸 보니 마치 결혼식 때 하객을 초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좋더라. 어릴 때부터 연극할 때 사람들 불러 보여주는 걸 좋아했다. 결국 내가 만든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시사회 때 사람들을 초청하고 반응을 보는 게 행복했다.
라디오는 박지윤의 FM데이트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그런데 <청포도 사탕>에서 박지윤이 연기를 너무 잘 하지 않았나.
정말 잘 했다. 대사의 끝마무리 처리가 독특해서 계속 눈여겨 보게 되더라. 캐릭터도 정말 잘 잡았고. 일상적이지 않은 대사인데 전달력도 뛰어났다. 스크린에서 더 자주 보고 싶다.
작가 역 어울리지. 처음 만났을 때 외국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다는 게 좋았다. 보스톤에서 미디어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더라. 박지윤이 맡은 작가 캐릭터는 내가 많이 투영된 인물이었거든. 비록 몸은 전혀 다르지만 정신이 많이 투영됐다(웃음). 박지윤도 연기를 계속 하고 싶을 텐데 맞는 역할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기회는 또 오니까. 영화 감독 역으로 별로일까?(웃음)
2016년 3월 9일 수요일 | 글_최정인 기자(jeongin@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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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