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인사동에서 잤어요. 지금 찍고 있는 작품은 밤 신이 많거든요. 어젯밤 집에 들어가면 오늘 아침 인터뷰에 늦을 것 같아서 근처에서 잤어요.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요(웃음). 그리고 아침 일찍 나와서 준비했습니다. 어제는 꽃단장도 했는데 오늘은 모자를 쓰고 나왔어요(웃음).
오늘은 집에 들어갈 예정인가요? (웃음)
이틀 동안 집에 못 들어갔는데 오늘은 들어가야 됩니다. 속옷도 사 입었거든요(웃음). 부모님에게 아직 인사를 못 드렸는데 집에 들어가면 인사드려야죠. 아이들에게도 인사 받고요. 촬영할 때는 모텔에서 자는 일이 많아요. <악의 연대기>는 한 달 동안 부산에서 촬영했어요. 밖에서 잘 때는 속옷과 양말을 4~5개 정도 챙겨 가는데 보통 하나만 입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남겨두게 돼요. 샤워하면서 금방 빨거든요. 수건에 둘둘 말아서 짜면 금방 마르고요. TV 위에 올려놓으면 금방 뽀송뽀송해져요. 부산에서는 그렇게 한 달을 버텼어요(웃음).
시사회 반응이 좋은데 기분이 어떤가요?
제가 나온 영화가 어땠는지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영화는 예산에 비해 정말 잘 만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떻게 100% 만족할 수 있겠어요. 언론시사회가 가장 두렵고 긴장돼요. 불안하고 초조하고요. 무대에 올라갈 때 감독님에게 힘내라고, 떨지 말고 올라가자고 이야기했는데 무대 위에 올라가니까 나도 모르게 90도로 인사하게 되더라고요(웃음). 언론시사회는 숙제 검사 받는 것처럼 두려워요.
<숨바꼭질>에 이어 <악의 연대기>도 스릴러에요. <숨바꼭질>과 비교해 흥행 예감은 어떤가요?
스릴러를 많이 한 것 같지만 두 편 했어요(웃음). <숨바꼭질>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반응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들었어요.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공포를 느꼈거든요. 주로 밤에 시나리오를 읽는데, <숨바꼭질>은 무서워서 두 번에 나눠 읽었거든요. <숨바꼭질>은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누군가 몰래 나를 지켜보며 살림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귀신보다 실체가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게 잘 느껴졌어요. 실제로 비슷한 사례가 있기도 했고요. 무섭게 잘 만든 것 같아요. 문정희가 그렇게 무서운 여자인지 몰랐어요(웃음). 허정 감독이 머리가 좋더라고요. 디렉션을 시원하게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모두 전달했어요. 항상 손에 초시계를 지니고 다니는 젊은 감독이었죠. <숨바꼭질>이 끝날 때쯤 <악의 연대기>를 접하게 됐는데 시나리오가 재밌었어요. 그런데 표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시나리오가 재밌으면 다시 한 번 읽어요. 그때는 머릿속에서 인물을 그려가면서 천천히 읽어요. 그런데 최창식은 지문 속에, 혹은 지문에 가려진 사안들이 많은 인물 같았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고 살짝 출연을 갈등했어요.
백운학 감독님을 두 번 정도 봤어요. 처음 만났을 때 시나리오를 잘 봤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사실 시나리오를 책상 위에 올려만 뒀지 읽어보지는 못한 상태였어요(웃음).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백운학 감독님이 제작사 장원석 대표와 함께 후배 결혼식에 왔을 때 시나리오를 잘 봤다고 이야기했죠. 백운학 감독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날 결혼식에서 할아버지가 제 뒤에서 말씀도 안하고 가만히 서 계시더라고요. 좋은 사람 같았어요. 몇 마디 나눠보니 마른 체구였지만 옹골찬 사람 같더라고요. 이런 사람이라면 촬영하면서 스트레스를 조금 덜 받을 것 같아서 <악의 연대기>를 시작했는데 실제로는 감독님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줬어요(웃음). 백운학 감독님은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에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저 때문에 촬영이 지연됐는데 회복하는 시기에 감독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우는 거예요. 그때 할아버지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어요(웃음). 웃고 있는데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더라니까요.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눈물이 나네요. 그래서 이제부터 <악의 연대기>를 시작할거니까 울지 말라고 했어요(웃음). <악의 연대기>는 그렇게 할아버지가 한 달을 기다려줘서 만든 거예요. 스탭과 다른 배우들도 기다려줬고요. 그래서 정말 미안했어요.
온전치 않은 몸으로 촬영했는데 힘들지는 않았나요?
세트 촬영기간 동안 한 달 정도 부산에서 꼼짝없이 가만히 지냈어요. 퇴원한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술이나 담배도 할 수가 없었어요. 일과를 마치고 나면 숙소밖에 갈 곳이 없었는데 숙소에 들어가면 아무도 전화를 안 하는 거예요. 마동석도 전에는 잘 놀아줬는데 그때는 형은 쉬어야 된다면서 나를 부르지 않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2주 이상 들으니까 짜증이 났어요(웃음). ‘니가 언제부터 내 몸을 관리했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중증환자 취급 하더라고요(웃음). 우리가 흔히 어른들께 ‘건강은 하시죠?’라고 묻는데 앞으로는 어른들께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다 싶더라니까요. 그래서 촬영한 지 보름 정도가 지난 후에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끼리 노는데 방해가 될까봐 전화도 안했어요. 그때 고독을 많이 느꼈어요. 숙소에 돌아와서 씻고 나면 오늘은 무슨 장면을 찍었지, 내일은 무슨 장면을 촬영하지, 그런 생각 밖에 안하거든요. 다음 날 촬영 준비를 마치고 나면 뉴스를 보거나 반신욕을 하면서 혼자 지냈어요. 그런데 그때 거의 유배생활 다름없이 지낸 것이 촬영에는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혼자 생활한 것이 연기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됐나요?
최창식은 자신의 범행을 어떤 동료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잖아요. 현실이라면 112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료인 오형사에게 먼저 전화해서 고백했을 거예요. ‘어떤 놈이 나를 죽이려고 덤벼들어 싸우다보니 이렇게 됐는데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털어놓았겠죠. 그럼 오형사가 ‘형, 이거 정당방위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테고 함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겠죠.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무리 친한 동료라 해도 결국 남의 나라 이야기일 거예요. 어떤 사건을 저질러서 남에게 이야기했을 때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래서 최창식이 더 괴로운 거예요. 부산 촬영장에서 다른 스탭들과 한 달간 함께 지내긴했지만 감정을 공유할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촬영장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것이 영화에 도움이 안됐다면 거짓말이겠죠. 동료에게 내 상황을 이야기 못하고, 감정도 감춰야하고, 감독님의 디렉션은 점점 강해지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백운학 감독님에게 할아버지가 한번 연기해보라고 그랬다니까요(웃음).
본의 아니게 혼자 생활한 것이 최창식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많이 도움이 된 거군요.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스케줄대로라면 로케이션 촬영을 먼저 끝내고 세트 촬영을 하는 건데 저 때문에 순서를 바꿨어요. 부산에서 1회차 로케이션 촬영을 마친 후에 세트 촬영부터 먼저 진행했어요. 그때 촬영한 로케이션 장면은 범인이 밝혀진 이후의 이야기에요. 세트 촬영은 대부분 영화의 순서대로 촬영했고요. 세트 촬영이 끝나고 과거 장면을 로케이션 촬영으로 마저 찍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촬영 순서를 그렇게 바꾼 것이 연기하는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느낌상 최창식의 과거를 염두에 두고 연기했다면 영화의 첫 장면부터 거짓 연기가 나왔을 거예요. 영화는 최창식이 반장이 된 이후부터 시작하잖아요. 시나리오를 읽었기 때문에 최창식의 과거를 알고는 있었지만 연기할 때는 과거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한 것이 잘됐다 싶어요. 과거 장면은 촬영 후반부에 찍었거든요. 영화에서도 최창식이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만나잖아요. 촬영순서가 바뀐 것이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다고 생각해요.
모든 죄는 최창식 반장에게 있습니다(웃음). 가해자죠. 최창식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돼요. 풋풋하고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초임 시절의 모습이죠. 하지만 그때 다른 형사들이 하자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잖아요. 타협하지 말았어야 해요. 그러면 영화는 빨리 끝났겠지만요(웃음). 최창식은 기억 속 본인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게 돼요. 최창식도 어느 날 갑자기 지금과 같은 반장이 된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과거를 잊고 살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죄를 짓는데 무뎌진 거겠죠. 큰 죄는 아닐지라도 우리도 과거의 잘못을 쉽게 잊어버리고 살잖아요. 최창식의 현재 모습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현실의 때가 묻은 상태에요. 하지만 때를 때라고 생각 못한 것이 문제인 거죠. 백운학 감독님은 어떻게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악의 연대기>는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니야?’라고 타협하는 게 잘못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이 틀리면 감독님께 전화가 오겠죠(웃음). 만일 최창식이 타협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예요. 최창식은 동료 형사들에게 상품권을 나눠 쓰라고 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때가 묻은 사람이에요. 직장에서는 동료들에게 좋은 반장이고 집에 가면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생활의 때는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큰 문제가 된 거죠. 그때 최창식이 선배들에게 이렇게 사건을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면 영화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고 범인은 별 탈 없이 잘 살 수 있었겠죠. 최창식은 작은 국가나 진배없는 한 가정을 흔들어 놓았으니 가해자인 거죠. 한 가정을 몰락하게 만든 원죄를 진 거에요. 엊그저께 인사동에서 자면서 반성했어요(웃음).
그전까지는 최창식이 악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나요?
촬영이 끝날 때까지 죄를 지은 사람은 무조건 악인인가, 라는 물음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우리도 흔히 죄를 짓잖아요. 알게 모르게 모두 죄를 짓고 산단 말이죠. 그런데 그 죄를 빨리 시인해야 하는 거죠. 최창식이 과거에 그렇게 행동하면 안됐던 거예요. 하지만 최창식도 놓치기 싫은 것들이 있잖아요. 최창식은 직장에서는 선망 받는 선배 형사고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에요.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곧 특진도 하고요. 그러니 그 모든 걸 버리고 싶을까요?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죄를 은폐하게 되고 고군분투 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죄를 덮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더 외로웠던 거예요.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내가 만일 최창식이라면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까, 생각이 나더라고요.
본인이라면 자백했을까요?
무조건 자백했을 거예요. 최창식도 정지수를 살해하고 나서 112를 눌렀을 때만해도 갈등했던 거예요. 그런데 소장의 전화를 받고 생각이 변한 거죠. 그 순간을 조금 더 길게 촬영했는데 편집됐어요. 실제라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하겠습니까. 하지만 영화니까요(웃음). 어쨌든 최창식은 그 순간 또 타협을 한 거예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그렇게 타협한 것이 잘못인 거죠. 그때는 핏발이 설 수 밖에 없어요. 본인이 그동안 이뤄왔고 쌓아왔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릴까봐 두려웠던 거예요. 그런 감정적인 장면들을 촬영할 때 백운학 감독님의 디렉션이 상당히 세밀했어요. 시나리오를 볼 때는 그런 숨겨진 감정들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느꼈지만 촬영하면서는 힘들었어요. 감정을 너무 많이 감추면 티가 안 나고, 그렇다고 드러내면 동료에게 탄로 나잖아요. 그 간극을 잘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경찰서장이 사건을 덮으라고 말할 때 최창식의 표정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어요. 대사도 없고 행동도 제한이 많아 감정을 연기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한 테이크, 한 테이크가 그래서 더 힘들었어요. 모니터를 다른 때보다 더 안 봤어요. 오케이와 편집은 감독님이 하는 거니까요. 감독님이 오케이하면 그때 모니터를 봤어요.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은 경우는 테이크를 한 번 더 가자고 했고요. 테이크가 끝날 때마다 모니터를 보면 연기가 무너져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덧칠하게 되거나요. 그러면 표현은 조금 더 매끈해지겠지만 본연의 감정을 계속해서 유지하지는 못하겠죠.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경찰서장이 덮으라고 말할 때 최창식이 느끼는 감정만 오롯이 가지고 가는 거죠. 내가 어떻게 연기했는지는 나중에 모니터를 볼 때 아는 거예요. 연기하는 순간 어떤 공식을 가지고 연기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연기는 공식처럼 해서는 안돼요. 할 수도 없고요. 서장이 덮으라고 했을 때 최창식은 기쁘기도 하지만 복잡한 심정이었을 거예요.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최창식을 믿고 갈 수 밖에 없어요. 서장도 나쁜 사람이잖아요. 사건을 덮지 않으면 서장도 문책을 받아요. 그러니까 그 순간 최창식은 또다시 흔들리면서 타협하는 거고요. 공식처럼 그때 이런 표정을 이런 식으로 짓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연기하는 방법을 몰라요(웃음). 그렇게 하는 배우가 있을까요?
최창식이 원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누가 누구를 쏩니까. 심정 같아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쏘고 싶겠죠. 최창식이 어떤 명목으로 범인을 가해할 수 있겠어요. 동료를 죽였다는 이유로 범인을 가해할 수 있나요? 범인의 가정과 국가를 흔든 최창식에게 원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되도록 범인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최창식이 범인을 마주했을 때는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였거든요. 그리고 범인을 죽인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범인을 본인의 손으로 죽여요? <악의 연대기>에는 절대적인 가해자도 절대적인 피해자도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최창식이 가해자라고 생각해요.
최창식을 손현주가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악의 연대기>는 다른 영화가 됐을 것 같아요. 최창식은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악인으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전작들에서도 그렇고 어떤 악인이라도 악인으로만 보이게 하지 않는 것이 배우 손현주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하지만 <악의 연대기>에서 최창식이 가족 때문에 죄를 감췄다고 생각했어요. 최창식의 가장 큰 두려움은 가족이에요. 명예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죄를 은폐한 건 아니에요. 자신이 이대로 무너지면 아들과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가장 컸겠죠. 그래서 가족을 방패 아닌 방패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던 거예요. 백운학 감독님이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최창식이 죄를 숨긴 이유는 가족 때문입니다(웃음). 예를 들어 마약을 취급하는 사람이 다른 특별한 이유 없이 약에 취해서 약을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하는 놈이라면 반성 없는 악인일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기를 부여하죠. 제가 연기한 인물이 악인 같지 않다는 건 어쩌면 그 때문일 거예요. 최창식 같은 경우는 가족이 방패였던 거죠. 차동재가 사건을 아는 것보다 집에서 그 일을 아는 것이 최창식에게는 더 큰 문제거든요. 그런데 최창식도 과거에 범인의 가정을 흔들어 놓았잖아요. 그래서 영화의 제목을 <악의 연대기>라고 지은 것 같아요. 어쨌든 최창식의 방패는 가정과 아이라는 걸 끝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배우 손현주에게 가족은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결혼을 안했다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많이 찍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안돼요. 큰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고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큰 딸과 은연중에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서 딸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요. 그래서 15세 관람가 영화만 하겠다고 다짐했어요(웃음). <악의 연대기>도 등급 심사를 받았는데 폭력성은 다소 있지만 선정성은 없다고 나왔더라고요. 딸에게 가장 먼저 <악의 연대기>는 15세 관람가라고 이야기했죠. 아들에게는 넌 초등학교 6학년이라서 극장에서는 못 보니 나중에 집에서 재방송하면 보라고 이야기했어요(웃음). 어쨌든 배우인데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도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니고 집에 들어가면 아내와 아이가 있잖아요. 내 딸이 싫다는데 굳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에 출연하면 딸에게 친구들이 네 아빠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에 나왔냐고 물어볼 거 아니에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어른이에요. 성장이 얼마나 빠른데요. 중학생은 무섭고요(웃음).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는 아이들이 컸을 때 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기자간담회에서는 베드 신이 있는 로맨스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잖아요(웃음).
그 말이 기사화돼서 깜짝 놀랐어요. ‘손현주, 베드신 하고 싶어’라고 많이 뜨더라고요(웃음).
전에는 가정적이고 평범한 남자를 많이 연기했어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어두운 느낌의 역할을 많이 맡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조금 멀리 왔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색으로 치면 조금 칙칙한 쥐색 계통으로 많이 왔어요.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됐는지 생각해 봤더니 ‘추적자’부터인 것 같아요.
그렇지는 않아요. 전에는 가벼운 장르의 작품이 많이 들어왔는데 때에 따라 들어오는 작품이 달라요. 시기라는 것이 있나 봐요. ‘추적자’는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이었어요. 다른 드라마가 무산되는 바람에 급하게 제작된 작품이었거든요. 빨리 그리고 죽도록 촬영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드라마였어요. 동시간대에 MBC의 ‘빛과 그림자’와 KBS의 ‘빅’이 방영하는데 그 사이에 누가 들어가려 하겠어요. 그런데 ‘추적자’ 이후로 ‘황금의 제국’ ‘쓰리 데이즈’ <은밀하게 위대하게> <숨바꼭질> <악의 연대기>까지 4~5년 정도를 비교적 어두운 역할만 맡은 것 같아요. 일부러 그런 작품만 선택했던 건 아니에요. 전에는 엄마와 이모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웃음). 거리를 지나가면 장난을 치거나 예쁘다고 하면서 바람만 피지 말라고 타이르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역할의 색깔이 조금 칙칙해진 것 같아요. 이제는 엄마와 이모의 사랑이 그리워요(웃음). 지금 촬영 중인 <더 폰>도 스릴러거든요. 저도 모르게 너무 멀리 온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심정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치기는 해요.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심하다는 것을 또 새삼 느낍니다.
노래방에서 춤추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평소 음주가무를 즐기는 편인가요?
음주가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가끔 동료들하고 갈 때도 있어요. 일반 동료들하고 더 자주 만나는 편인데 방송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는 마동석, 고창석, 유해진, 장혁, 그리고 샤이니의 민호와 친해요. 술 한 잔 먹고 아주 가끔 노래방도 가는데, 가면 재밌게 놀죠. 그런데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소주 한 잔에 생맥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다들 헤어지는 분위기에요. 배우들을 만나면 연기 이야기를 하고, 일반 사람들을 만나면 일반적인 현황 이야기를 해요.
영화 속 최창식처럼 술을 마시면 아이들에게 전화를 자주 하나요?
전화는 자주 해요. 무얼 먹고 싶은지, 치킨 먹고 싶은지, 물어보죠. 아니면 남은 것을 싸가기도 하고요(웃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웃음).
‘일요일이 좋다- 런닝맨’ 예고편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이왕 출연한다고 했으면 열심히 놀다 와야죠. 열심히 안 놀려면 하지를 말아야죠. <악의 연대기>도 내가 하겠다고 선택을 했으니까 책임져야죠. 그런 차원 아닐까요?
‘일요일이 좋다- 런닝맨’에 출연해서 아이들이 좋아하겠어요.
좋아하죠. <숨바꼭질> 때문에 ‘일요일이 좋다- 런닝맨’에 처음 출연했을 때는 출연진 등 뒤에 붙은 이름표를 떼서 아이들에게 줬어요(웃음).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들이 이름표는 있으니 출연진의 사인을 받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유재석에게 사인 안 받으면 큰일 난다고 말했죠. 그런데 ‘일요일이 좋다- 런닝맨’ 출연진이 모두 사인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사인집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사인집을 갖다 주니 수고했다면서 좋아했어요(웃음).
2015년 5월 13일 수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