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잘 봤어요. 어떻게 100% 만족할 수 있겠어요(웃음). 하지만 영화는 제작진이 처음 의도한대로 만들어졌고 이야기의 중요하고 굵은 선들은 잘 표현됐다고 생각해요. 토끼가 너무 귀엽지 않나요? (웃음)
깜찍했어요(웃음). 그런데 토끼 장면은 많이 편집됐다고 들었어요.
토끼 장면뿐만 아니라 영화 초반의 판타지가 많이 편집됐어요. 저도 많이 편집됐고요(웃음).
<상의원>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이원석 감독의 전작 <남자사용설명서>를 봤나요?
봤어요. 그런데 <상의원>은 현대극이 아니어서 결정했어요(웃음). <상의원>이 현대극이었다면 더 많은 판타지 요소가 가미돼서 지금보다 더 감독님의 생각의 나래가 펼쳐졌겠죠. 감독님이 사극에 판타지를 얼마만큼 접목시킬 수 있을지가 궁금했어요. 판타지는 굉장히 매력적인 장치지만 용기가 있어야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극 중간에 조금씩 삽입되는 판타지를 좋아해요. 이상적인 것들의 표현이잖아요.
<상의원>의 판타지 장면은 마음에 들었나요?
처음에는 판타지 요소가 있는 장면들을 대사로 대신 전달하면 안 되냐고 말했죠(웃음).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너무 귀엽더라고요. 달나라 장면에서도 한석규 선배님이 지나가는 길가의 모습이 굉장히 재밌었어요. 이원석 감독님은 동심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쾌한 아이 같은 분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이원석 감독님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의원>의 판타지 요소는 의견이 갈리는 것 같은데 저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요.
<상의원>이 마지막까지 판타지가 이어졌다면 영화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해요. 하지만 제작진은 영화를 전, 후반으로 나누어 찍자는 의도였어요. 그래서 드라마를 설명하는 면에 있어서는 아쉬울 수 있어요.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면 <상의원>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느껴지더라고요. 공진의 희생이 관객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갈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영화 속에 담긴 인물들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서사의 짜임새가 느슨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감독님이 사람이 좋아요. 그래서 각각의 인물들에게 모두 애정이 있어요. 어느 한 캐릭터도 희생시킬 수 없는 거죠. 결과적으로 캐릭터의 폭이 조금 좁아졌지만 캐릭터가 가져가는 감정과 이야기 선은 흐트러지지 않고 잘 유지됐다는 점에서 만족해요.
시나리오를 봤을 때 공진에 가장 끌렸나요?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화끈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왕이 가장 끌렸어요. 왕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데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불만이 많잖아요. 그에게도 특별한 사연이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왕이 열등감을 표현하는 것과 돌석이 자유분방함을 표현하는 것은 달라 보였거든요. 하지만 사극을 처음 해보는 저로서는 공진이 어려우면서도 재밌게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
공진의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고 연기했나요?
공진은 천재라기보다 남들과 조금 다른 사람이에요.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분, 권력, 욕망 같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이상적인 인물인거죠. 남들과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요. 그런데 그런 공진을 밉게 봐서 왕이 죽여 버렸죠(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다르다’고 하면 우선 ‘틀렸다’고 말하고 바보, 4차원,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잖아요.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런 인물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해요. 그런 면에서 공진이 희생됐다는 것이 안타까워요.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고 관객들의 생각이 더 중요하겠죠.
일반적으로는 상대방의 액션에 응당 반응하는 방식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나를 모함하려 한다면 상대방에게 이유를 묻든지, 해명을 한다든지, 화를 내잖아요. 다른 작품에서는 그런 일관적인 액션-리액션을 통한 연기를 했다면 공진은 연기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어요. 만약 공진이 일반적인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황에 저항했다면 영화의 마지막 느낌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런데 촬영하면서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그들의 상황에 몰입해서 자연스러운 리액션이 꿈틀댈 때가 있어요. 순간순간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감독님이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아서 조절하려고 했죠.
공진은 과거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인물이에요.
공진에게는 특별한 전사가 없어요. 사실 공진에게는 전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인물의 과거를 알면 캐릭터 구축을 조금 더 탄탄하게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공진은 어디에서 왔는지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에요. 만일 공진이 과거가 알려진 인물이라면 사건이 터졌을 때 과거의 기억이 감정에 개입될 수 있어요. 과거 때문에 울분이 터지거나 한다면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 돼 버리잖아요. 그래서 감독님도 공진이 감정을 표현하는 걸 말렸어요. 공진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물인거죠. 지금까지는 상대방과의 소통을 통해 액션을 주고받는 연기를 했다면, 공진은 연기하는 입장에서 내가 연기한 캐릭터가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 물음표였던 거죠. 달나라 회상 신에서 공진이 ‘어침장님, 생각해보니까 어침장님이 말씀하신 옷이 더 아름다운데요?’라고 말하는 장면도 사실 어떻게 나올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니 슬프더라고요.
설명한대로 공진의 전반적인 모습은 이상적인 인물처럼 여겨졌어요. 하지만 공진이 감옥에서 돌석에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어침장님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는 보통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그 장면에서는 공진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접근한 건가요?
똑같은 고민을 했어요. 공진도 모든 상황을 알고는 있잖아요. 사실 감옥 신은 재촬영한 장면이에요. 그 대사는 좋아하는 돌석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말이었던 것 같아요. 공진과 돌석이 서로 손을 잡을 때 공진의 손을 보면 돌석처럼 상처가 있어요. 공진은 천재가 아니라 남들과 조금 다른 사람일 뿐이거든요. 남들처럼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그런 상처를 이겨내고 노력한 끝에 그런 사람이 된 거죠. 자신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죽음을 앞 둔 상황에서 말한 거예요. 그런데 저도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의 공진이 더 밝고 유쾌한 모습이었다면 어땠을까, 마지막에 그 대사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끌려가면서도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든지 하면서요. 하지만 어떻게 100% 이상적인 사람이 있겠어요(웃음).
영화 속 한복이 너무 예뻐요. 한복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조선시대의 시선에서 공진의 의상을 바라보면 더 새롭게 느껴질 거예요. 현대의 시선으로 의상을 바라보면 변화의 폭이 적지만 그 당시 시선으로 바라보면 색감이나 형태가 굉장히 새롭고 많은 변화가 있거든요.
초반에 공진을 소개하는 톤 조절은 감독님 몫이에요. 공진의 천방지축인 모습이 조금 더 드러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기생집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기생들 엉덩이도 만지고 술도 많이 마시는 것처럼 후반에도 캐릭터가 풍성하게 표현됐다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하지만 감독님이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았어요. 감독님은 착하고 순수한 분이에요(웃음). 그리고 공진 이외의 다른 사람 이야기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공진의 다음 이야기는 19금 영화에서(웃음).
공진이 중전의 옷 치수를 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긴장하는 중전에 비해 공진은 침착해보였어요. 공진은 중전을 사랑한 건가요?
아주 위험하고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죠. 공진은 중전을 사모하지만 그 당시에는 중전의 마음을 몰랐고 지금도 몰라요. 천민이 왕비를 사랑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중전에게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중전에 대한 아쉬움은 마지막 눈빛이나 한 번의 호흡 정도로만 표현하려고 했어요. 관객들에게만 살짝 들킬 정도로요. 그리고 감독님이 공진은 호흡을 너무 거칠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며 호흡에 관한 연기를 많이 주문했어요(웃음). 그 장면은 공진과 중전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방에 있는 장면이니 떨렸어요. 중전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왕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해보지 못했으니까요.
공진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인물인데 본인은 어떤가요?
실제로는 법을 잘 지키죠(웃음). 그런데 일할 때는 많이 자유로워지려고 해요.
돌석은 부단히 연습하는 인물인 반면 공진은 즉흥적인 천재성을 발휘하는 인물이에요. 본인은 어떤 스타일에 가깝나요?
전에는 우연을 바란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예술은 우연이 아니라 작업의 열매라고 하듯이 좋은 배우는 많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배우는 감정과 무의식을 다루는 직업이잖아요. 어렸을 때는 내 감정을 잘 몰랐어요. 상처받기도 하고 내 감정 추스르기도 바쁜데 어떻게 감정을 조절할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런 것도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연기하면서 열등감을 느낀 순간이 있나요?
항상 느끼죠. 솔직히 많아요. 연기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내가 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저 것이 내 것이라면 좋겠다, 열등감과 질투를 느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는 이제 지난 것 같아요.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려고 해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고요. 남을 부러워하거나 열등감을 느껴서 뭐하겠어요. 나를 스스로 바꿔 나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매번 변해요. 지금은 뭔가를 정립하고 정리하는 시기가 아니라 이것저것 도전하고 시도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서 진행이 더뎠던 것 같아요. 물론 <고지전> <초능력자> <집으로 가는 길>과 같은 작품에서 나름대로는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했지만요. 늘 발전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이번에는 <상의원>에서 이런 연기를 했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달라질 것 같아요.
감독님이 <남자사용설명서> 같은 현대극 시나리오로 또다시 캐스팅 제의를 한다면 출연할 건가요? (웃음)
<남자사용설명서>는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웃음). 하지만 지금도 감독님에게 시나리오가 있으면 달라고 이야기해요. 코미디가 가장 어려운데 대단한 것 같아요. 자기 것을 잃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감독이나 배우나 모두 똑같은 것 같아요. 저도 이제 제 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 것이 뭔지 늘 고민해요. 한시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 사람이니까 응원해주세요(웃음).
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나요?
나쁜 놈! 악역을 해 보고 싶어요. 하고 싶은 건 많죠. 로드 무비도 하고 싶고요.
2015년 계획이 있다면요.
<상의원>이 잘 돼서 내년까지 바람 타듯 쭉쭉 흥행했으면 좋겠어요. 부족한 면도 있지만 관객들이 사극에서 귀여운 판타지를 시도한 점을 예쁘게 봐준다면 나중에 더 좋은 영화들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