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웃음) 사실 주변에서 예쁘니까 해보라고 해서 연기를 처음 배우게 됐던 것 같아요.
그때가 언제쯤이에요?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본인 스스로 배우 한 번 해 볼까, 생각은 안 해봤나요?
그때 마침 흥미 있는 일이 없어서 그냥 해봤던 거예요. 사람들에게 관심 받는 것에 흥미를 못 느꼈어요. 물론 사람이니까 당연히 사랑받고 싶고 누군가에게 관심 받고 싶은 건 있었지만, 연예인이 되고 싶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주변의 권유로 연기를 배우게 됐지만 어찌됐건 전공으로 선택할 만큼 매력이나 재미를 느꼈던 거죠?
그죠. 남들에게 나를 드러내는 걸 굉장히 꺼려해요. 고등학교 때 연기를 접하고 대학교에서 더 깊이 배우게 되면서 사실은 저를 온전히 드러내야 된다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 과정 속에서 저도 많이 변하더라고요. 많이 밝아지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제 스스로가 열린 사람이 되니까 그런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직까지 자신을 드러내길 꺼려하는 성향들이 남아있겠네요.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죠.
그런 성향이 배우 활동을 하는데 있어 영향을 미치진 않던가요?
연기는 나랑 진짜 안 맞는 것 같다, 연기 못하겠다, 몇 번 씩 관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학교 다니면서도 그랬고, 학교를 졸업하고도 그랬고요. 그러면서 다시 일어서고 또 작품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제 마음가짐이 변하더라고요.
가장 큰 시점은 대학 졸업 후였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나이도 어렸고, 영상원에서 같이 작업하자는 제의도 많이 받아서 거만한 부분이 있었어요. 거만하다기보다 배고픔이 없었달 까요. 그런데 졸업을 하고 나서는 매일 매일이 낭떠러지더라고요(웃음). 항상 저 스스로 한계를 정해놨던 것 같은데, ‘노란 달’이라는 연극을 하면서 한계를 부수는, 나에게 한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한계를 넘어서 연기를 했을 때 더 큰 희열을 느꼈나요? 아니면 그냥 새로운 경험 정도였나요?
잘 모르겠어요. 희열이라는 단어를 별로 안 좋아해서(웃음). 물론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했겠지만, 그냥 계속 연기해도 된다고 상 받는 느낌이었어요. 희열? 분명 희열이었겠죠. 근데 그 단어를 쓰고 싶진 않아요(웃음).
희열이라는 단어에 개인적인 사연이라도? (웃음)
희열, 열정, 이런 단어를 별로 안 좋아해요. 그렇다고 열심히 안 하는 건 아니에요. 제 입으로 그렇다고 표현하는 게 싫은 거죠(웃음).
활동을 꾸준히 해왔지만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TV 드라마나 상업영화에서는 활동이 없었어요.
아예 없었던 것 같아요.
본인 의지였나요?
제 의지 없이 이렇게까지 될 수 없긴 하죠. 타고난 성품, 성향이 있으니까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했고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이제 활동 영역의 확장에 대해서도 마음이 열리진 않던가요?
그런 것 같아요. 성공하고 싶고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보다는 계속 일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보니 다른 영역에도 관심을 갖고 싶은 거죠. 근데 또 하다보면 욕심이 나겠죠. 연기도 더 잘하고 싶고, 더 열심히 하고 싶고, 더 재밌고 좋은 역할을 하고 싶고, 그런 욕심은 생길 것 같아요.
<셔틀콕>은 어떤 이유로 출연하고 싶었어요?
연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해서 토익 공부하던 시기였어요(웃음). 항상 어떤 일을 했을 때 행복할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데, 예를 들어 어찌어찌 취직을 해요. 그래서 월급을 받아요. 몇 개월 지나면 뭐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연기해야겠다, 생각하고 처음 한 작품이 남궁선 감독님의 <남자들>이었어요. 그 영화를 본 다른 분의 추천으로 <셔틀콕> 오디션을 보게 된 거고요. 그래서 에너지가 엄청 넘치고 의욕이 높을 때였죠(웃음). 물론 지금도 나름 열려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바닥에 나뒹굴어져 있다가 다시 일어날 때니까요.
감독님은 어떤 이유로 공예지라는 배우를 선택했다던가요?
일단 남자 주인공으로 주승이가 정해져 있었고 주승이에 맞는 톤? 둘의 화학작용이 잘 일어날 수 있는 배역을 물색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UFO>에서 주승이를 봤는데 힘이 강한 배우라는 생각을 했어요.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한 시간이 넘는 영화를 끌고 갈 수 있을까. 그때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감독님도 그렇게 얘기 했어요. 잘 맞을 것 같다고요.
제가 도망치는 역할을 너무 많이 했어요. ‘노란 달’도 도망가는 이야기고, <경>도 로드무비고 도망가는 역할인데 또 도망가는 역할이네(웃음), 처음에는 그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정말 공교롭게 그러네요(웃음).
처음에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잘 안됐어요. 좀 화도 났고요. 하지만 보면 볼수록 안됐더라고요.
은주 캐릭터도 그렇지만, 공예지라는 배우도 뭔가 사연이 있고 미스터리한 느낌이 있어요. 신비한 느낌이랄까. 이와이 슈운지 영화 속 여주인공 같은 느낌이에요.
연기를 그만두려고 하면서 미술 하는 언니에게 고민 상담을 했어요. 보통 연기하는 친구들은 끼도 많은데 난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서 드러내는 것도 힘들다고 했더니 언니가 그걸 이겨내려는 힘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그런 모습이 공존하는 것 자체가 더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그런 배우들도 있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저도 모르게 좀 힘이 나더라고요. 그전에는 난 안 돼, 이러고 있었는데 말이죠.
은주의 캐릭터 설정이나 연기하는데 있어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요?
세 인물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장 방어적이고 동시에 가장 공격적이라고 생각했고요.
민재에게 있어 은주는 이복누나면서 첫사랑의 대상이에요. 첫사랑으로서의 모습이 투영된 장면은 동영상으로 촬영된 영상 속 은주고요. 현실의 은주와 영상 속 은주의 모습은 어떻게 표현했나요?
누구나 첫사랑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주관적이잖아요. 민재의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시공간이 떨어져 있으니까 현실의 은주도 많이 변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렇다면 은주가 민재에게 갖고 있는 감정의 실체는 무엇이었나요?
민재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물론 인간적인 호감이 있을 수 있고,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울 순 있죠. 그래서 헛갈릴 순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을 것 같아요.
남매로서의 관계는 어떻다고 설정했나요?
어느 정도 거리감은 확실히 있었을 것 같아요. 부모님이 재혼해서 청소년기에 만나게 됐잖아요. 명확하게 남매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거리감은 확실히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친구 같고, 그냥 옆집 동생 같고, 또 학교 친구 같은 느낌이었을 것 같고요.
남자들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고요, 그냥 그 상황이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은주는 멀리 못 내다보는 성격인 것 같아요. 내가 나중에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행동하지 말아야겠다, 이런 계산을 하기보다 자신의 삶이 먼저인 거죠. 지금 삶이 낭떠러진데 남을 신경 쓸 여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일단 사랑받고 관심 받는 게 더 중요한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주변에서 첫사랑의 이미지가 연상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나요?
전혀요(웃음). 시골에서 자랐어요. 워낙 말괄량이 기질이 있어서 장난꾸러기였어요.
조용하고 내성적이어서 뭔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진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약간 푼수 같은 면도 있어요(웃음).
연기할 때 자신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듯 실생활에서는 그런 편이 아니었나보네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 스스로 가면을 만드는 법이 따로 있는 건데, 그 가면을 벗어야 되는 문제니까. 사실 연기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건 또 다른 가면이니까요.
그럼 지인들이 봤을 때 푼수 같고 털털한 느낌이 강하다는 거죠?
네 맞아요. 털털한(웃음).
극중 막내 동생 은호의 “성깔 있게 생겼는데 얼굴은 예쁜 누나”라는 대사가 있어요. 그 대사는 예지씨가 캐스팅 되고 쓰인 대사인가요?
잘 모르겠는데, 아마 전에 있었을 걸요? 처음에 감독님은 예쁜 배우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대사로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느낌도 색다를 것 같아요. 캐릭터지만 어울리는 것 같나요?
예쁘다는 것에 수긍하기가 창피한데요.
그건 제가 수긍할게요(웃음).
(웃음) 성깔 있는 건 비슷한 것 같아요. 평소에 고집이 있어요.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어서 일단 화가 나고 왜 화가 났는지 생각을 한 다음에 당사자에게 찾아가서 이래서 화가 났다고 얘기하는 성격이거든요.
화났다고 바로 지르진 않네요(웃음).
바로 질렀는데, 그러면 지더라고요(웃음). 화가 난 데는 이유가 있거든요. 아무튼 성깔은 있는 것 같아요. 화가 나고 하면 잘 못 참는 것 같아요.
그냥 돈 때문에 왔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왜냐면 민재도 먹고 사는 게 힘들 걸 뻔히 아니까요.
그 전에 통화로 은주가 민재에게 “니가 그런 식이니까 너한테 문제가 있어서 떠난다고 생각하지는 않냐”고 말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래서 민재의 감정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벚꽃 축제 갔다가 민재가 같이 자고 싶다고 얘기 했으니까 아마 그것 때문이겠죠.
은주는 명확하게 거절을 한 건가요? 뭔가 애매한 반응을 보여서 민재가 오해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한데요.
결국 딱 잘라서 거절을 못한 거죠. 그런 사람들은 보통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거든요. 결국 나중에 더 큰 상처를 주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상처주고 싶지 않은 거죠. 순간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그래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겠지만 알아서 이해하고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난 충분히 표현했다고 이기적으로 생각했을 것 같아요.
민재가 은호를 트럭 뒤에 놓고 가잖아요. 민재가 떠나고 은호를 발견했을 때 은주는 어떤 상태였을까요? 체념하고 은호를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전혀 아니죠.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을 것 같아요. 뭐지?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약간 정신이 들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빨리 보내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민재가 다시 마트에 와서 창 너머로 은주와 시선이 마주치잖아요. 그때는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싸우고 난 후잖아요.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요. 그때는 은주도 어떤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계속 자기 안에 갇혀서 생각을 만들어놨을 것 같아요.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나 돈을 다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연민에 계속 빠져서 자기 생각밖에 안했을 텐데 민재가 온 거잖아요. 그 상황 자체가 클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한 행동들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테고, 뉘우쳤다기보다 내가 좀 잘못했나? 그 정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렇다고 민재가 해코지를 할 것도 아니니까. 돈은 다 썼고 그걸 민재도 알았고 그래서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민재가 끌고 가는 영화다 보니 그 안에서 민재의 감정을 도와주거나 살을 붙여 주는 연기잖아요. 중심이 되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맞춰 가는 연기.
제가 돋보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한편으로는 부담이 덜 되요. 대사를 주고받을 때도 민재의 대사에서 많이 찾으려고 했어요. 민재가 이렇게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은주가 이렇게 행동을 했다, 그런 식으로 많이 찾아갔어요.
표현을 안 하는 연기가 편했는데, 어쩌면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어요. 근데 지금은 그런 건 없어요. 사실 더 표현하고 싶어요. 더 재밌고요. 사람이랑 만나는 것도 똑같은 것 같아요.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보이는 걸로 사람들은 해석하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표현하고 드러내는 연기를 더 하고 싶어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셔틀콕>은 한창 작품을 하고 싶어 할 때 만난 작품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좀 충족되는 부분이 있었나요?
개인적으로 은주를 이해하면서 스스로도 많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뭐라고 설명을 해야 될지 어렵지만, 제가 이해를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지금 다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웃음), 처음에 은주를 연기하면서 이해가 안 되니까 조금 힘들었어요. 은주란 인물을 만나면서 제 삶도 좀 더 열린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독립영화, 저예산영화, 단편영화에서 주로 활동을 했는데 앞으로는 다른 영역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할 계획인가요?
그건 모르겠어요. 제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일단 지금처럼 활동할 거예요. 근데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지금 알바를 하고 있거든요. 알바 하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서른이 다 되가는데 알바를 평생 할 순 없잖아요. 연기하는 친구들끼리 이야기해요. 이제 우리 어떡하나, 연기를 계속하려면 알바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카페에서 일하지만 더 나이 들면 저 뒤에 있는 식당에서 일해야 한다고(웃음). 연기만 하면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면 정말 너무 좋은 일이잖아요.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영역을 더 넓히고 싶은 거고, 그래서 욕심이 나는 거죠.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들이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네요. 앞으로 어떤 배우, 어떤 연기를 하고 싶나요?
저만의 색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긴 해요. 변신이라는 말은 믿지 않거든요.
한 남자배우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배우들에게 작품 할 때마다 연기 변신했다고 이야기하는데 배우가 무슨 로봇이냐고(웃음). 맞는 말이죠.
그 사람의 바탕이 그대로인데 크게 변할 순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공효진씨나 정유미씨처럼 자신의 색을 계속 유지하면서 작품을 선택할 때도 자신의 철학과 만나는 부분을 고려하거나 다소 맞지 않더라도 작품에 들어가서 고집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쪽으로 풀어가고 싶은 생각은 많아요(웃음).
2014년 4월 22일 화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사진_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