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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길을 걸어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 <윤희> 최지연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 서정환 기자 이메일

배우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하네요.
어렸을 때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 나갔어요. 초등학교 때인데, 혼혈 같다는 얘기도 듣고 당시에는 예쁜 편이었어요. 한복입고 나갔는데 기립박수 받았고 입상을 했어요. 그때부터 항상 그쪽 세계에 관심은 있었던 것 같아요.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돌아와서 시작을 했어요. 그렇지만 시작을 한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요. 프로필 사진을 찍고 에이전시에 돌리고 그렇게 CF를 찍게 됐어요. 그러다 기획사에 들어가고 한두 번 오디션도 봤고요. 한 번은 오디션 장에 남들보다 일찍 도착해서 A4 용지 4장 분량의 대본을 받아 화장실 구석에서 외우기 시작했어요. 오디션 볼 때 처음에는 대본을 들고 연기하다가 집중이 되면서 대본을 내려놓고 대사를 쳤어요. 대본을 안보니 카메라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감정이 더 잘 나오더라고요. 슬픔을 잘 쏟아내서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고, 그렇게 자신감과 교만을 안고 데뷔를 했던 것 같아요.

그쪽 세계에 관심은 있었지만 일을 하기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준비하거나 그랬던 건 아니었나봐요.
전혀 없었어요. 단지 TV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면 뭔가 꿈틀대는, 찌릿한 느낌을 받았어요. 시기나 질투는 아닌데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운명적으로 뭔가 끌렸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관심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프로필 사진을 찍어서 돌리고 연기학원을 다니면서 길이 열린 거지, 그 전에는 전혀 액션을 취하지 않았어요.

데뷔 초에는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그 이야기 너무 많이 들었어요(웃음). 좋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안타깝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시죠. 세대가 바뀌어도 활동 안하다 나오면 유망주다, 중고 신인이다,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다못해 신비주의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웃음).
캐릭터 디자인, 삽화, 연출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연기에 큰 관심이 없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만약 연기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벌써 관뒀을 거예요. 다른 여러 일들을 한 건 예술이 하나로 통한다는 말처럼 그림, 음악, 춤 등에도 관심이 많았고, 하면 곧잘 한다는 이야기를 적어도 한 명 이상에게는 들어서 계속 하게 됐어요. 단편이지만 연출도 두 작품을 했고 상도 받아서 감독 할 거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연출은 감히 제가 하겠다고 쉽게 말할 분야는 아닌 것 같아요. 도전에 의미가 있는 거였어요. 물론 극도의 고통과 극도의 환희를 동시에 느끼며 왜 연출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앞으로도 도전은 하겠지만 함부로 연출을 하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어요. 반면 피사체가 됐을 때 더 짜릿한 게 있는 것 같아요. 배우로서 주연도 해봤고,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들이 나왔지만 연출에 비해 다작을 했고 10년 이상 몸담았기 때문에 배우에 대한 애착은 확실히 더 크죠.

외모만으로도 스타가 될 자질이 충분했고, 연기도 신인치고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감이 더 컸고 관심 있게 지켜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활동이 뜸했어요.
첫 번째는 운과 타이밍, 두 번째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는데 제가 봐도 답답하고 폐쇄적이었어요. 데뷔 초에 연기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게 독이었던 것 같아요. 교만도 있었고요. 내가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겸손한 마음으로 감독님께 여쭙고 상의하고 그런 과정이 없었어요. 신인에게 파격적으로 이렇게 큰 배역을 줬는데 한 번도 와서 상의한 적 없다고 감독님이 화를 낸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회사가 힘든 시기와 맞물려 회사에서 신경을 못 써주다 보니 위축된 것도 있었고요. 한번 위축되기도 했고, 성격이 활발한 편도 아니라 경계도 많아서 주변에서 섭섭해 하셨죠. 배우들하고도 그랬고요. 사회생활의 경험과 기술이 전혀 없었던 거죠. 말을 안 하니까, 여자들은 새침때기로 보고 남자들은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인간적이지 않았던 거죠. 저를 따뜻하게 바라보지 않았어요. 그러니 일도 그렇게 풀리는 거고요. 그 부분이 컸던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죠. 그동안 청순, 신파에나 어울릴 이미지였는데 <잘못된 만남>을 하면서 그 틀을 깨는 과정을 겪었어요. 외롭긴 했지만 남들이 날 어려워하거나 얼음공주처럼 보는 시선에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캐릭터 때문에 틀을 깨야했고,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성격이 바뀌고 사람들이 날 대하는 시선도 바뀌었어요. 무엇보다 연기의 폭이 넓어져서 좋았고요.
주변에서는 기대주라 평하지만 일은 마음처럼 잘 안 풀리는 상황. 그 과정을 오랜 기간 겪으며 심정이 어땠을까요.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힘들었을 텐데요.
이 나이 먹도록 엄마에게 계속 신세를 졌어요. 엄마는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거든요. ‘내가 거름이 돼서 네가 꽃을 피우면 되겠지’라는 말씀까지 하셨으니까요. 저 때문에 희생을 많이 하셨고,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외국어에 소질이 있고 승부욕도 있어서 연예인이 아니어도 먹고는 살았을 것 같아요. 1등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수준의 성과는 이뤘을 것 같아요. 인간은 노동을 하고 돈을 벌고 삶을 영위해야하는데, 엄마 등을 파먹는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우울증도 왔고요. 그게 가장 힘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정시에 나가서 일 하고 퇴근하고, 힘든 것도 있지만 그래도 기운내서 그렇게 또 하루를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저는 그날이 그날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연기는 하고 싶은데 기회는 없고 인간답지 않은 잉여가 된 기분. 그렇게 우울증도 오고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하기 쉬웠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나요?
한 번도 안 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요즘 많이 꺾이긴 했지만(웃음). 13년 동안 좌절도 했지만 한 번도 그 생각을 놓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희망으로 버텼어요. 유망주, 기대주라는 이야기만 계속 듣다보니, 그래서 더 포기 못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데뷔 때도 연기 잘한다는 소리 들었는데,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지금은 예쁜 배우들도 많고, 연기 잘하는 친구들도 많지만 포기가 안 되는 거예요. 다른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데도 포기가 안 되는 거죠.

배우 최지연을 자주 보고 싶지만 오히려 예능이나 여행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재미가 있고 관심이 있어서 출연한 건가요, 아니면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출연한 건가요?
후자에 더 가깝다고 봐야겠죠. 2005년에 ‘스타골든벨’ 고정도 하고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 활동을 그만둔 이유가 연기를 하고 싶어서였어요. 항상 예능은 두려움이 있었어요. 예능이 싫다거나 편견이 있는 게 아니라, 패널로 잠깐 출연해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였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영화나 드라마로 돌아오기 쉽지 않은 상황이 올 수도 있어서 두려웠던 거죠. 하지만 출연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알게 모르게 순발력도 생겼고, 내 안에 웃기는 재주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고, 도움이 된 부분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마음은 연기만 하고 싶어요(웃음).
<윤희>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저예산이고 흥행과는 거리가 있는 영화지만 잘 소화하면 연기력을 입증 받을 수 있는 캐릭터인 것 같다고 회사에서 시나리오를 건넸어요. 읽어보니 쉽진 않아보였어요. 그래도 내가 잘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윤희라는 캐릭터 밖에 안보였고, 스토리도 좋았고, 망설일 이유는 없었던 것 같아요.

스크린 첫 주연작이죠?
원톱이니까 그런 셈이죠.

엄청난 경쟁의 오디션을 통과했다던데요(웃음).
아니에요(웃음). 처음에 감독님은 윤희 이미지를 아줌마로 생각했대요. 조감독이 최지연이라는 배우를 언급했을 때, 감독님이 생각하던 이미지는 전혀 아니었던 거죠. 리딩을 했는데, 북한 사투리도 안 되는 상태라 감정 위주로 연기했고 거기에 감독님이 꽂힌 거예요. 제가 흘리는 눈물은 다른 여배우들과 다르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캐스팅이 된 거죠.

윤희는 탈북자 캐릭터에요. 외모도 그렇고 북한말도 그렇고 캐릭터의 외적 표현은 어떻게 준비했나요?
같이 출연한 황석정 언니의 아는 분을 소개 받아서 두만강 인근 지역의 사투리를 배웠어요. 그 전에는 TV에서 본 북한 아나운서의 느낌으로 성경책을 읽으며 연습했는데, 실제 그 지역 분을 만나 고쳤죠. 외적인 건 최대한 안 꾸미고 안 하는 것 밖에는 별다를 게 없었어요(웃음).
윤희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있어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대본에 충실했고,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미흡하고 부족하더라도 감독님이 저를 믿고 맡겨준 이유는 제 연기의 진정성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포인트를 뒀다면, 너무 우는 장면이 많으니까 보는 사람들이 면역이 될 수 있어서 각 장면마다 눈물에 색을 넣는 거였어요. 그래도 감정이 터져야 되는 장면은 거울 신과 마지막 법정 신이었어요. 거울 신은 부담이 좀 됐어요. 그 전까지 감정을 잡아왔으니 여기서 터져줘야 하는데, 막상 터트리려고 하니까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나마 그거 하나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잘하는 걸 못하게 되면 공포가 오거든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자존심은 있어서 차마 못 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고. 촬영 들어가서는 그동안 겪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억울했던 감정을 터트렸어요. 소스가 제일 어색해요. 편집도 그렇고요. 법정 신도 그렇고 두 장면이 아쉬워요.

거울 장면도 그렇고 법정 장면도 앵글과 편집이 배우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게 만들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에요. 거울 장면은 윤희의 감정 자체가 표현이 안 된 건 아니지만 면역 효과가 있어서 중요한 장면임에도 그 감정이 효과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던 것 같아요. 반면, 법정에서 딸을 끌어안고 우는 모습에서는 감정이 폭발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거울 장면은 최지연의 감정을 표현한 거였고, 법정에서는 윤희의 감정을 표현한 거였어요. 거울에서는 억울한 게 최지연이 억울한 거였는데, 그래서 윤희의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거울 장면과 법정 장면의 차이라면 그 부분이 포인트였을 거예요.

<윤희>를 작업하며 느끼고 얻은 것들이 있다면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만족스러워요. 진정으로 진심을 담아서 연기했으니까요. 현장 스탭, 배우들도 저의 부족함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래도 그 순간 제가 진심으로 했다는 건 알아준 것 같아요. 연기를 하는 목적이 부와 명예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서 피가 끓어서 하는 것도 있거든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서로 그런 것들을 느낀 거죠. 원톱 영화다보니 배우로서 제가 선장인 셈이잖아요. 처음에는 인정을 안 해주다 점점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바뀌니 정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영화인 거예요. 이 영화하길 잘했다, 13년 동안 어눌했고 안타까움도 많았지만 그냥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배우로서 성숙해진 부분도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죠. 미완성이지만 이제야 넘어야할 한 고개를 넘은 느낌이에요. 아직 부족하지만, 제가 저를 조금은 배우로 보게 된 것 같아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대한민국에 최지연이라는 배우가 있었지, 이런 생각이 든다면 굉장한 게 아닐까 싶어요. 어마어마한 거죠.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사진_권영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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