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액션이라는 장르에 크게 기대치가 높았던 입장은 아니었어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하는 장르는 맞지만, 그와 더불어 탄탄한 드라마나 휴머니즘 같은 것들이 밀도 있게 같이 다뤄진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관객입장에서 한국 액션영화를 볼 때 그런 부분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선택할 때 안 해봤던 장르라고 선택하진 않아서 액션이란 장르에 큰 관심이 없었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로 그동안 거절을 했던 거죠. 원신연 감독님을 뵙고 난 다음에 감독님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제가 우려하는 부분을 충분히 불식시켜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동안 제대로 된 액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변신을 위해서 한 거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사실 그런 의미에서 <용의자>를 선택한 건 아니었어요.
예외적인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제대 후 새로운 이미지, 강인하고 남성다운 이미지를 어필하기 위해 액션영화를 많이 선택하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제대 후에는 로맨틱 코미디와 휴먼 드라마를 선택했고, 이후에 시간이 지나 액션을 선택하다보니 의도된 이미지 변신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특별히 액션을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는 어떤 면에서 공유를 끌어당겼는지 그래서 궁금했던 거죠.
가장 간결하고, 가장 정확하게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원신연 감독이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에요. 제가 겪은 감정을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네요. 원신연 감독님의 작품을 좋게 봤거든요. <세븐데이즈>보다 <구타유발자들>이 더 좋았고요. <세븐데이즈>도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던 영화였잖아요. 그걸 이만큼 끌어올렸다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충무로에서 원신연 감독님은 좋은 평들을 많이 받았는데, 그런 것들이 또 저에게 다 쌓여서 믿음의 토대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대하고 액션영화를 가장 많이 받았어요.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군대 갔다 왔으니 상남자 냄새 나는 영화 한 번 해야지, 뭐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그렇게 와 닿지가 않았어요. 굳이 왜 그렇게 해야 하나 싶었고요.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소속사 대표에게 속된 말로 ‘이거 진짜 개고생 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출연을 결정한 다음날부터는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았어요. 절 마음대로 쓰십시오(웃음). 한 해 동안 생활의 전부가 <용의자>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었던 것 같아요. 아침에 눈 뜨면 공복에 유산소 운동을 하고, 끝나고 나면 그 맛없는 닭가슴살을 꾸역꾸역 먹고, 점심 때 액션스쿨에서 반나절을 연습하다가 또 시간이 되면 닭가슴살을 먹고(웃음). 이야기하면서도 왜 이렇게 슬프지? (웃음) 저녁에는 트레이너와 PT를 하고요. 뭐 거의 몸을 빚었죠. 마지막 한 달은 운동의 개념이 아니라 몸을 디자인 하듯이 빚었어요. 늘 맥주 한 잔을 상상하며 그렇게 한 달 반을 보내고 촬영에 들어갔고, 총 3개월을 촬영하면서도 그런 생활을 반복했어요. 운동을 많이 했던 사람이지만, 욕구를 억제하면서까지 운동을 하는 건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단기간의 다이어트나 몸만들기를 그렇게 선호하진 않아요. 그런데 지동철이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전에도 운동 좋아하고 몸 좋은 배우로 잘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용의자>에서는 엄청난 몸을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영화를 봤을 때는 우락부락한 느낌이 아니어서 열심히 준비했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그런데 어깨 탈골 장면에서 평소 보도 못한 잔근육들이 튀어나오고 움직이는 걸 보면서, 저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놀랐거든요.
어깨 탈골하는 장면은 한 5초 동안 나오더라도 그 한 컷이 이후 동철의 모든 액션을 지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현장에 트레이너도 따라왔어요. 한 번도 현장에서 트레이너랑 운동한 적이 없었거든요. 매달려 있다가 세트 바꿀 때 내려오면 트레이너가 옆에서 시키는 대로 또 펌핑하고 그랬어요. 일시적으로 최고치로 팽창시키기 위해서요. 힘을 쓸 때 짠다고 표현하는데, 짤 때 미세한 힘줄이나 근육의 뒤틀림 같은 것들이 디테일하게 보여야했어요. 내가 멋있어보이고자, 식스팩을 보여주고자 하는 신이 절대 아니었어요. 사활을 건, 사람 같지 않은 외형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필요악이었고, 사람들이 봤을 때 숨이 멎었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요구도 있을 정도로 폼을 잡기 위한 신이 아니었어요. 어떤 움직임이 필요했어요. 잔인한 움직임이.
CG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로 압도적이었어요.
감독님이 동철의 가슴과 등의 움직임이 CG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거예요. 억울했어요. 어떻게 준비한 건데(웃음). 참고로 뼈 튀어나온 것만 CG에요(웃음). 촬영하면서 진짜 힘들었어요. 목은 조여 오는데 힘은 모든 근육을 다 써야하니까요. 한 테이크 가고 난 다음에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거의 반나절을 찍었어요. 그래도 결과는 만족스러워요.
동철은 혼자서 움직이는 인물이라 사실 대사도 많지 않고 다른 인물들과 부딪히는 신도 많지 않았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같이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포스터에 저 혼자 나오고 원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불편해요. 모든 인물들이 보이지 않게 카메라 안에서 다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이 저에게 굉장히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힘들어도 유쾌할 수 있었고요.
촬영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되다보니 예민해질 수도 있잖아요. 의견 대립이 있거나 트러블이 생긴 적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원신연 감독님과도 한 번도 없었고요. 약간 투정? 반 애교? 그렇게 현장에서 스탭들 웃으라고 감독님에게 덤비는 척 하는 건 있었죠(웃음). 그만큼 배우들이 설득될 수밖에 없게끔 감독님이 현장에서 보여주셨고, 스탭들 또한 배우들이 몸 고생 많으니까 혹여나 다치고 힘들까봐 배려를 너무 많이 해줬어요. 너무 고마워서, 늘 죽겠지만 앞에서 죽겠다는 말을 못했어요. 스탭들도 똑같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서로 웃겨주고, 웃고, 농담 따먹기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동철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있어 액션만큼 중요했던 것이 겉으로 많이 드러나진 않지만 기저에 깔려있는 감정이었을 것 같아요.
의외로 도움이 된 게 다이어트였어요. 다이어트를 혹독하게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눈빛이 변해요. 기본적인 욕구를 억지로 억제시키기 때문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한다든지 뜨지 않았던 눈을 뜨게 되더라고요. 이번에 확실히 실감을 했어요. 이번 다이어트는 단순히 몸을 만들기 위한 다이어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도 뭔가 깊어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 부분이 분명 지동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간과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사실 다이어트가 단순히 가슴과 배의 근육을 만드는 것보다 여러 가지로 훨씬 큰 의미가 된 거죠. 대사가 없는 대신 눈이나 혹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싸우는 몸짓 하나하나에서 처절함이 느껴졌으면 했어요. 그렇게 되길 바랐고, 그렇게 되어야만 했고요. 그것이 지동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감독님도 그냥 멋있게 잘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생존과 본능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은 느낌이 있어야 몰입이 되고 감정이 관객들에게 잘 전이될 거라고 하셨고요. 영화를 볼 때 그 부분이 조마조마했어요. 관객들이 지동철에게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면 제가 이 영화를 한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지동철의 감정이 제 몸을 통해서, 제 눈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랐던 거죠.
말씀하신대로 신경 쓸게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제가 가진 부담에 비해 막상 촬영 들어가면서부터는 전자에 가까웠어요. 신경이 많이 쓰이고 부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내가 움직이고 있을 때는 심플했어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건데, 그것도 원신연 감독님의 공으로 돌리고 싶어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도가니>는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거든요. <용의자>는 자연스럽게 처절함이나 여러 가지 감정들이 제 몸에 배어들었던 것 같아요.
아마 <도가니> 때처럼 생각을 많이 하고, 지동철의 감정과 정서에 천착했다면 오히려 지금처럼 표현이 안 되었을 것 같아요.
그랬을 것 같아요. 속된말이지만, 판 깔아주는 사람의 중요함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거겠죠. 판을 잘 깔아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배우도 그 판위에서 캐릭터를 잘 구현하고 연기로 표현해내야 하고, 그런 부분들이 잘 맞아야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영화의 흥행에 대한 결과가 아직 남아있는 상황이지만, 사실 저는 이미 재미를 다 봤어요. 감독님께 액션 장르에 대해 한 수 배운 것도 있고, 또 남자 선배들이랑 여럿이서 영화를 찍은 적도 없었고요. 과정에 있어서는 모든 것들이 저에게 너무나 만족스러운 시간이어서 이미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진짜 좋았어요. 그게 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을 만나는 것도 연, 배우들끼리의 호흡도 다 연인 것 같아요.
배운 거라기보다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걸 이번 작품을 통해서 느끼게 된 게 있어요. 제작비나 규모가 큰 영화를 처음한거잖아요. 어쨌든 블록버스터인 건 맞으니까요. 영화 찍고 난 다음에 영화의 흥망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너무 하다싶을 정도로. 스코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배우로서 이 영화라는 틀 안에서 얼마만큼 좋은 과정을 겪었느냐를 따지는 사람이었어요. 찍고 난 다음에는 배우 손을 떠난 거라 생각했어요. 솔직히 속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게 배우의 몫인 거고, 이후는 마케팅 하는 사람의 몫이고 제작사, 배급사의 몫이라고 약간 모질게, 냉정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용의자>는 좀 달라요. 그 좋은 과정을 제게 선사했던, 연을 맺은 백 명이 넘는 스탭들과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같이 뒹굴면서 느낀 건, 그들에게 영화 한 편은 바로 다음 영화와 이어지는 거더라고요.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깊게 했어요. 결국 그들에게는 흥행 결과가 그 다음을 얘기해주는 척도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뭐 저도 포함인거고요. 그런 부분에 대한 이해? 좀 더 넓게 생각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처음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잘 됐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게 생기더라고요.
앞으로 계획이나 활동 방향이 있다면요.
참, 작품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많이 하고 싶은데, 하다 보니 <용의자>로 2년을 보냈네요. 그래서 2014년에는 작품을 많이 하고 싶은데, 사람 성향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동시에 뭘 잘 못해요. 그리고 하나를 하고 난 다음 그것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요.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재밌는 모습들을 많이 보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어떤 장르가 특별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서른다섯에서 마흔 사이에 멜로를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에 처음 해봤어요. 몸에서 신호를 줘요. 갑자기 소주 한 잔이 땅기는 것처럼, 그런 감이 와요. 성인 멜로를 또 해본 적이 없거든요. 안 해봤던 장르에 대한 개척이라기보다는 이상하게 왠지 몸이 젖고 싶은 느낌이랄까요. 이런 느낌이 왔을 때 하면 더 좋잖아요. 근데 작품을 만나야죠. 그렇다고 제가 시나리오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웃음).
사진_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