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괜찮았어요. 그래서 다행이고. 기대 이하였으면 오늘 인터뷰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할 얘기도 좀 있고, 변명도 할 수 있는 것 같고요. 아쉬움이 조금 있으니까요.
‘유아인다운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빤하다는 얘기죠? (웃음) 감사하다! 잘 보셨네요.
‘유아인다운 영화’라는 게 어떤 의미 같나요?
나쁘게 생각하면 유아인이 보여주는 빤한 영화라는 의미일 테고 좋게 생각하면, 사실 저는 굉장히 나와 다른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나답다고 봐주신다는 건 긍정적으로 해석할 소지가 있죠. 무엇보다 나답다는 게 지겹지 않고 신선하다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깡철이는 좀 비현실적인 캐릭터인 것도 같아요.
현실의 눈으로 보면 비현실적일 수도 있어요. 그건 완득이도 그래요.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일 수도 있죠. 깡철이는 여느 드라마 장르의 병든 모친을 모시고 사는 착한 아들과 비교하면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담백하고 위선 없고요. 저는 다수의 영화가 감동을 이끌어 내는데 굉장히 위선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반면 우리 영화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좀 더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아냈다고 생각해요.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착한 애가 있다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가 터치하는 감정선이 저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거나 ‘내도 좀 살자고’라고 말하는 것들이 부여하는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현실적으로 풀 수 있는 한에서 담백하게 풀었다는 점에 만족해요.
깡철이는 자신의 감정을 내보내는데 차단되어 있죠. 억눌려있었고요. 엄마는 보호해야 하는 존재니까요. 갇혀 있던 자신이 폭발하는 장면이에요. 분노나 화가 아니고 사랑이 묻어있는 폭발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눈물 흘린다고 생각했고요. 엄마가 ‘나 버리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깡철이는 ‘안 버린다고’ 말하는 것들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들이 현실성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감독님이 모성에 대해 굉장히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연기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원한 부분이 있었나요?
감독님께서도 나름의 고집이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깡철이가 깡철이가 맞다고 동의해주셨어요. 모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모든 예술가들이 한 번씩은 건드리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모성을 주제로 영화를 만드셨는데 저는 거기에 담긴 감독님의 모성에 관한 생각에 굉장히 동의했거든요. 어떤 장르의 영화고 어떤 구조의 영화고 어떤 스탭과 배우들이 함께 하는 영화인지의 문제를 떠나서 한 배우가 작품을 선택할 때 본질적인 기준이 되는 건 시나리오를 읽고 얼마나 자신의 마음의 울림을 느끼느냐, 라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은 유난히 본질에, 마음의 울림에 집중하고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했던 작품인 것 같아요. 전에는 그런 거 없었거든요. 엄마가 작품의 고려 대상이 되다니! (웃음)
시나리오에서 아쉬운 부분은 없었나요?
<완득이>의 연장선상에서 약간 아쉬움이 있다면, 왜 항상 엄마들은 자식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걸까요? 아들도 너무 연약한 존재고 모성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나는 한없이 약한 존재인데, 아픈 순이씨(<깡철이>)나 필리핀 엄마(<완득이>)를 지켜야 해요. 왜냐면 아이들이 나오긴 하지만 결국 영화는 어른들이 만드는 거잖아요. 어른들이 원하는 아이들의 모습, 어른들이 원하는 착한 아들의 모습을 담아낸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뚝뚝한 아들이에요. 17살 때부터 독립해서 살았으니까요. 무뚝뚝한 아들임과 동시에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 굉장히 많은 아들이기도 하죠. 저는 깡철이의 눈물의 의미를 알고 깡철이의 웃음의 의미를 안다고 생각해요. 그건 제가 특별한 배우라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엄마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거겠죠. 나는 배우니까 그걸 좀 더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사람인거죠. 사실 그 부분은 수월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유아인은 '착한 아들의 아이콘'이 아니라 '반항의 아이콘'으로 연상되잖아요.
사람들이 날 대단한 반항의 아이콘으로 아는데, 사실 작품 속에서 반항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얼마나 착한 애들이에요. 그 말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그렇게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건 진짜 착실하고 건강하고 훌륭한 애들이라는 거죠(웃음).
착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착한 영화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결국 얼마나 현실적인 터치로 담아내느냐가 문제인거에요. 제대로 안 풀면 진짜 안 먹히겠다, 재미없잖아, 비현실적이고 가식적이야, 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어떤 이야기의 방식을, 어떤 배우를 선택하느냐가 아주 중요한 관건이죠. 대중영화들은 그 소재가 평범해진지 오래에요. 문제는 그걸 어떻게 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 내보이느냐, 그 시도가 먹히느냐 안 먹히느냐 인거죠.
영화가 좀 더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게끔 신경 쓴 부분들이 있나요?
진부한 메타포들은 최대한 없애고 싶었어요. 감독님과 함께 생각하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디어를 공유했어요. 대사가 너무 직설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 착한 부분들은 빼는 방식으로요. 물론 지금도 직설적이고 기가 막힌 우연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걸 최대한 차단하면서 표현 방법이 세련됐으면 했거든요. <깡철이>가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이 저는 퍽이나 세련됐다고 생각해요. 이미 많이 다뤄진 소재인데다가 심지어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더더욱 영화가 촌스럽게 되지는 않을까 신경을 많이 썼어요.
네, 그럼요.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들 수 있는 마음이죠. 굉장히 공감됐고, 너무 헌신적이고 너무 사랑하는 것보다는 그게 현실성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특히 드라마에서는 그런 현실적인 면을 잘 안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때로는 티격태격하고 엄마는 삐지고 그러는 게 무작정 ‘우리 엄마, 우리 엄마’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이지 않나 생각해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짜 악역은 한 명도 안 나오는 영화라 오히려 더 현실적인 것 같아요.
‘사연 없는 놈 없다’는 얘기하잖아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요. 나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사실은 우리가 그 사람의 내밀한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뿐이지 다들 나름의 인간성이 있고 각자 삶의 방식이 있겠죠. 그들이야말로 진짜 불쌍하기도 하고, 연민을 품어야 할 사람이기도 한데 그런 것들을 짚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악행은 있어도 악인은 없다고 생각해요. 정신병자는 있어도 악인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가치관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생긴 건가요?
19살 때 배우 생활을 시작했으니까요. 그때는 뭐 정체성이라는 것도 없었겠죠. 지가 뭘 알겠어요(웃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곧 배우로서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치잖아요.
그거 좋아하죠. 자기 자신을 위해 각자가 모두 그걸 실천했으면 좋겠어요. 굳이 왜 에너지를 소진해서 누군가를 미워해야 하나 싶어요. 내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먼저 이해하는 거니까, 어렵지 않은 일들인 것 같아요. 전에는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고 그렇게 살아왔다면 지금은 몸에 배어있어요. 저는 되게 비판적인 사람이기도 하고 굉장히 이해의 폭이 넓기도 한데, 배우 생활을 하면서 굉장히 큰 도움이 돼요. 많은 것들을 경험을 통해 습득하고 경험을 녹여 연기하기도 하지만, 살인자를 연기한다고 해서 살인을 해봐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결국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통찰하고 그 행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사고의 폭인데, 거기에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모든 걸 다 경험에 의존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사상 교육받은 집단이 아니잖아요. 각자 다른 생각이 있는데 그게 너무 공격적이지 않게 공존하길 바라요. 그걸로 발전이 이루어지는 거고요. 수많은 생각이 존중받고 공통의 현안으로 정답들을 찾아갔으면 해요. 사실 굉장히 두려워요. 저는 사랑 받고 싶은 사람이고,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고,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나는 나로 사랑 받고 싶어요. 내가 아닌 허상으로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 땐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균형을 내 안에서 맞춰가기도 해요. 그래야 내가 받는 사랑이 진짜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대화를 나눠보니 또래에 비해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 것 같아요.
또래 친구들은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니는데 저는 그에 비해 생각할 시간이 많은 사람이에요(웃음). 당연한 거예요. 저는 생각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써요. 그러면서 무언가를 얻거나, 아니면 고립될 수도 있겠죠. 건방을 떨고 있다거나(웃음). 저는 그런 것들을 경계하면서 내가 집중하는 시간들을 내 삶의 가장 긍정적인 재산으로 축적해두고 같이 공유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런 점들이 연기하는데 도움이 되겠네요.
배우들이 하는 일이 그거거든요. 연기만 하는 게 아니고, 배우들은 인간을 탐구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인간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또 많은 일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을 조금씩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연예인이니까 딴따라가 아니라, 어느 누구 못지않게 인간을 탐구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성취해낸 것들, 깨달은 것들을 연기로, 아니면 다른 어떤 것들로 많이 풀어내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난 연기만 해야지’라는 건 20세기의, 구시대적인 배우상인 것 같아요.
뭐지? (설명대로 표정을 지어보다가) 이건가? 보여줘요. 자료를 가지고 왔어야지! (웃음) 아, 대충 뭔지 알 것 같아요.
연기할 때 주로 표정들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편인가요, 아니면 상황에 몰입하면 자연스럽게 표정이 나오는 편인가요?
‘표정을 컨트롤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과 교만에 빠지고 나서부터 약간 과한 연기가 나오기 시작했죠. 제 초창기 연기는 약간 모자란 담백함으로 리얼리티가 있는 연기였는데, 물론 그런 것도 다 실험이에요. 여러 시도를 통해서 재미를 추구한다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어떤 시기에 약간 과잉되게, 결국 진정성 없이 도구만 가지고 뭔가를 속일 수 있다고 여겼다는 거죠. 그렇지만 대부분 속아 넘어가요(웃음). 많은 연기자들이 하는 패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인은 알아요.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진실성을 가지고 거기에서 파생된 표정, 움직임으로 하려고 요새는 많이 애쓰는 편이에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진정성이네요. 거기에 집중하면서 하고 싶어요.
<완득이>에 이어 <깡철이>까지, 유아인은 왠지 규모가 큰 영화랑은 안 어울린다는 시선도 있어요.
블록버스터도 할 수 있어요! (웃음) 거기에 정형화된 배우 같지가 않다는 거죠. 그래서 더더욱 큰 영화를 하고 싶어요. ‘나처럼 살아도 성공할 수 있어’ 이런 걸 보여주고 싶어요.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 일을 잘 하는 거예요. 내가 뭘 변화시키고 싶고 대단한 선구자인양 해도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못하면 저는 못난 사람이겠죠. 내가 하는 일을 기본적으로 잘 하면서 그런 모든 일들을 다 같이 수행할 수 있는 넓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되고 싶은 구체적인 상이 있나요?
항상 제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해요. 어릴 때는 어른들이 구리게 보이기만 하잖아요(웃음). ‘나는 저 나이가 되면 지금 내 또래 애들이 봤을 때 멋진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요. 후배들이 나를 재수 없어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는, 쿨하고 산뜻한 선배였으면 좋겠어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웃음).
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 글_정수영 기자(무비스트)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