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동안 장·단편 합쳐서 5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이제는 감독이란 호칭이 자연스럽겠다.
예전 보단 편해졌다. 현장에서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그나저나 영화는 봤나?
언론시사회 때 봤다.
팔짱끼고?
(웃음)관객의 입장에서 보려고 했다. 시사회 때 기자들과 함께 영화 보지 않았나?
사실 무대인사 후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홍보사의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극장 좌석에 앉았다. 숨죽이며 봤다. 기자들 반응을 살펴가면서.
<요술> 때 이미 겪었잖나?
그때는 아무것도 모를 때였고.(웃음) 이제는 언론시사회가 감독들에게 면접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라는 걸 안다. 크랭크업 한지 2달 만에 공개된 <요술>과 달리 <복숭아나무>는 1년 반이란 시간이 흘러 개봉했다. 후반작업이 길어지다 보니 애정이 커졌다. 그래서 부담감도 많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 이번 언론시사회는 다른 때보다 더 적막하더라. 왠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VIP시사회가 빨리 오기를 기도했다.
영화계 지인들을 초대하는 VIP시사회에서 응원을 받고 싶었나 보다.
너무 간절했다.(웃음)
그렇다면 지인들의 초대로 VIP시사회를 갈 땔 어떤가? 관객과 감독 중 어떤 입장에서 영화를 보는지.
고백하자면 나도 모르게 팔짱을 낀다. 연출을 하다 보니 배우 연기뿐 아니라 촬영, 편집, 조명도 주의 깊게 본다. “저기서 딱 호흡을 끊어줘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영화마다 연출 스타일이 다른 게 당연한데도, 자꾸 내 위주로 보게 된다. 이런 내 모습이 참 아이러니하다. 남의 영화는 분석하며 보면서 정작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분석하는 건 싫어하니. 최근 ‘내가 왜 이렇게 비겁해졌지’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음악이 계속 귓가를 맴돌더라. (카페에서 <복숭아나무> O.S.T가 흘러나왔다) 극중 어린 상현(조승우 아역)이 부르는 ‘복숭아나무’를 좋아한다.
(음악을 들으며)아! 슬프다.
이 노래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아프다.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음악이 정말 괜찮지 않나?(웃음)
자화자찬인걸. 이 노래와 마찬가지로 서현진이 부르는 ‘십년이 백년이 지난 후에’도 귀에 착 감기더라.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복숭아나무’는 얼굴이 앞뒤로 달린 샴쌍둥이 상현과 동현(류덕환)이 엄마한테 부르는 노래고, ‘십년이 백년이 지난 후에’는 엄마(서현진)가 샴쌍둥이들에게 들려주는 노래다. 가사를 유심히 보면 쌍둥이들을 향한 엄마의 사랑이 느껴진다.
전작 <요술>때 보다 더 많은 음악이 사용됐다. 음악에 신경 쓴 게 보이더라.
보통 시나리오를 쓰고 음악을 만드는데, 이번엔 반대로 음악을 만들고 시나리오를 썼다. <요술> 때는 2곡, 이번에는 9곡을 직접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복숭아나무>가 뮤직 드라마냐고 물어보는 관객들도 있더라. 다 음악 때문이겠지.
어느 인터뷰에서 <요술>을 ‘이미지와 음악만으로 연결되는 한 시간 반짜리 퍼포먼스’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내러티브가 약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다.
<요술>은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 즐비했다. 인정한다. <복숭아나무>도 변한 건 없다. 전작보다 내러티브를 신경 썼지만 이미지가 강조된 장면들이 많다.
내러티브가 약하다는 걸 알면서 이미지가 강조된 장면들을 삽입한 이유는 무엇인가?
<요술> 때는 시나리오 수정을 21번 했다. 반면 이번에는 단 두 번 만에 끝냈다. 시나리오 작업을 빠른 시간 안에 마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머릿속에 이미 영상화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들을 영화에 그대로 옮기고 싶은 마음에 개연성을 무시하고 삽입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 있는 영상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스탭들과의 소통이 어려웠을 것 같다.
촬영장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동현과 승아(남상미)가 같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동현이 앉아 있는 위치가 마음에 안 들었다. 머릿속에는 동현이 오른쪽에 앉아있었는데, 촬영장에서는 반대였거든. 그래서 두 사람들에게 자리를 바꿔 줄 것을 요구했다. 물건도 머릿속에 생각했던 위치와 똑같아야 했다. 편집할 때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당시 드라마 촬영 때문에 대만에 있었다. 한국에 없다보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편집이 안됐다. 할 수 없이 숙소에서 촬영본을 받았다. 편집 스탭이 알기 쉽게 편집 순서부터 음악 삽입 순서까지 자세하게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줬다.
영상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다. 강박까지는 아니었다.(웃음) 배우와 스탭의 의견을 수렴한 부분도 있다. 어느 날 빨간색 물감이 필요했는데, 없다는 거다. 그래서 “그럼 주황색을 달라”고 말했다.(웃음) 이미지 구현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걸 굳이 고집하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판단이 빠른 거고,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급한 거다.
복숭아를 보고 샴쌍둥이를 떠올렸다고.
기자간담회 때 그렇게 말했는데, 사실 ‘머릿속의 이미지를 어떻게 설명할까’라는 고민 끝에 내놓은 거다. 그냥 복숭아가 떠올랐고, 얼굴이 앞뒤로 달린 샴쌍둥이가 생각났을 뿐이다. 정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영화나 미술, 삽화 등에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보통 어디에서 착안하는 편인가?
평소 책을 읽다가, 그림을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문득. 그런 경험, 다들 있지 않나? 나도 똑같다. 이미지가 떠오르면 꼭 메모를 편이다. 메모하는 습관은 영화사 아침 故 정승혜 대표님을 만나고부터 생겼다.
메모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걸 책이나 영화로 만들 수는 없지 않나.
자금이 필요하지. 나 또한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이 되기까지 많은 노력을 한다. 남다른 아이디어보다는 발품을 판 노력으로 작품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몰라서 그렇지 받아 준 작품보다 거절된 게 더 많다. 이번 영화도 거절을 하도 많이 당해서 ‘구혜선 필름(자신이 직접 설립한 1인 영화 제작사)’으로 빛을 본 거다. 혹평을 받아도 내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뛰어 다녔다.
감독으로서의 문을 故 정승혜 대표가 열어줬다면, 내실을 다질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누구인가?
대표님 같은 스승은 아니지만 소중한 사람은 있다. 친구이자 스승인 서현진. 현진이는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 힘이 난다.
어떤 면에서?
남에게 칭찬을 잘하고, 충고는 안한다. 충고하는 걸 실수라고 생각하는 아이다. 어느 날 현진이가 “충고하는 게 꼭 당사자의 인생에 변화를 주는 건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걸 잘 알기 때문에 그걸 콕 집어서 얘기해줄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 그 말에 공감했다. 또 내가 어떤 일을 하든, 가치를 떠나 시도 자체에 박수를 보내준다. 이점이 단편 <유쾌한 도우미>부터 이번 영화까지 내가 현진이와 함께 작업한 이유이기도 하다.
확신한다. 우린 서로 키워주고 돌봐주는 사이라니까.
그런 사이임에도 <요술>때 서현진은 피아노 치는 장면을 찍기 위해 4개월 동안 혹독한 연습을 했다. 피아노를 한 번도 안쳐 본 서현진에게 너무 가혹한 숙제를 준거 아닌가?
그때 현진이가 피아노를 부수고 싶을 만큼 힘들어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때 음악 했던 친구 아닌가!(서현진은 아이돌 그룹 ‘밀크’ 출신이다.) 영화를 위해 열심히 해줄 걸 알았다. 그 믿음을 현실로 보여줬고.(웃음)
또 한 명의 절친 남상미는 어떤 존재인가?
현진이가 아빠 같다면 상미는 엄마 같다. 현진이와 나는 차가운 여자다. 회의주의자라고나 할까. 반면 상미는 따뜻하다. 모든 걸 아름답다고 예찬하는 친구고. 어떤 힘든 상황이 주어지면 “이건 말이야, 이래서 아름다운 거야”하고 결론을 내려준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더 친해진 것 같다.
서현진이 아빠, 남상미가 엄마 같은 존재라면 조승우와 류덕환은 어떤가?
‘개미’. 내가 배짱이 같은 감독이었다면 두 사람은 열심히 연기해 준 개미 같은 배우였다. 둘은 독특한 인물인 상현과 동현을 온 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을 거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요술>의 서현진에 이어 <복숭아나무>에서는 류덕환이 피아노를 친다. 류덕환은 어떻게 트레이닝 시켰나?
고맙게도 덕환씨 스스로가 여러 가지 연구를 해왔다. 동현이 한 손으로 피아노 치는 것도, 덕환씨 제안이었다. 동현은 아버지와 형이 있지만 언제나 외로움을 달고 사는 인물이다. 덕환씨는 동현의 그런 외로움을 몸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인물 분석이 뛰어났다.
상현이 밤마다 읽는 책은 ‘빨강머리 앤’이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최근 ‘빨강머리 앤’을 봤다. 문뜩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안에는 수많은 철학이 담겨있었고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뀌기도 했다. 영화 속 상현이 밤마다 책을 읽는 장면이 나왔으면 했다. ‘빨강머리 앤’이 어울릴 것 같아서 선택하게 됐다.
어쩌면 현실 도피. 이상을 반영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판타지는 상상의 제한 없이 이야기를 풀어 낼 수 있는 이로운 장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판타지적 세계를 계속 그리는 것 같다.
어느 인터뷰를 보니 ‘우리는 모두 서로를 위해 살고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영화를 연출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서로를 위해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나 혼자라면 절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거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반대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 때문에 살아간다. 서로 버팀목이 되어가는 삶이 바로 서로를 위해 산다는 게 아닐까.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맥기와 나눈 대담을 보니, “어린 시절에 본 만화와 동화 그 시절의 친구들에 대한 기억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했더라. 어린 시절 즐겨봤던 만화나 동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 시절 봤던 모든 동화와 만화를 사랑했다면 믿어주려나?(웃음) 특별히 찾아서 본 건 없다. 그냥 그때 향유했던 모든 것을 사랑했을 뿐이다.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으니까.
영화는 그동안 해왔던 작업들의 종합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감독 구혜선의 작품이 어떻게 발전하고, 변모할지 궁금하다.
내러티브에 대한 고민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작품에서 추구했던 연출 방향은 계속 고수 할 계획이다. 약점이 강점이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지. 이게 수반된다면 다양한 걸 해 보고 싶다. 특별한 걸 시도한다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영화, 문학, 미술, 음악을 좀 더 깊게 하고 싶다는 거다. 가능한 구혜선만이 만들 수 있는 콘텐츠를 내놓고 싶다.
서현진, 남상미와 함께?
마음 맞는 친구들 다 같이 함께.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