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을 10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4년 전 <로드무비>에서 처음 본 ‘대식’만을 기억한다면 그는 분명 ‘때깔’부터 달라졌다. 그건 분명 연기일 뿐, 황정민이 그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니었지만 친근함은 그대로 역할만 새롭게 바뀌는 배우를 만나는 건 여전히 기쁜 일이다. CF와 사진 찍는 건 “여전히 어렵다”라고 말하지만 표정이나 포즈는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소개한다는 겸손함을 지닌 황정민은 마약판매상에게 “진작부터 니가 사람새끼가 아닌 건 알고 있었다.”란 말을 들을 만큼 독하고 악질인 형사역할을 사생결단 낼 만큼 열심히 찍었단다. 그의 형사 역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 늑대>에서 서른이 넘은 나이에 늦깎이로 형사가 되어 의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시골 토박이 ‘고순경’은 온데 간데 없다.
악에 받힌 절규와 능글능글한 말투, 억센 사투리 속에 드러나는 야생본능. 그가 군용 점퍼를 입고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범인을 검거하는 모습은 <사생결단>에 임하는 그의 속내를 느낄 만큼 강렬하다. 이 징글맞은 배우의 진심은 세편의 영화가 동시에 붙었던 지난 27일 관객동원 1위를 차지하며 증명됐다.
거친 부산 뒷골목의 마약 전담 형사를 연기한 <사생결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신이 바로 추자현을 때리는 장면이었다고 말하자 사람 좋게 웃어 보이던 황정민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스친다. 과거 <바람난 가족>에서 극중 아내인 문소리를 구타하는 장면을 찍을 때 ‘아무리 연기라지만 여자를 어떻게 때리나. 차라리 맞는 게 낫다.’란 평소 생각 때문에 계속된 NG로 고생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짓궂게 “때리는 연기가 가장 힘들다더니 잘만 때리시던데요?”라고 농담도 던져봤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 지며 “아대부터 붕대, 온갖 보호할 수 있는 모든 건 다 하고 나서 촬영했어요. 서있는 추자현씨에게 ‘어데 있는지 말 안할끼가?’닥달 하면서 허벅지를 내리치는데 세게 때리는 것도 아닌데도 이~따만한 보호대를 붙이고 나서야 연기가 되더라구요.”라며 당시 상황까지 설명한다.
흡사 처음 나간 미팅에서 물잔을 엎지른 실수를 한 사람처럼 쩔쩔 매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락없이 <너는 내 운명>속 ‘석중’이 떠오른다. 은하를 앞에 두고 갓 짠 우유를 수줍게 내놓으며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그 연기가 인간 황정민의 평소 웃음인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몸짓까지 섞어가며 부연설명을 하는 그의 모습이 더없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작년 한해 자그마치 다섯 편의 영화를 대중 앞에 선보인 황정민. 단 몇 장면, 그것도 피범벅이 된 선우에게 "몰랐어? 인생은 고통이야"라는 명언을 약 올리듯 내뱉던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은 제42회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안겨주었고, 그해 청룡영화상의 남우주연상은 <너는 내 운명>의 석중에게 바쳐졌다.
부산 사투리와 다혈질 형사라는 점에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속 나형사와 비슷하지만 <천군>에서 보여준 애국심 투철한 군인정신과는 다소 거리가 먼 악질형사의 모습은 분명하게 엇갈린다. 마약 중간 판매상 상도(류승범)에게 “묵직함 놈 하나 해서 내 훈장 타고 계급장 쫌 갈자! 그라믄 니 구역은 내 챙기주께!” 라며 꼬시는 모습은 <여자, 정혜>에서 보여준 수더분한 작가지망생에 대한 기억을 잠재운다.
“기대 작이라 특별히 다른 건 없다”
사실 존경하는 김희라 선배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유난히 호흡이 잘 맞았던 류승범 하고의 작업이라 기대만큼 영화가 잘 나온 같다 라는 식의 대답은 애초에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생결단>의 개봉을 앞두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뭐냐고 묻자 “아무래도 승범씨하고의 작업과 에피소드가 가장 많죠. 기대가 많아서 작업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웃음) 사실 제가 작품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는 철저히 ‘이야기’에 있어요. 시나리오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고 어떻게 풀어가는지 만 봐요. 그래서 촬영하면서 아이디어를 내기보단 그 안의 이야기만 충실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이유도 거기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수상소감까지 CF으로 회자되고 연예계의 블루칩만이 모델이 된다는 휴대폰 광고를 찍기까지 <너는 내 운명>이후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연극시절부터 팬이었던 사람들과 본인 자신에게도 분명 부담으로 다가왔을 터. <사생결단>의 카피가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인 만큼 철저히 악질인 ‘도진광’을 연기하기 위해 그는 무엇을 준비했을까?
“딴 거 필요 없어요. 저는 제가 연기한 인물이 마약 담당 형사의 초상이라고 보지 않아요. 사전 조사도 전혀 안 했어요. 평소에 후배들한테도 시나리오만 충실 하라고 말하거든요? 시나리오를 믿고 그대로 연기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더더욱 사람(형사)을 만나지도 않았어요.” 무능력하고 목표를 이용하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모습은 상대적으로 상도가 더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사실적이다.
“우리 둘이 붙여놓으면 어떨 거라고 생각했어?”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모습은 영화 속 대사처럼 ‘민중의 곰팡이 돈경장’일수밖에 없지만 ‘의리’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신조를 가지고 행동하기에 황정민에게 한없이 동정을 받는 캐릭터다. “약한 자죠. 악하면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 연기할 때 그의 징글징글한 성격을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의 마지막에도 악당 장철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장면 있잖아요? 아마 그 성격에 누군가 말렸으면 안 그랬을걸요. 너무 약하기 때문에 걸어가다 분명 멈췄을 거야. ‘징글징글한 리얼리티!’ 아~ 이 표현을 너무 많이 쓰는데(웃음) 그렇게 딱 맞는 표현이 없어요.”
언론에 알려졌다시피 부산에 내려가 쌩 고생을 해가며 자료조사를 하고 어렵게 관련인물들을 인터뷰해가면서 캐릭터를 완성했던 최호 감독의 이야기는 황정민을 매료시켰고, 상대배우 역에 류승범을 염두 해 두고 있다는 말에 ‘황정민표 도경장’으로 탄생됐다. 사실 <사생결단>에서 가장 유머러스하고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단 한 장면만 꼽으라면 단연코 자동차 미행 신이다.
제대로 한 껀 하기 위해 위장 전입시킨 상도가 3개월이 넘도록 제조공장을 알아내지 못하자 직접 장철 일행을 따라나선 것. 들켜선 안 되는 두 사람의 연기는 만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죽이 잘 맞는다. “모두 애드립이예요. 하다못해 승범이는 셀카로 찍고 그게 나중에 터널장면으로 쓰이기도 했죠. 사실 둘이 붙여놓으면 분명 한쪽으로 흐를 거라고 다들 생각하는 눈치였어요.’그래, 둘이 해봐’하고 상황이 던져졌지만 우리 둘은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요. 순전히‘도진광’, ‘이상도’로만 쭉 간 거죠. 그 상황이 가장 인물을 살린 신이에요. 심지어 뒤에서 HD카메라로 찍은 장면도 있는데 시사회 때보니까 그걸 넣었더라구요.”
“마지막 엔딩 15분이 바로 10일간 찍은 분량”
비열한 웃음 뒤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진리를 몸소 실천하는 도경장은 영화의 끄트머리에 영화의 주제와도 같은 대사하나를 읊조린다.“니가 내 속였잖아. 먼저…” 사실 마산 출신의 배우가 부산사투리를 연기한다는 건 앉아서 TV를 보면서 과자를 먹는 식으로 쉬운 일이겠지만 경상도 사나이의 사투리는 쉽게 고칠 수 있는‘억양’의 문제가 아님을 태생적 사회적 경험으로 알고 있는 기자는 도진광 스타일로 <사생결단>을 한마디로 압축해달라는 TV쇼 프로스런 부탁을 해봤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지만 한마디로…’쥑이네~’이거죠.”(사실적인 시청각 서비스를 해드리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
옆을 보지 못하게 눈가리개를 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 같은 인물을 연기하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연민을 가져야 했던 황정민이 가장 자신 있게 추천하는 장면으로 감천항 장면을 꼽았다. 열흘이 꼬박 걸려 찍은 이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다큐멘터리 필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거친 화면은 팽팽히 이어져왔던 두 캐릭터의 부딪힘으로 사실감을 더한다. 더 이상 당겨지면 끊어질 것 같은 활시위를 바라보는듯한 긴장감은 최감독이 모티프로 한 후쿠사쿠 긴지 감독의 < 야쿠자의 무덤>을 뛰어넘었다.
“배우로 살아가는 의미? 없어요. 직업이 배우일 뿐이죠.”
일찌감치 실제 마약 전문가가 쓰고 다녔다는‘라이방’썬그라스를 구한 그는 바지밑단이 퍼지는 복고풍 정장이 잘 어울릴 거라 판단, 직접 디자인해 맞춰 입었을 정도로 <사생결단>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언밸러스해 보이지만 묘하게 패셔너블한 황정민의 모습은 그간 연기해온 다양한 직업 군에서 단연코 눈에 띈다.
평소 주목 받는 게 싫어서 축하 받는 자리인 생일파티 조차 부담스럽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그에게 배우는 무대나 스크린 속에서 돋보이는 게 의무요, 숙명 아니냐는 반문을 해봤다. “아까 평소 제 억양을 듣다가 고향이 마산이란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셨다고 하셨죠? 저는 ‘배우’잖아요. 당연히 서울말을 쓰고 배역에 따라 바뀔 수 있어야 해요. 그렇다고 배우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건 없어요. 사람들이 각자 맡은 일이 있듯이 저는 배우가 직업일 뿐인데, ‘대한민국에서 배우로 살아가는 의미? ‘이런 거창한 거 없거든요.”밖에서 있었던 일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와 시시콜콜 대화하기 좋아하는 여자들과 달리 집에 오면 공적인 일은 집밖에서 끝내는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답게 집안에서는 철저히 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뮤지컬 배우인 아내와 이런저런 상의를 할 법도 한데 본인 표현대로라면 물어보지도 않는다고. 대신 같이 본 연극과 영화에 대해서는 긴 대화를 나눈다는 그는 철저히 평범한 소시민적 마인드를 내비쳤다. 대중은 공인(工人)으로서의 황정민과 범인(凡人)으로서의 황정민까지 알고 싶어하지만 그에게 직업의식 이상의 노출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는 이미 우리에게 헌신적인 노력과 성실한 연기로 필요이상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믿고 기다리면 더 큰 감동을 안겨주리란 것도.
취재_이희승 기자
사진_권영탕 사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