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텔미썸싱>에서 청순한 이미지의 심은하가 더 도드라지게 보일 수 있었던 건 파트너인 ‘한석규’보다 조연을 맡은 ‘오승민’역의 염정아 때문이었다'라고 생각한다. 공포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장화, 홍련>에서 새엄마역할을 맡았을 때도 <여선생VS여제자>의 미워할 수 없는 노처녀 ‘여미옥’을 능청스럽게 연기했을 때도 그녀의 선택은 언제나 흥행과는 별개로 독특한 심미안을 발휘하는 듯 했다.
사실 관객이 그렇게 천천히 자신의 날개 위에 하나씩 덧칠해나가는 그녀를 눈치채기 시작한 건 근래 들어서다. 흔하게 만나보지 못할 명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에서 “나 조이나야, 조이나라구!”라고 앙칼지게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미워하기보다는 동경했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반전을 가진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또 어떤가. 대중들은 “나 삼류 아니야 걱정 마”라고 말하는 염정아에게 그 해 청룡영화상 조연상까지 안겼다. <쓰리, 몬스터>에서 잠깐이지만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연기까지 습득한 염정아는 <소년, 천국에 가다>에서 철부지 미혼모 ‘부자’로 돌아왔다. 열세살 소년 ‘네모’의 순정을 받아주는 철없는 여자로 말이다.
그러나 이 ‘철없음’을 빙자해 진정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용감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도 충분히 예쁘고 눈이 부신데도 사진촬영을 위해 옷깃을 여미고, 동료배우의 새 영화를 챙기고,(절친한 동생인 김래원이 주연한 영화를 봤냐면서 자신의 영화보다 더 챙기는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전부터 계속된 인터뷰와 갑자기 몰려온 감기기운과 싸우면서도 인터뷰에 임하는 염정아의 자세는 언제나 꼿꼿했다. 그리고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염정아 (이하: 염) 다르죠. 그런데 영화 속 인물들은 다 나랑 닮아있어요. 내가 없는 모습은 연기 못하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모습 중에 그 인물과 가장 비슷한 면을 찾아서 연기하는 건데 이번엔 내 안에 좀 철없고 엉뚱한 모습들을 끄집어내 연기했어요.
이: 그렇다면 염정아가 100이면 극중 ‘부자’를 80이나 85정도?
염: 아니죠. 그건 아니죠. 그냥 저의 일면을 말하는 거예요.
이: 여러 편의 영화를 찍다 보면 이제는 ‘감’이란 게 올 것 같다. 툭 까놓고 ‘대박느낌’이 나시는지?
염: 음..영화 외적인 다른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요. 예를 들어 다른 영화가 너무 재미있다거나.
이: 아까 말씀 하셨던 너무 아끼는 김래원씨 영화와도 본의 아니게 붙으시잖아요.
염: 개인적으로 래원이 영화가 잘나왔다니 너무 좋아요. 내가 예뻐하는 동생이 잘했다니까요. 경쟁의식 같은 건 없는데 소이랑 래원이 저 이렇게 셋이 붙었다고 언론에서 너무 부추기셔서(웃음) 삐뚤어진 마음은 없구요. 우리 애들이 밖에 나가서도 잘 하고 있구나 해서 뿌듯하지.
이: 이제는 흥행배우의 대열에 들어섰으니 러닝 캐런티 인지, 일시불로 받았는지 원초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려고 했어요. 부산영화제에서 열린 <소년, 천국에 가다>의 밤에서 뒤에 서있는데 거기 오신 몇몇 감독 분들이 ‘ 한국영화에서 쉽게 소화해 낼 수 없는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가슴을 가진 배우’라는 말을 들었다. 그 분들도 그러시더라 “흥행배우잖아. 이제” 라고.
염: 하하. 러닝 계약은 안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거와는 상관없이 우리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이고 그리고 일단 굉장히 독특한 영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관객들도 이제는 이런 영화를 많이 사랑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일단 이 영화는 <빅>하고 설정이 비슷하지만 영화가 주는 느낌은 <아멜리에>나 <가위손>이랄까? 그 영화들은 우리나라에서 다 사랑 받았던 영화니까 많이들 좋아하실 거라고 믿어요.
이: 특히, 요즘에 개봉하는 영화들이 ‘아이들’과 찍은 영화들이 많은 것 같다. <새드무비>때도 그렇고. 예전엔 차가운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말이죠.
염: 애들이 나올 수도 없거니와 볼 수도 없는 영화였죠.(웃음)
이: 특히 이번 영화 <소년, 천국에 가다>는 아예 몸은 어른이지만 아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역할이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미혼모역할을 맡아서 여배우로서도 좀 맡기 힘들었을 텐데.
염: 이 영화는 ‘아이와 엄마’의 얘기가 아니라 ‘엄마의 생활’이 나온 환타지 영화예요. 다만 설정이 애 엄마인 셈이죠. (웃음)극중 제가 맡은 배역도 아무 생각 없이 미혼모가 된 것 같은 캐릭터긴 해요. 제가 시나리오를 받고 접근하는 방식이 그래요. 롤모델 없이 감정만 캐치하는 식. 되도록 쉽고 단순하게 받아들이죠. 그 외 다른 모습들은 감독님이 다 만들어주는 거죠.
이: 사실 영화의 예고편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도입부부터 색다른 것 같다. 구름을 솜사탕 먹듯 뜯어먹으면서 들어가는 모습이. 우리 사이트에 있는 영화소개란 밑 리플을 보면 특히나 이런 의견들이 많았어요. ‘예고편을 보니, 더 궁금해진다’,’웃으며 시작하던 염정아가 왜 울며 책을 덮는 건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등. 영화를 안본 사람들에게 이 부분을 잘 캐치해서 보라고 하는 그런 게 있다면 말해 주세요.
-예고편은 일부인데 진짜로. 직접 보면 더 빠지실 거예요. 사실 영화를 볼 때 어떤 부담을 가지고 오는 부분이 항상 있는 것 같아요.’내가 어떻게 봐야 된다’라는 다짐까지는 아니더라도 슬픈 영화라고 생각했으면 슬픈 감정을 미리 갖고 보는 경우같이 말이죠. 그냥 그런 거 없이 편하게 와서 보시면 좋은 영화예요.
염: 그런 경우가 별로 없구요. 거의 감독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라요. 특히나 이 시나리오 읽고 매니저한테 그랬어요. “내가 이 역할 꼭 해야 되겠다”고. 완전히 필이 꽂혀서요. 이건 내가 꼭 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더 감독님의 말을 수용했어요. 제가 시나리오를 읽고 상상했던 건 한계가 있잖아요. 아직 완성 본을 못 봐서 더 기대 되요. 사실.
이: 후회 없이 따라가는 편이시군요.
염: 내 의견이 확고하면 끝까지 밀지만 난 확고한 게 없거든.(웃음). 나는 그냥 그 인물의 캐릭터만 가지고 있으면 나머지 상황은 감독님이 정해주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영화전체를 다 보는 건 감독님이시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캐릭터의 감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면 얘길 하죠. 하지만 나머지는 다 수용해요.
이: 과거에는 미스코리아 였지만 지금은 배우인데 이제는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란 꼬리표는 뗀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냥 ‘배우’ 염정아 라고 생각된다.
염: 미스코리아 출신인 게 사실이고, 의식은 안 하는데 사실은 사실이니까 뭐.(웃음)
이: 그럼 다르게 질문해 볼게요. 과거에는 미스코리아였고 지금은 배우인데 지금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염: 배우가 되려고 미스코리아에 나간 건 아니고 그냥 배우가 되고 싶었던 학생이라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했고 근데 미스코리아도 나가고 싶었어요. 그냥 이 꿈하고 저 꿈하고 따로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게 ‘미스코리아가 되면 배우가 되겠지’가 아니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대회에 나가니까 당선되고. 그러다 보니 배우가 되는 길이 더 빨랐던 것. 그냥 그 뿐이에요.
이: <소년, 천국에 가다> 포스터를 보면 오드리 헵번이 연상된다. 비비안 리와 오드리 헵번을 섞어 놓은 이미지였다. 그러고 보니 오드리 같은 여성미와 비비안의 도도한 이미지가 다 들어있는 여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을 뻗어나가다 보니 현대물로 따지자면 ‘첩보물’도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염: 다들 내가 민첩한지 알지.하하하. 날렵하고. 연기도 볼 줄만 알고 할 줄만 아는 배우예요. 그래서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연기하는 건데.(웃음)
이: ‘부자’란 역할을 맡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촬영 끝나고 나니 변한 모습이랄까?
염: 영화 찍을 때만 달라졌고 지금은 다시 제 생활로 돌아왔어요. ‘부자’는 표현이 거침이 없거든요. 느끼고 보는 대로 아이처럼 표현하는 인물이거든요. 말도 아이들이 쓰는 말만 쓰고.
이: 요즘에는 드라마보다 영화에 더 매진하는 것 같다. 영화가 주는 또 다른 영감이랄까 특별한 느낌이 있으신가요?
염: 꼭 그런 건 아닌데 영화가 더 눈에 들어오는 시기 같아요. 영화를 계속 하다 보니까 계속 그 물에 있으니까 그 물에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사는 세상은 되게 좁은데 저는 어려서부터 방송을 시작해서 남들보다는 좁은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그런데 그게 현장가면 다 풀리는 것 같아요. 드라마는 정신이 하나도 없고 여유가 없고. 그게 장점일 때도 있어요. 감정을 막 몰아가니까.
이: 성격상 영화현장이 몸에 맞으시나 봐요.
염: 성격이 아니라 배우라면 다 영화현장을 다 좋아할 거예요. 차이가 있어요. 영화현장은 더 공들여서 찍게 되잖아요. 세팅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성격상은 드라마가 맞는데 영화현장을 찍으면서 몸이 맞춰져서 노하우가 생긴 거죠.
이: 마지막 질문인데요. 차기 작은 어떤걸 고르시고 계시나요? 배우로서의 계획도 알려주세요.
염: 아직 확실하게 결정한 건 없고 ‘멜로’를 주로 보고 있어요. 저는 멜로를 하고 싶어요. 계획도 색다른 건 없죠. 그때 그때 작품 열심히 하는 거죠. 또 그게 젤 중요한 거고.
인터뷰 말미에 조근 조근 말하는 기자들만 보다가 VJ식으로 액션을 취해서 말하는 기자는 처음 본다고 “나도 말이 빠른데, 기자님도 무지하게 빠르네. 에너지가 넘쳐” 라고 한마디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인터뷰를 할 줄 알았다고 사적인 감정을 내비치자 “그건 저도 아쉬워요.”라고 큰언니같이 위로도 해주었다. 큰 눈에 진 약간의 주름을 감추기 보다는 더 당당하게 웃고, 거침없이 말하면서 현재를 즐기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그녀의 매력이 가슴에 사금파리처럼 다가왔다. 분명 반짝반짝 오랫동안 박혀있을 것이다.
● 배우 염정아의 도도한 매력에 에 빠~져 봅시다!
기자_ 이희승 기자
사진_ 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