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상업적으로 잘 기획된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느끼는 것 같다.
내가 했던 영화 중에 <부산행>의 규모가 가장 크다. 순수 제작비만 85억이니까. <용의자>도 이것보단 적었다. 이렇게 예산이 큰 영화에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다. 내가 상업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구할만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어줬다는 뜻이니까. 물론 부담감도 따른다.
<부산행>의 어떤 점이 가장 흥미로웠나.
연상호 감독이 사회고발적 애니메이션을 주로 연출했던 분인데 상업적으로 기획된 영화를 한다고 하니 흥미롭더라. 그의 이력과 이런 영화는 성향이 달라 보였으니까. 좋은 시너지가 날 거라고 기대했다.
칸에서 <부산행>을 접했겠지만, 국내 언론시사회에서 두 번째로 본 소감은 또 다를 것 같다.
두 집단의 관객들이 보이는 반응이 꽤 달랐다. 칸에 온 관객들은 워낙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영화를 즐기더라. 마치 뮤지컬 공연을 보듯이 말이다. 동석이 형이 리더가 돼서 기차칸 네 칸을 건너가야 하는 상황, 쉬운 말로 폼 잡는 분위기에서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박수를 쳤다. 수안이가 좀비에게 당할 뻔 한 상황에서 동석이 형이 나타나서 구해주면 환호성도 지르더라. 연기자 입장에서 그런 호응은 진심이든 아니든 기분 좋은 것이다. 문제는 그런 우호적인 분위기에 취해서 내가 영화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는 거다. 그래서 언론시사회 때는 좀 긴장이 됐다.
칸에서 반응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관객이 보이는 웃음의 의미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니 함부로 판단을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칸에서는 옆에 있는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보여준 박수나 환호 같은 것들이 진심같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영화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정적이다. 이건 문화차이인 것 같다. 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동적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호응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장에서 소리지르면 남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고 또 부끄러워 하니까. 그래도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한국 관객들이 좀 더 ‘흡수’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아무래도 한국 관객은 영화의 메시지를 기민하게 파악하기 때문 아닐까.
그랬을 거다. 칸에 온 일반 관객들은 <부산행>을 단순한 오락물로 즐긴 것 같다. 물론 할리우드에서 봐왔던 좀비물과는 좀 색다른 감이 있다고 느낀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외신들은 사회적인 맥락까지도 정확하게 인지하더라.
사회적인 맥락을 담고 있는 영화에 왜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고 생각하나. <도가니>의 영향도 조금 있었을 것 같다.
영화 안에 사회적인 내용이 담긴 건 맞지만, 내 캐릭터가 그런 부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가 비슷하다.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는 않다. 감독님은 <도가니>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날 캐스팅 할 때 ‘아빠 느낌이 나는지’를 중요하게 봤다는 말씀만 하셨다. 흔히 말하는 ‘청춘배우’ 중에서 아빠의 느낌이 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
결혼하지 않은 남자로서 진짜 아버지 같은 느낌을 주기 쉽지 않았을텐데.
딸 있는 아버지 역할을 세 번이나 했었다. 물론 영화에 딸과 함께 나오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버지라는 설정은 반복됐으니, 아버지로 보이기 위한 연기적 노력은 계속 했던 셈이다. 그런 경험과 상상력이 합쳐져 이번 <부산행>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부성애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아버지 역할을 잘 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성애는 상상만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론적으로 미리 준비 할 수도 없는 감정이고. 사실 수안이를 믿고 따라갔다.(웃음)
수안이’를’ 믿고 본인이 따라 간 건가.(웃음)
그렇다. 나는 연기할 때 상대방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와 어떻게 연기를 주고 받느냐에 따라 내가 의도한 감정이 잘 표현되냐 그렇지 않느냐가 갈린다. 그런 면에서 수안이가 큰 도움이 됐다. 워낙 유연하게 연기를 잘 하는 친구다.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웃음)
수안이는 또래에 비해서 작고 가벼운데도 쉽지 않더라. <용의자>때도 혼자 넘어져보고 많이 다치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이를 안고 뛰니까 아이가 다칠까봐 심적 부담이 컸다. 특수제작한 트레드밀 위에서 수안이를 안고 뛰다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미끄러진 적이 있는데 그때 정말 많이 놀랐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어떻게 넘어졌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내가 멋지게 안아서 등으로 떨어졌어야 되는데.(웃음) 엄청 미안했다.
극중 수안이 석우에게 이기적이라며 ‘돌직구’를 날린다.
솔직히 내가 석우라면 서운한 마음이 들 것 같더라. 내가 너한테 시간은 많이 못 내주지만 밖에서 얼마나 피땀 흘리면서 일해서 널 먹여 살리는데!(웃음) 아무리 나이 어린 아이라지만 어떻게 ‘이기적이니까 엄마가 떠나간 거야’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딸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인 모습을 강요하는 건 사실 아닌가.
그런 장면을 소화하면서 정말 생각이 많아졌다. 아이가 그 위급한 상황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게 사실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거지만, 그게 실제 상황이라면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내 나이가 적지 않다보니 아무래도 결혼이나 육아에 대한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되는데 <부산행>의 수안이 아버지를 연기하면서 걱정이 생겼다. 나중에 내 딸이나 아들한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말해줄 날이 오면, 대체 뭘 어떻게 말해줘야 될까. 옳고 그름이 너무나도 불분명한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줘야 될까.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어른을 위해서 양보하라는 말을 해주는 게 옳은 걸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다 말해주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하기엔 희망을 다 짓밟는 것 같고.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더라. 난 세상이 마냥 아름답다고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 더 그럴 수도 있다.
악역인 '용석' 역할도 해보고싶다고 했다.
그렇긴 하지만 만약 내가 했으면 용석처럼 그렇게 나쁘게 굴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나도 자기중심적 사고가 있는 사람이다. 드러내냐 안 드러내냐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석은 너무 극악무도하다.
그럼에도 용석은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엄청 현실적이다. 자기만 생각하니까. 극중 석우가 임산부인 성경이 뛰어오는 데 문을 닫는 장면이 있다. 그때의 석우는 이해가 된다. 용석이 뒤에서 빨리 닫으라고 마구 소리치니까 말이다. 내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 강요하고 소리친다면 그게 도화선이 돼 즉흥적으로 행동을 할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용석은 다르다. 용석의 무리와, 저쪽 칸에서 좀비를 뚫고 온 우리쪽 무리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용석은 '감염됐을지도 모르니 저쪽으로 나가라'고 소리친다. 그때는 다수의 횡포라는 게 뭔지 실감이 나더라.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따져볼 것도 없이, 그들 다수에게는 이미 우리 소수가 비정상인거고, 배척의 대상인거다. 나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다.
그들의 연기 몰입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본인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덤비기 때문에(웃음), 감독님이 컷을 해도 잘 못 듣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 나온 것만큼이나 실제 촬영장도 정신이 없었다. 다들 소리를 내고, 다들 몸을 흔드는 무아지경이었다.(웃음) 나는 컷인 줄 알고 그만하는데 그들은 끝까지 나한테 뭔가 해를 가하려고 덤비니까 나중에는 진짜 겁이 나더라. 도망가다가 잡힌 적도 많다. 바보같이 ‘무섭다’고 말하는 것도 메이킹 필름에 다 찍혔다.(웃음)
영화에서 석우가 방패를 주무기 삼아 좀비들과 싸우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사실 나는 석우가 그런 스킬 없이 싸우기를 바랐다. 동석이형 같은 경우는 영화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우리끼리는 전직 이종격투기 선수였다는 설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비주얼만 봐도 과거에 주먹 한 번 썼을 법한 느낌도 갖고 있고. 때문에 다양한 싸움 기술이 나와도 그럴 만 하다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식이는 야구선수니까 방망이를 휘두르면 되고. 그럼 펀드매니저인 석우는 어떻게 싸워야 되나 고민을 하던 중에, 무술 감독님께서 도구를 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맨손으로 싸우는 건 더 힘들 테니까. 싸움 못하는 사람으로선 방패가 있으면 좀비가 덤빌 때 방어하기 좋지 않나. 또 무술 감독님 입장에서는 상화, 석우, 영국이라는 세 명의 캐릭터가 서로 호흡을 맞춰서 열차 칸을 탈출해 나가는 장면이다 보니 너무 밋밋하게 싸워나가면 아쉽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떤 점에서 방패 없이 싸우는 게 나을 것 같다 생각했나.
너무 기술적으로 느껴질까봐 걱정이 됐다. 방패로 좀비들의 발등을 찍는 장면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고. 석우가 싸움을 잘하는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우려됐다. <용의자>때는 싸움 고수의 느낌이 나도록 절도 있게 동작을 했다면, 이번에는 오히려 자꾸 휘청거리는 연기를 했다. 내가 좀비를 때리는 장면에서도 몸의 균형을 무너트렸고. 그저 이 상황이 급박해서 몸부림을 치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보였다.
시나리오상 그렇게 보여야 됐고, 나도 그렇게 보이길 원했다.
(단호하게)절대 아쉽지 않았다.(웃음) 그게 아쉬웠으면 내가 상화를 했겠지. 아니, 그렇게 생각했으면 아예 <부산행> 못 했을 거다. 캐스팅은 내가 제일 먼저 됐다. 그래서 오히려 상화 역에 누가 캐스팅 될지 너무 궁금했다. 내가 먼저 동석이 형이 괜찮을 것 같다고 떠올렸다가, ‘너무 뻔한가?’ 라고 말하기도 했었고.(웃음) 누가 맡든 상화는 오락적인 기능을 잘 수행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동석이 형이 그 역할을 잘 소화해 영화의 즐거움이 배가됐다.
정유미와는 <도가니> 이후로 두 번째 만남이다.
그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둘이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연기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배우와 한 영화에 출연하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다. 정유미는 배우로서 어떤 독보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 그게 참 부럽다. 그 배우의 매력을 나만 알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웃음) 지금도 좋지만, 데뷔 초창기에 약간은 유연하지 않은듯한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매력이 있었다.
올 해 작품운이 좋았다. 좋은 분들과 연달아 연기했다. 내가 인터뷰 하면서 같이 연기해보고 싶은 선배가 있냐는 질문에 꼽은 두 사람이 송강호 선배랑 도연 누나다. 그게 올 해에 다 이루어졌다. 배운 것도 많고, (멘탈이)깨지는 순간도 많이 있었다.
데뷔 후 필모그래피를 보면 <S 다이어리>나 <김동욱 찾기>같은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가 주류를 이룬다. 한데 <도가니>이후부터 다소 묵직한 영화를 고르는 것 같다.
의도한 건 아니다. ‘올해부터는 좀 무겁게 가야 되겠군’ 이라든가, ‘내가 로코를 많이 했으니 이제 그런 이미지를 탈피할 때군’ 이렇게 작위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정서가 작품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다만 요즘에는 그 영화가 갖고 있는 기획성을 본다. 과거와 다르게 내가 맡게 되는 역할보다 작품 그 자체를 보게 되는 경향이 생겼다. 좋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
보고 나서 어떤 식으로든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가 나한테는 좋은 영화다. 두시간을 할애해서 봤는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시간이 아깝다. 주제가 사랑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사소하게 스쳐가는 인간의 감정이든 간에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뭔가 곱씹을 수 있게끔 만드는 영화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사랑류의 영화들은 그래서, 내가 그간 해온 상업적인 로맨틱 코미디와 결이 좀 다르다. 그렇다고 그간 해왔던 작품을 무시하거나 낮게 보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역할은 이미 해봤으니, 배우로서 나이 들어가면서 좀 더 깊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 거다. 킬링타임용 영화보다는 보는 이에게 고민거리를 남겨주는 영화가 좋다.
영화 제작이나 기획에 관심이 있는 건가.
제작자나 기획자는 아니지만 그 분야에 관심이 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영화를 제작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쪽은 아니고, 좋은 영화를 기획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물론 배우로서 열정을 갖고 연기에 충실하는 건 기본이고.
전도연과 함께했던 <남과 여>같은 영화가 본인 성향에 맞을 것 같다.
맞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한 거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많이 봐주고, 사랑해주기에는 힘들 거라고 생각 했다. 다 지나서 얘기지만.(웃음) <남과 여>홍보할 땐 이런 얘기 못 하니까.(웃음) 처음부터 내 취향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열광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라이언 고슬링과 미셸 윌리엄스가 나온 <블루 발렌타인>이나, 사라폴리 감독의 <우리도 사랑일까>같은 게 좋다. 사라폴리는 할리우드 아역배우 출신인데 나랑 동갑이다. 당신도 한 번 봐라. 그러면 아마 결혼하기 싫어질 거다.(웃음)
(한참 고민하다가)소소한 행복이 듣기엔 쉬운데, 실제론 쉬운게 아닌 거다. (다시 한참 고민하다가)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인가보다.(웃음)
다른 배우들도 이 질문이 가장 어렵다고 하더라.(웃음)
아! 오늘 새벽일이다. 잠이 너무 안 와서 네 시간 정도를 침대에서 뒤척였다. 원래는 모바일 게임을 안 하는데 하도 잠이 안 와서, 시간 떼우기용으로 깔아 뒀던 포켓볼 게임을 켰다. 전 세게 유저들과 대결 할 수 있는 게임이이라서, 프로필을 눌러보면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다 알 수 있다. 가끔 한일전도 성립된다. 아무튼 서로 게임머니를 베팅해서 싸우고 이기면 그 돈을 따가는 거다.(으하하) 내가 평소에는 아주 조금씩 베팅을 하는데 어제는 그렇게 힘겹게 모아뒀던 게임머니를 ‘에라 모르겠다’하고 한 방에 걸고 게임을 했다. 그걸 이겼다! 그 잠깐의 찰나에 얼마나 떨렸는지. 행복한 사례라기엔 너무 초라한가.(웃음) 자세히 생각해보면 요 근래 소소한 행복들이 많았을테지만, 당장엔 이게 기억에 난다. 새벽 4시에 웃으면서 잠들었다.
2016년 7월 19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pgot@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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