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태주라는 인물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마지막 태주의 대사도 상현이 하면 안되냐고 졸랐다니까. 하하” 10년 숙원 영화의 시나리오를 처음 본 후 가진 송강호의 첫 감상 중 하나다. <박쥐>의 태주는 뱀파이어가 되는 신부 상현(송강호) 못지 않게 오랜 시간 회자될 문제적 캐릭터다. 신과 본능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상현의 욕망을 쥐고 흔드는 태주는 러닝타임 내내 마녀적인 매력으로 번뜩인다. 보호를 명목으로 학대하는 라여사(김해숙) 밑에서 자라고 그녀의 병약한 아들 강우(신하균)와 결혼한 태주는 모자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욕망은 물론 의지와 감정까지 탈색된 여자. 식물처럼 살아가던 그녀는 상현을 만나면서 비로소 동물적 욕망에 눈을 뜬다. 억눌렸던 욕망의 폭발은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악마성으로 휘발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이런 태주에게는 팜므파탈, 요부 같은 수식어도 구태의연하다.
거침없이 발산하다
그런 호감 가는 첫 인상 때문이었을까. 김옥빈은 처음부터 육체적 쾌락을 갈구하고 악마적인 기행을 일삼는 태주 안으로 들어가기를 서슴지 않았다.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몰고 온 노출 신으로 주저하진 않았을까 하는 우려는 외부의 시선일 뿐이다. 김옥빈을 촬영현장으로 이끈 것은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본능이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말 그대로 놀랐다. 그래서 하겠다고 했다.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웃음) 이야기와 테마 그리고 살아서 움직이는 캐릭터들 모든 것에 끌렸다. 영화의 부분에 불과한 노출 신 때문에 이 영화를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20대 초반의 나이를 관통하고 있는 배우로서 극적인 감정 변화를 겪는 인물을 온전히 이해하고 표출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을까. 이 당찬 배우는 “복잡한 게 많은 인물이어서 오히려 할 것이 많아서 신났다”고 명쾌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김옥빈은 영화에서 울고 웃고 뛰고 뒹굴며 스크린을 종횡무진 한다.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때는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다했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송)강호 선배님의 목도 졸라보고. 하하”
배우고 또 배우다
박찬욱 감독은 김옥빈에게 이런 열정의 발산을 위한 멍석을 깔아주었다. “감독님하고 사전에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님은 평소에는 가만히 계시다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이따가 어떻게 연기할거야?’라고 상냥하게 물어보신다. 내 의견을 말하면 그 장면에 대한 최소한의 디렉션을 전달하시고 많은 부분을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두셨다.” 덧붙여 그녀는 박찬욱 감독의 여성성(?)으로 교감이 더 쉬웠다며 장난스러운 소감을 전한다. “감독님은 말하는 것부터 행동까지 완전 여자다. (웃음) 옆집 언니 같다고 할까. 여자 스태프들하고 섞여 있으면 얼굴을 보지 않는 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그래서 여자 배우로서는 더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현장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는 김옥빈에게 송강호를 비롯해 김해숙 같은 대선배들과 연기를 함께한 것은 그야말로 매혹적인 경험이었다. “선배님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태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촬영장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송강호 선배님이나 눈동자를 움직이는 행위에도 다양한 표현법을 시도하는 김해숙 선생님의 연기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함께 연기하면서 촬영장에서 배우가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있어야하는지를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2009년 5월 7일 목요일 | 글_하정민 기자(무비스트)
2009년 5월 7일 목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