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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어둠을 뚫고 번개처럼…'살인의 추억'을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3년 5월 2일 금요일 | 이해경 이메일

제가 <살인의 추억>을 본 날 저녁 뉴스에 유시민 의원이 나왔습니다. 선서를 하려고 국회 단상에 나와 서 있는 그의 활짝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상큼하고 시원했습니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고 의석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인데, 제가 보기에는 깔끔하고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었습니다. 일터에 나오는 첫날이니 정장을 입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몰상식하게 화를 내며 나가버린 의원들이 수십 명이었다니, 유시민 의원이 굳이 캐주얼하게 차려 입은 까닭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본 회의가 시작된다는 구내 방송이 여러 차례 나갔는데도, 30분이 지나도록 안 들어왔다면서요? 넥타이 졸라매고 성실하게 일하기로 국민 앞에 예를 갖춰 엄숙히 맹세했을 그 의원 나으리들 말입니다. 글쎄요, 정작 목 둘레가 자유로운 옷차림을 좋아해야 할 이들은 그들이 아닐까요? 누가 누가 큰 목소리로 고함지르나 다투는 데에는 티셔츠가 훨 유리할 텐데… 저는 아예 의원 선서 같은 절차는 없어도 좋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패션에 관해서는… 자켓 안에 라운드 티를 받쳐 입지는 않는 편이구요. 저의 취향일 뿐이지요.

영화 <살인의 추억>에 대한 글을, 한 초선 의원의 복장을 둘러싼 국회의 소란으로 시작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화에서 세 형사가 용의자를 추격하다가 놓치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있거든요. 쫓기던 자가 숨어든 곳은 자신과 똑같은 복장을 한 노동자들이 북적거리는 야간의 공사 현장입니다. 이럴 때 유니폼은 일종의 보호색이지요. 용의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형사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요. 그런데 핏발 선 박형사의 눈에 확 들어온 용의자의 표식은 무엇이었나요? 등을 구부린 한 노동자의 허리춤에 삐져 나온 빨간 팬티. 영화에서 범인이 노렸다는 그 빨간색이었습니다. 영화 속 그 시대의 숨통을 조였던 레드 컴플렉스와 꼭 연관지으려는 것은 아니구요. 그저 그렇게 영화 생각과 함께, 유니폼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들로 제 머릿 속을 채우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구분이 안 가는 의원들의 옷 색깔을 못마땅해하며 뉴스 화면을 바라보다가 말입니다.

지난 해 여름 온 나라에 물결 쳤던 붉은 옷의 감동을 우리 모두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 저는 빨갛게 도배된 관중석이 민망하고 거북했었습니다. 그 색이 빨간색이어서가 아니라 한 가지 색이어서 그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일사불란보다는 자발적 일체감에 가깝다고 느끼면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저의 유니폼 컴플렉스는 앞으로도 여전할 것 같습니다. 다 옛날에 입었던 교복과 군복 탓입니다. 교복처럼 입고 다녔던 군복 비슷한 옷도 있었지요. 제가 그 제복들을 그저 싫어하기만 했다면 복잡할 게 뭐 있겠습니까. 모두 추억이 방울방울 솟게 하는 그런 옷들이지요. 참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구요? 그래도 많이 다르지요. 모르거나 잊으면 다 비슷해 보인답니다.


1986년에 처음 일어났다지요? 영화에서 다룬 화성 연쇄 강간살인사건 말입니다. 전들 그 연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영화 본 뒤에 검색해 보고 알았지요. 아무튼 처음 범행이 저질러진 그 해 9월이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을까요? 아, 그 전 해에 출옥을 했겠군요. 저 말고 유시민 의원이요. 그 분 그렇게 캐주얼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저요? 저도 고생이 많았죠. 그때 아마 상병 계급장 달고 있었을 거예요. 근무했던 부대가 화성 근처에 있지는 않았으니 괜한 의심은 마시구요. 군대에서 그 사건을 접하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역시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별 생각이 없었나 보죠. 다른 큰 일들이 많아서 그랬을까요? 한 마디로 시국이 어수선하기는 했죠. 이듬해 봄에는 헌법을 짓밟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자가 헌법을 지키겠다고 변덕과 고집을 한꺼번에 부리는 웃지 못할 코미디도 벌어졌고, 누가 죽고 누가 다치고 누가 끌려가고… 그럴 때는 역시 군대가 젤로 안전하죠. 군복 입고 있으면 누가 누군지 잘 모르잖아요. 빨간 팬티만 안 보였으면 영화 속의 억울한 그 용의자도 무사했을 거라구요. 그렇게 저는 유니폼 속에 숨어 보호 받는 동안, 좁아 터진 이 땅덩어리 어딘가에서는, 소녀부터 할머니까지 공포에 떨며 줄줄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영화는 저에게 번개처럼 상기시키고 싶은 걸까요? 그 추악한 살인의 세월을…

정색을 하고 한 가지 묻겠습니다. 당신은 누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찰도 두 손 들었는데 범인이 누구인지는 누가 알겠냐고 반문하시겠습니까? 하기는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자신할 수도 없으니 딱 집어 누구라고 말하기가 곤란하기도 하겠네요. 그럼 한 발 물러서서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범인을 배후에서 조종한 세력은 없다고 보십니까? 있다고 보신다면 누구라고 보십니까? 그렇게 떠넘길 생각 말고 니가 한 번 맞혀 보라며 저에게 떠넘기시겠습니까? 안 되겠네요. 이럴 때는 고문을 해야 거짓 자백이라도 받아낼 수 있을 텐데, 사건이 미궁에 빠져 잊혀지는 동안 세상이 달라져서, 그런 짓 하면 쇠고랑 차게 생겼으니… 궁여지책으로 우리 이 사건에 대해 궁리를 많이 했을 봉준호 감독의 자문을 구해 볼까요?

아, 영화에 다 밝혀 놓았다는군요. 범인은 영화에서도 역시 중요한 인물이니까 맨 나중에… 예상한 대로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아저씨라니까 저도 한 자리를 차지하겠네요. 혹시 당신도? 공범들이 셀 수 없이 많은 덕에 우리 그 속에 파묻히면 죄가 좀 가벼워질까요? 다들 비슷비슷해서 골라내기 힘들 테니, 의사당 패거리들처럼 반말 짓거리로 나대지만 않으면… 꿈깨라구요? 그게 아니라, 이근안도 알고 보면 평범한 가장일 텐데, 아무렴 우리가 그 작자보다야 가벼운 벌을 받는 게 순리가… 네? 아, 착각은 자유라네요. 이근안은 고문하는 짬짬이 집에 전화해서 처자식은 물론 강아지 안부까지 챙기는 보기 드문 가장이었답니다. 그래서 저지른 범죄의 격도 우리와는 비할 바 없이 높다네요. 함부로 엉기지 말랍니다. 참, 내 정신 좀 봐. 우리 뒤를 봐 주던 든든한 빽을 잊을 뻔했네. 감독님, 우리의 배후 세력은 누구예요? 뭔가요?


제가 심심해서 호들갑을 좀 떨어 봤습니다. 감독은 차분하게 답하네요. 영화 속에 쫙 깔아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살인의 배후를 영화의 배경에다 심어놨다 이 얘기지요. 어두워서 잘 안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바로 어둠이었습니다. 시골 마을에 찾아오는 자연스런 밤이 평화로우면 평화로웠지 어떻게 살인을 부추겼을까요? 영화에는 다른 어둠이 하나 더 있습니다. 등화관제로 상징되는 시대의 어둠. 억지로 불을 끄고 문을 닫아걸고 셔터를 내려야 하는, 강제와 억압으로 쥐어짜낸 어둠. 그 어둠이야말로 범인이 숨어서 제멋대로 날뛰기에 가장 좋은, 가장 무서운 유니폼이었습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우리네 이웃들은 끽 소리 못하고 얌전히 틀어박혀 어둠 속에 자행되는, 아니 어둠이 자행하는 폭력에 눈 감고 있었지요. 영화에서 유일한 목격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정상이 아니잖아요. 정신이 이상하지 않고는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희대의 살인 현장을 눈에 담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는 결국 살아남지 못하지요. 누구처럼, 또 누구처럼. 강간을 당한 것은 이미 그 시대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둠도 많이 걷혔구요. 그래도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안 그럴 수가 없는 거지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말은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달라지긴 분명이 달라졌으니까요. 그 다름에 애써 눈감고 투덜대기보다는, 자기 안에 스며든 어둠이 여전히 남아있지는 않나 살펴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혹시 아직도 칙칙한 유니폼을 벗지 못하고 숨어서 두리번거리는 불우한 이웃이 있지는 않나 둘러보는 편이… 사스만 무서워하지 마시구요. <살인의 추억>이 대단히 훌륭한 영화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2프로쯤 부족해서 아쉬움이 남지요. 하지만 영화를 놓고 그런 걸 따지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참, 유시민 의원이 다음 날 입고 나온 정장도 괜찮던데요. 연한 쥐색 싱글이 돋보였고 연두색 넥타이도 산뜻했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제 느낌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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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1017
빠바바밤 빠바바밤....
수사반장은 음악이 좋아...ㅋㅋ   
2010-03-16 15:52
moviepan
ㅎㅎ   
2010-03-07 14:52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7
theone777
ㅎㅎ   
2007-08-29 19:09
imgold
"밥은 먹고 다니냐,,," 는 대사는 정말 소름이 쫙~   
2005-02-02 00:59
imgold
두말하면 잔소리..정말 한국영화의 추억이 될만한 영화.   
2005-02-0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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