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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슬픈 동화
피노키오 | 2003년 7월 15일 화요일 | 박우진 이메일

대부분 오래 전에 요약본으로 읽었을 어른들에게 콜로디의 동화 [피노키오]는 흔히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쯤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나온 완역본을 읽다보면 그것이 결코 동심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기초한 판타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잦은 '~해야 한다' 식의 문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훈계조가 좀 불편하기까지 할 정도로 기존 질서를 강요하는, 철저히 '어른' 입장을 대변하는 '교육 서적'에 가까운 까닭이다. 나쁘다기보다는 어리석다는 이유로 피노키오에게 닥치는 일들이 너무나 가혹해서 그것은 모험이 아닌 형벌처럼 보인다. 약간 ‘다르게’ 태어난 피노키오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지 못하고 결국 ‘정상인’으로 ‘만든’ 후에야 받아들이는 사회의 편협함이나,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이 대표적 훈육 기관인 학교 체제에 아이들을 일률적으로 편입시키려는 도덕적 당위성 등은 [피노키오]가 상당히 보수적인 텍스트임을 입증한다.

솔직히 나는 이런 이유로 [피노키오]가 어린이들에게 적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선악의 명백한 구별에서부터 세상 이치가 시작된다는 [피노키오]의 단순한 교훈은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이해하는데 별반 도움이 안 될 뿐 더러 인간의 풍성한 상상력을 재단하고 보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 없이 지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원작에 가장 충실했다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피노키오> 역시 근본적으로 이런 맹점을 갖고 있다.

‘원작에의 충실도’를 공언한 만큼 <피노키오>는 원작의 요약에 가깝고 따라서 러닝 타임의 한계 때문에 빠르게 진행되는 사건의 연쇄들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제페토가 소란스런 통나무를 보자마자 인형을 만들어도, 뚝딱거린 지 채 몇 초 지나지 않아서 피노키오가 멀쩡히 뛰어다녀도 망치에 눌린 귀뚜라미가 아무렇지 않게 다음 장면에 다시 나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잔소리를 해대는 희한한 상황도 이미 원작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냥 당연해진다. 이처럼 플롯에서의 해석의 문제가 제거되면서 한층 돋보이는 것은 영상미. 포스터의 몽환적인 느낌이 고스란히 스크린에 펼쳐진다. 최대한 동화적인 세트, 조명, 의상 등이 영화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고전적인’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분장과 등장 인물들 간의 합의만으로 캐릭터를 구분해야 하는 연극적 특성은 이 영화의 주요한 코믹 요소 중 하나로 사용된다. 단지 꼬리를 달고 수염을 그려 넣는 것만으로 여우와 고양이가 되거나 머리에 더듬이를 붙였다고 귀뚜라미가 되는 ‘사람’들이라든지, 분명히 사람의 모습으로 나무인형 취급을 당하는 피노키오는 최대한 ‘리얼한’ 영화적 전통에서 낯설어지며 엉뚱한 유머가 된다.

그러나 머리가 슬슬 벗어지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오십 줄의 아저씨가 고깔모자를 쓴 채 천진하게 피노키오를 연기하는 것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기이한 이질감은 매혹적인 색감의 영상마저 순진한 아이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직접 피노키오 역을 맡으면서 영화는 의도하지 않은 엽기 코미디로 나아간다. 베니니가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연기를 하면 할수록 영화는 이상하고 우습다. 원래 알고 있던 피노키오의 이미지보다 더 과장된 베니니의 호들갑은 때때로 안쓰러울 정도다.

피노키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따뜻한 색채의 화면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강렬한 유혹이지만, 다만 영화가 의도하는 대로 선호적 해독을 할 수 있는 무구한 시선을 갖거나 한 오십 사내의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대해 지적하는-나르시시즘을 진심으로 비웃을 수 있지 않고서는 <피노키오>를 온전히 즐기기란 어려워 보인다. 세월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혹은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는 듯 보이는 베니니의 열정적인 연기가 어딘지 아득하게 슬프기 때문이다.

1 )
ejin4rang
슬픈 동화다   
2008-10-16 09:5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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