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한국영화에 예술영화 논쟁이 있었더랬다.
강한섭 평론가가 당시만 해도 독보적인 존재였던 영화잡지에, 그것도 릴레이로 화두를 주르륵 풀어놨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술영화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이것이 무슨 소린가 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은 이해 가는 부분이 생겼다. 영화를 개인의 예술적 창작물로만 보던 영화 비평의 작가주의적 관습에서 벗어나 문화적 산물로서 영화를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었던 듯하다. 소위 현재 유행하고 있는 ‘문화연구’적 접근 방식 말이다. 그런데 아마 한국에서 그 이론은 백두대간이 묵묵히 버텨낸 지난 10년 동안의 미스터리를 풀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작가주의에의 외로운 동참’이 한 때, 예술영화의 카피였지만 이것은 단순히 ‘작가주의’ 대 ‘문화연구’라는 고루한 이론적 대립을 통해 바라볼 게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쓸모없는 공허한 영화적 이론의 대립 말고도, 스스로 대견해진 ‘백두대간’의 역사는 분명 지난 날 작가주의의 휘황찬란했던 역사를 넘어, ‘작가주의’가 하나의 장르로 축소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믿음직스럽다. 스스로 ‘역사’가 되고 있는 백두대간과 첫 개봉작 <희생>과 <노스탤지어>의 재개봉에 즈음하여 나름대로의 소회에 대해 간략하게 써보고자 한다.
10년 전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흥행기록을 세웠다.
좋은 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내러티브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희박해지고 이미지들만이 뚜렷이 각인되는 것처럼 <희생>은 ‘불타는 집’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아이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영화이다. 특별히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집이 불타기 전 집안 구석구석 마호가니 광택이 흐르는 매끈한 목조가구들과 손 때 묻은 집기들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불타는 집을 지나 죽은 나무로 향하는 작은 숲의 드문드문 나 있는 나무 사이로 한 마리의 하얀 말이 가로지르는 풍경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이런 이미지들의 연속이 점점 희박해져가는 스토리 라인 대신에 신화와 종교적 구원 그리고 인간에 대한 천작이 그림처럼 두드러지는 영화들이다. 구원을 위해 불을 지르는 일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제의적 행위들 사이로 보이는 하얀 말은 단번에 그 일상적 행위의 비범함을 신화적 차원으로 고양시켜낸다. 지독한 롱테이크의 향연은 이 모든 것을 트래킹 쇼트로 연결시켜내며 영화는 바닷가 작은 나무 아래 누운 소년의 모습으로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그러나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해서 <희생>에 이르기까지 그는 결코 롱테이크로 점철된 따분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다.
<노스탤지어>에 나오는 폐허는 <거울>에서처럼 낙숫물이 흘러내리고, 주인공이 거쳐가는 냇가는 <스토커>에서처럼 방향을 상실한 듯 어지럽다. 우리가 이미지를 단지 이미지 그 자체로만 본다면 이것은 지루한 풍경일 뿐일지도 모른다. <안드레이 류블로프>에서 길 떠나는 이의 풍광 역시 전형적인 중세의 풍광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속에서 어쩌면 영화의 내용을 통해 혹은 그 이미지의 표피를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우리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발견하게 되는 깊숙이 사색에 빠진 스스로의 모습일 것이다. 아무 것도 해독하지 못하고 결코 완벽히 이해될 수 없을 지라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깊은 감정의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거의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완벽함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영화적 재현의 순간들이 주는 특별함은 보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갈구하게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초창기의 시네마테크의 출발점과 백두대간의 출발점을 비교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천년에 이르는 중세를 견뎌내는 구원에의 갈망이 지금 현재 결코 불가능할 것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그 가장 큰 가능성을 내보일 영화는 다름 아닌 타르코프스키의 재개봉작 두 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