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수진 기자
‘무언가’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 영화의 서사는 지극히 단조롭다. 그 여자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느릿한 카메라는 ‘그 여자, 정혜’를 하나의 정물처럼 은근하게 묘사한다.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그 여자, 정혜’는 쇼파에서 일어나 씻고, 옷입고, 직장인 우체국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쇼파에 앉아 홈쇼핑 채널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잠이 든다. 다시 자명종 소리가 울리면 씻고, 옷입고...
눈에 띄는 커다란 활기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 여자, 정혜’의 일상은 스크린 밖 우리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이 밋밋하게, 그러면서도 한편 배우 김지수의 이미지와 엇나가지 않는 묘한 정결함이 깔린채 조용히 흘러간다. 고상하게 심미적인 일상도 아니요, 숨통이 턱턱 막히는 강팍한 일상도 아닌, 무미건조한 일상. ‘그 여자, 정혜’가 행복한지 아니면 더할 수 없는 지옥같은 기분인지 우리들로선 잘 알 수가 없는 그냥 ‘일상’말이다.
왠지 모르게 슬프다든가 우울하다든가의 감정들을 떠올리게 하진 않는, 말그대로 건조한 일상에 이 영화는 관객들의 눈을 잡아챈다. 그 일정한 호흡 속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차츰 갈려지게 된다.‘그냥 이렇게 도시인의 관습적 일상을 영화적으로 정밀하게 해부하는, 그렇고 그런 영화군. 예술영화인양 흉내내는 영화!’, ‘저 일상의 풍경 뒤에 어떤 것들인가가 복병처럼 숨어있다가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강렬한 펀치를 위해 서사를 자꾸 은폐하고, 지연하는 영화말야’등등.
애써 틀어막으려 해도, 머릿속에 자꾸 솟아오르는 물음표 속에 ‘그 여자, 정혜’의 어쩐지 남다른 것만 같은 행동들이 눈에 띈다.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기 시작한 그녀는 우체국에서도, 동료들과 모인 술자리에서도, 고양이에 대한 ‘강박적인(강박적으로 보이는)’걱정에 시달리며,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곤 한다.
간간이 생뚱맞은 행동들속에 옅은 고독감도 풍기는 그녀, 알고보니 그녀의 일상 속엔 미처 생각지 못한 ‘낯선’ 심연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춘기시절, 외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기억은 성인이 된 그녀를 섹스를 동반한 사랑으로부터 구역(嘔逆)나게 만든다. 이런저런 영화들에서 인물들이 지닌 트라우마의 원인으로 비쳐졌으므로, 일견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녀의 고통이, 이 영화의 견고한 무채색톤을 희한하게도 통속의 서사로 떨어뜨리지 않는 건, ‘그 여자, 정혜’가 놓인 심리적 공간 때문이다.
그 어두운 사건 후에 적어도 지금까진, 그녀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가 알게돼, ‘죽일 놈 살릴 놈’하며 찢어죽여도 결코 풀리지 않을 복수의 결의 등은 벌어지지 않았고, 제대로 일상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는‘정신병’속에서 그녀의 삶이 환멸과 자기학대의 현시(顯示)로 지워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여졌던 그녀의 ‘친근한’ 일상은 갑자기 짙은 페이소스로 치환되기 시작한다. 관객들이 봤던 그녀의 일상 속엔, 기억을 피해가려는 처절한 몸짓따윈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 사실 자체를 망각하려는 안타까운 의식의 파편들도 보이지 않았다. 짐짓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흘러갔던 일상들이었지만 ‘그 여자, 정혜’가 영화의 마지막, 사건의 가해자인 외삼촌을 찾아가면서 관객들은 불현듯 깨닫기 시작한다. 그녀가 실상 치유되지 않은 고통 속에서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음을. 뼛속까지 차오르는 어떤 기쁨이나 황홀감도 없이, 그녀의 일상은 단지 공포스런 반복성을 띠고 있었음을. 그리하여 그녀가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지속해왔던 것도 그녀 자신에겐 결코 정직하지도 인간적이지도 않은 삶이었음을.
‘불행은 자체의 개별적인 내용보다도 스며들고 침투한 존재에게 친숙한 것으로 되어버리는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사람을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만든다’는 어느 소설의 표현처럼, ‘그 여자, 정혜’가 보여주는 지루한 일상은, 상처를 까발리고 차라리 피흘리는 영혼이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일상보다, 어느 면에서 더욱 아프다.
그녀가 옆집에서 들릴 정도로 크게 틀어놓는 자명종 소리는 자꾸 상처의 기억으로 향하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경고를 보내는 의미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의 허망함을 알리는 소리지만, 자신의 지금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그녀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우는 소리말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 정혜’가 놓여있는 짐짓 평화로운 일상은 사실 고통의 주름이나 틈의 공간에 놓인 심리적 공간임을 조용하게 일깨워준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제목이 ‘여자, 정혜’라고 명명된 것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된다. 처음, 그녀는 굳이 ‘정혜’가 아닌, 우리들 중 누군가라도 상관없는 인물인 것만 같다. 그녀는 실상 온전한 성인이 되기 위한 내부의 성인식을 거부한채, 정신적으로 강박당하는 인물이지만, 모두 한 두 가지의 작은 상처덩어리쯤은 안고 사는 우리들 주변의, 그 무수한, 익명화된 ‘여자’여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꾸며진 안정’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상처와 극단적으로 맞설려는 충격적 이미지 속에서 그 익명성을 극복하고, ‘정혜’라는 개별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영화가 ‘남성 감독이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는 등의 호의적인 평가는 솔직히 필자는 잘 모르겠다. 주인공이 여자든, 남자든 그게 이 영화의 정서를 크게 좌우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또한, 이 영화가 유럽풍의 냄새가 나는 카메라 워크, 서사 느낌 등을 가진다고 해서 대단한 영화라는 식의 평가를 내릴 깜냥도 필자에겐 없다.
중단하고 싶어도 쉽게 중단할 수 없는 우리들 삶, 그속에서 고통에 대한 가역(可逆)반응없이, 사실 적절한 해결 방법이 뭔지도 알길 없는 채,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가진 흐릿한 괴로움을 이 영화 속에서 문득 느끼게 된건 왜일까. 반복적이고, 일순 지루하게 느껴지는 우리들 삶속에 각자 답답한 체증처럼 고통이 한켠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또 본질적인 외로움이 스며있다는 생각들이 밀려드는 건 왜일까. 아마도 새로울 건 없지만, 그 정서야말로 우리들 삶을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이 아닐까.
● 최경희 자유기고가
‘정혜’는 <여자, 정혜>의 영어제목처럼 Charming Girl의 표본이다. 그러나 이게 이 영화의 ‘함정’이자 관객을 ‘기만’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남자’ 감독이 여성의 ‘일상’을 내밀하게 다가서서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영화 즉, 새로운 대안의 ‘페미니즘’의 영화가 탄생되듯 언론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성찬은 사실 과도하다 싶을 정도다. 엄밀히 따지자면 <여자, 정혜>는 페미니즘으로 ‘오독’되는 여성영화의 한계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선례적인 작품으로 봐야 정확하다.
정혜(김지수)는 쇼파에서 눈을 뜨고, 자명종이 울리기를 매일 아침 기다린다. 식당도 가던 곳만 가고 우체국에서의 업무마저도 ‘반복’되는 일상 위에 얹혀 있다. 이때 카메라는 관찰자 입장에서 정혜의 생활 깊숙이 들어간 상태다. 카메라는 정혜의 생활에 어떠한 자의식도 투영하지 않지만 감독의 ‘미학적’ 자의식에 갇힌 상태가 된다. 즉, 무언가 대단한 의미가 있듯, 정밀하게 잡아낸 정혜의 몸짓, 표정, 생활 등은 ‘여성성’이라는 관습적인 생각에 관객을 묶는다. 보통의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영화란, 딱 <여자, 정혜>처럼 형식적 ‘미’가 강조된 스타일을 일컫는다. 일단 여기서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는 형식적인 스타일에 여성성을 담아내, 예술적 성취를 일궈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예술영화의 형식을 ‘답습’하는 것에 그쳤고, ‘여성성’이라 함도 ‘남성성’과 대비되는 선에서의 보편적 여성성을 지칭하는지 엄밀히 따져봐야 한다.
▶ 먼저, 영화의 형식이 문제다.
핸드헬드 작법으로 잡아낸, 정혜의 생활에서 카메라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선 카메라의 움직임은 역으로 관객의 심리를 건드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식의 참여를 유도한다. 하지만 이것은 감독의 미학적 자의식에 관객이 반응한 결과지, ‘나열’되는 정혜의 일상에 어떠한 영화적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자폐적인 정혜의 지루한 생활을 열거해서 인물의 내면을 비치게 하려는 영화의 형식은 사실 텅 빈 공간, 그것의 다름 아니다. 카메라는 정혜의 일상을 끊임없이 세밀하게 관찰하지만 ‘덜어내는’ 형식은 점차 무의미해지고 결국 ‘형식’만 남게 된 영화를 가지고 관객은 자신들이 무언가 대단한 ‘의미’를 놓쳤다면서 빈곳을 채워 넣으려고 한다.
여자 정혜, 누구나 남자가 아닌 이상, 여자 XX가 될 수 있다. 정혜라는 글자 앞에 ‘여자’라는 수식어는 그 익명성을 대신하는 명칭일 것이다. 결국 제목부터 정혜는 일반적 여성들을 상징하는 기호로 등장한다. 일상의 나열이 단지 지루할 뿐, 제목에서 미리 보편성을 획득한 ‘여자’ 정혜는 여느 여성과 별반 ‘차이’가 없는 상태다. 다시 말해, 정혜는 보통의 여성이다.
최소한의 사회적 관계만 맺은 그녀의 일상이 답답하게 느껴지더라도 ‘여자’ 정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납득되면서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낼 여지도 생긴다. 또한, 좁은 반경의 사회적 관계이기에 그 빈틈이 남보다 더 커 보이는 정혜의 생활 안에 차소리, TV소리, 주변화된 인물들의 소리가 정혜의 언어 대신 일상을 채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정혜’나 ‘관객’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열거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다.
▶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 와서 밝혀진 정혜의 과거 즉, 트라우마로 인해 그녀의 일상성은 보편성을 ‘전복’해버린다.
나열하던 영화의 형식은 이제 보니 ‘미스터리’의 단서였던 것이다. 정혜의 지루한 일상에서 그나마 단서라 할 만하게 버려진 새끼 고양이 주어다 기르기, 실연 당한 술 취한 남자 안아주기, 우체국 등기로 원고 부치는 첨단 인터넷문화의 소외자인 남자(황정민) 집으로 초대하기 등이다. 나열하고 보니 정혜 같은 내성적인 여성이 저지른 사건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례적인 사건으로 보이지만 막상 영화 안에서는 지루한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일상’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과거의 한 시점에 벌어진 상처를 덮어 버리는 치유의 몸부림이자 최소한의 방어기제였다니, 정혜의 정체성은 이 지점에서부터 보편적 ‘여성성’을 벗어나 버린다. 영화 속 정혜의 모습은 자폐적일지는 몰라도 일반적 남성이 칭하는 참한 여성스러움의 표본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이 모습이 어쩌면 과거의 상처로 인해 만들어진 모습이자 현재 그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해석하기에, 영화의 형식은 정혜의 일상에서 다른 것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여자’ 정혜, 일명 ‘챠밍 걸’인 정혜는 대체 누구의 시선으로 영화 속에 비쳐진 걸까? 물론, 감독이다. 이 뻔한 질문에 <여자, 정혜>가 넘어서지 못한 ‘딜레마’가 있다. 카메라는 부재하던 ‘남성’을 대신해 정혜의 일상을 관찰한다. 정혜의 모습이 실제인가, 아닌가를 따지기에 앞서, ‘여자’ 정혜가 획득한 보편적 여성성(일상성을 포함해서)은 누구의 잣대로 스크린에 비쳐줬는지가 여기서는 중요하다. 반복적인 말이 되겠지만, ‘남성’인 감독의 잣대이자 시선이다. 대상을 확장해보면, 일반적 남성이 ‘여자’ 정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강간’을 당한 여성에게서 남성이 기대하는 [[‘이분법적’> 모습에서 정혜는 한 면만을 보여준 것이다.
결론부터 도출하자면, 강간을 당한 여성은 창녀가 되거나 정혜처럼 세상과의 접촉을 최소한 시킨 뒤 마치 수도사처럼 운신하면서 살 것이라는 남성들의 터무니없는 상상력의 발로에서 나온 모습이, ‘여자’ 정혜로 응축된다. 정혜는 (남성의 바램대로) 다행히도 창녀가 되지 않고, 정숙한 숙녀로 도 닦듯이 생활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안에서 ‘일상성’이라고 가치매긴 정혜의 생활은 치유의 과정이네 정체성의 확립이네 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로 의미화 되어 버린다.
지금까지 ‘일상’이라고 나열하던 여성(정혜)의 모든 것이 과거 한 시점을 축으로 ‘인과율’이 적용되고 해석되어 지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즉, 여성의 ‘일상성’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받은 상처 혹은, 남성이 삶의 영역에 침범한 순간부터 획득하고 출발한다. 정혜의 ‘보편성’은 남성중심 사회구조에서 파생된 보편적 남성성의 반대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결국 ‘여자’ 정혜는 여성의 성을 가진 온전한 ‘정혜’가 아니라 남성의 시선 안에 갇혀 코드화 된 여성이다.
감독의 자의식이 영화 속에서 정혜를 ‘중심’으로 주변인물을 타자화 시키고 남성을 극 안에 깊게 끌어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여자, 정혜>를 코드화 된 여성성을 재배열한 미덕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담는 그릇만 달라졌지, ‘정혜’는 자신이 갇혀 있음을 아직 깨닫지 못한 남자의 반대말 ‘여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