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 그런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그냥 저절로 눈이 떠져서 따뜻한 이불속에 잠시 파묻혀 있었다. 열어진 방문틈 사이로 미니카셋트를 통해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그 당시 인기 있었던 어느 여가수의 발라드풍 노래였다. 난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뭐라고 할까..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그런 느낌이랄까..(물론 그 당시에야 그런 생각을 못 했겠지만..^^) 상쾌한 아침에 여유있게 차한잔 마시는 그런 것 이상의 참 좋은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때 아침에 첫 상영하던 [8월의 크리스 마스]를 보고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뭐 특별히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아침의 상쾌함과 영화의 따스함이 내게 너무나도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수쥬]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이 바로 그러했다. 그리 춥지 않은 겨울 아침에 본 [수쥬]는 그렇게 나에게 소중한 기억을 가져다 주었다.
나에게는 멜로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주관적 견해가 있다. 영화의 여자 주인공은 아름답거나 귀여운 배우여야 하고 남자 주인공은 잘 생기거나 멋있어야 한다. 물론 어이없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영화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은 내가 멜로 영화를 보는데에 있어서 아주 크게 작용하는 관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화면이 이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는 화면의 톤이라던가 질감, 색상등이 모두 포함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름다운 화면속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펼치는 아름다운 얘기라고나 할까?..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멜로 영화에 대한 깨지 못할 관점이다. [수쥬]는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조금은 애매한 영화이다.하지만 잘 깨지지 않았던 내 관점을 조금은 깨어준 영화이다. 주인공들이 그렇게 이쁘거나 멋있지는 않다. 화면이 그다지 이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만은 왠지 모르게 따스했다. 아마도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였기 때문이 아닐까?
중국의 신예 감독 작품이어서일까?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만은 않다. 왕가위의 작품이 주로 밤을 배경으로 화려하고 현란한 조명과 카메라 기술을 선보였다면 로우 예(Lou Ye) 감독은 오히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걸맞게 어둡지만 부드러운 화면을 선보인다. 마치 동화속 사랑 이야기처럼..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이 영화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를 통한 1인칭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 된다는 것이다. 영화속의 주인공인 '나'는 영화내내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나'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상대방의 모습들. '내'가 이야기하며 떠올리는 장면장면들..'나'의 모습은 없고 그저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영화의 느낌을 우리들에게 더욱더 잘 전달해준다. 숲에 가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까만 어둠속에 눈을 감기 전에는 듣지 못했던 새소리와 물소리가 더욱 더 잘 들리듯이.. 그래서 감독은 오히려 '나'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조금은 어두운 톤의 화면을 보여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그리 길지 않다. 가끔씩 3시간 가까운 런닝 타임을 가진 영화들이 개봉하기도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자칫 잘못하면 정말 관객들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 대신 런닝 타임이 짧은 영화들은 영화를 싱겁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깊은 여운을 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기도 한다. 개인적이 견해로 봤을 때 [수쥬]는 후자쪽에 속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영화가 잘 이해는 안 됐지만 왠지모를 여운이 남아서 좋았던 것처럼 [수쥬]역시 그리 쉽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보고 난 후의 여운이 길게 남았다.
많은 멜로 영화가 다시금 겨울 극장가를 차지하고 있다. 사랑에 여러가지가 있듯 영화속의 사랑도 참 다양하다. 그 속에서 [수쥬]의 사랑은 과연 어떤 의미로 우리들에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비록 그 사랑이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가 없을지라도 가슴속에 무언가 남는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모두가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