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부활 지점을 찾듯 카메라가 날개짓을 한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보고 문득 떠오른 단어를 조합해보니 이랬다. 눈에 보이든 그렇지 않든 돌기를 가진 모든 감각의 물질은 감각의 능동태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 버렸다. 민아를 만난다. 보통의 고등학생으로서, 보통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길러지고 주변의 아이들과 적절히 정분을 쌓으며 그렇게 성장하는 그저 그런 조금 예쁜 보통의 아이. 공동체의 중력장이 강하게 작용하는 고등학교의 안뜰에서 그들은 뛰어 놀고 수다떨고, 공동체에 익숙하게 길러진다.
"죽음을 기억하라."
카메라 안팍을 사선으로 뚫고 지나가는 코멘트 한마디는 우리 머리 가까이 와서 피부를 핥고 지나가는 죽음의 육체적인 친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원론적인 공동체의 에너지는 그 궤도에서 벗어나 있는 아이들의 감각을 일찌감치 배제하고 거꾸로 공동체에 길들여져 있는 아이들의 감각은 고사시킨다. 하지만 고사(枯死)의 범인은 공동체만이 아니다. 중력장에 안에 끌려 들어간 육체를 지니고 있는 보통의 여고생들 역시도 감각(感覺)고사(枯死)의 수동태로서 자리잡는다.그들은 희생양임과 동시에 울타리 속에서 칼을 쥐고 있는 범인이다. 영화는 감각의 마비를 불러오는 공동체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 이미 전편은 그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일등하는 아이와 이등만 하는 아이의 미묘하고 일반적인 관계 속에서..
카메라가 시은의 귀를 뚫고 지나간다. 시은은 난청 증세를 보인다. 바깥의 충격에 민감한 송어의 예민한 신경처럼 시은의 귀도 칙칙한 서울의 공기처럼 기분 나쁜 주변 공동체의 밀도에 고사된다. 효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답답한 뚫리지 못한무언가 엉겨 붙어 있고, 효신도 숨막힐 듯 꽉차는 공기 속에서 육신의 죽음을 택한다. 그 사이에 공기의 밀도속에는 진실에 가까워지 듯 매끌매끌한 몸에 와닿는 물, 피, 그리고 광란 속에 섞여 있는 적막들이 들어와 있다. 왜곡된 언어, 막힌 공동체 속에서 가장 진실한 것과 가까운 규범화되지 않은 미끈한 육체의 감각들을 사라지게한 공동체에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향성 실사 표현이 아닌 시은의 머릿속과 민아의 두뇌, 그리고 여고의 화장실 벽을 타고 움직여 다니며 온갖 곳에 피와 물 비린내를 풍기고 다닌다. 리얼리즘 영화라면 그들은 공동체 속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 그리고 익숙하게 만드는 공동체를 풍장(風葬)시킬 수 없을 것이다. 풍장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사람은 주변의 공동체의 공기를 들이 쉬지 않고도 살아갈 수있는 초인 밖에 더 있겠는가? 효신의 영혼과 이미지의 조직은 감각의 상실에 희생된소수의 분노를 이미지인 거대한 눈을 이용하여 공동체의 공포를 잠재우려 막힘을막힘으로 공격하고 다수의 아이들에게 공동체의 공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린다. 그들의 눈에서, 몸에서 애절한 절규의 몸짓이 살아나는, 즉 진실의 감각이 육체에 와 닿는 순간 분노의 눈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 빗속에 그들을 풀어 준다. 비를 맞는 아이들, 비를 맞으며 우는 아이들, 눈물이 비가 된 아이들, 다시 그 비를 맞는 아이들, 비는 용서의 이미지로서 전편의 피가 뒤바뀐 모양이다.
솔직히 희망 없으면서 미래를 희망하고 그 희망하던 미래라고 불리던 21세기에 살아있는 육체들은 도달했다. 하지만 감각이 고사되어 버린 여고와 닮아 있는 서울 한 복판은 아슬한 스펙타클을 뿜어낸다. 그리고 손마디에 핏기가 말라버린 서울은 아직도 멍청한 공동체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희망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