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는 그런 우리의 관한 미야자키 식의 ‘모사’이자 ‘충언’을 해주는 매개체적인 인물이다.
18살밖에 안된 소피의 건조한 생활. 창문만 열어도 세상은 마법과 전쟁, 귀족풍의 낭만이 흐르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쉴새 없이 모자를 만들던 손의 속도를 재점검할 때만 창 밖을 응시한다. 짧은 단잠에 풍부한 꿈을 꾼 것처럼 수상한 마법사 하울과의 만남도 소피에게는 이어 붙이기 쉬운 현실의 자투리였을 것이다. 황무지의 마녀가 내린 저주로 인해 90세의 노파로 ‘변신’한 소피. 우연한 만남이 마법과 꿈이 혼돈하는 모험의 키워드가 되면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90세의 할머니가 된, 소피가 찾아야 할 답이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또는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처럼 소피는 익숙하지만 가슴 뛰는 여행을 시작한다. 물론 90세의 노쇠한 신체를 가진 게 앨리스, 도로시와는 틀릴뿐더러, 할머니 소피와 꽃미남 하울과의 뜨거운 ‘원조’가 아닌 원초적 ‘에로상황’도 연출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앞서 말했듯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테마가 ‘응집’된 작품이다. 노스탤지어 이미지를 규정 짓게 해주는 고정된 모티브들 역시 여지없이 배치된다. 반전주의, 엑조티시즘, 기계문명과의 이상적인 화합은 90세의 노파가 겪는 신기한 모험담과 어우러져 각각의 위치에서 전혀 다른 재미를 맛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야기의 짜임새 구조가 어딘가 모르게 허술해 보이는 것은 유사한 진행방식을 보이던 <천공의 성 라퓨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정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신’한 소피의 마법은 풀렸는지, 하울의 비밀은 무엇인지 전쟁이 소피일행에게 끼친 (그의 영화 하면 떠오르는 주제와 직결된) 연관 구조는 탄탄했는가? 에 대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하늘을 비행하던 소녀가 노파로 변한 차이를 받아들였듯이, 이건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노스탤지어를 이해하지 못한 우리의 우매함에서 나온 쓸데없는 의문일지 모른다.
소피가 소녀일 때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다가서기조차 어려운 미지의 그 무엇이었다. 허나, 마법에 걸린 소녀에게 마치 움직이는 성이 초대하듯이 입구를 열어준다. 다시 말해, 미야자키의 이상향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말 그대로 이상향이었다. 때문에 꿈으로밖에 남을 수 없던 그의 테마들은 저주에 걸려도 긍정적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소피를 통해 현실에서의 실현가능한 접점을 타진한다. 즉, 삶은 ‘마술’이 아닌 ‘마법’이다. 마술은 있어도 마법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삶 자체가 마법임을 은연중에 들춰냄으로써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동승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하울의 달콤한 목소리(기무라 다쿠야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쉽게 동화되었지만)가 18세 소녀의 각박한 현실의 ‘마술(저주)’을 풀어줬듯, 미야쟈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진짜 ‘마법’임을 믿어보자. 거기서부터 우리도 할머니 소피가 ‘회춘’하게 된 인생역전의 비결을 공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