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삼형제가 감독 및 주연을 맡아 묘사하는 백인 상류 사회 여성의 생태. <화이트 칙스>는 이렇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항대립을 나열한다. 물론 새롭지는 않다. 우연찮게 다른 계급이나 문화적 맥락에 휩쓸린 주인공들이 벌이는 소동은 코미디의 전형적인 설정이니까. 가령 전직 절도범이 경찰로 위장하여 경찰서에 숨어들고, 아버지가 가정부로 분장하여 이혼한 아내의 집에 취직하는 것이 코미디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 휩싸인 주인공들의 생존전략은 ‘따라하기’다.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에 대해 관객이 갖고 있을 ‘스테레오타입’화된 행동방식을 재연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짜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주인공의 강박관념은 필연적으로 ‘오버’로 연결되고, 이렇게 극적 설득력을 획득한 ‘오버’는 억지스럽지 않게 웃음을 유발한다.
진지한 코미디라면 바로 이 지점에 심각한 메시지를 심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이 근거 없거나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예민한 관객에게 그 영화는 자기반성적으로 읽힐 수 있다. 어쩌면 특정 집단의 위선과 허영이 타자의 눈을 통해 드러날 지도 모른다. 존 워터스의 위악적인 코미디가 노린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
물론 <화이트 칙스>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코미디는 그런 거창한 야심이 없다. 단지 남자가 여장을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을 잘 활용하여 더 많은 웃음을 제공하려할 뿐이다. 사실 이 영화가 세울 수 있는 대립의 각은 얼마든지 있다. 극중 두 흑인 남성들은 인종적 계급적 성별적 변신을 통해 백인 상류 여성사회의 핵심에 침투했고, 그들의 허영과 속물의식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어설픈 비판대신 비틀기의 대상이 된 “힐튼자매”나 “화이트 칙스”(중산층 이상의 금발 백인 여자를 조금 비하하여 부르는 말)들이 보더라도 코웃음 내지는 박장대소를 일으킬만한 ‘애교만점’ 따라하기가 있다. 사리분별 없어 보이던 윌슨자매의 행동들 속에서 실제 힐튼자매의 철없는 언행들마저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는 이해의 여지가 생긴다.
때문에 제목 <화이트 칙스>가 갖는 부정적인 의미는 희석되고 오히려 알고 보면 일반 소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역설하면서 급기야 하이틴 영화로 변질된다.
이렇듯 이 영화는 충분히 비판적일 수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오히려 인종간 성별간 화해와 이해에 도달하는 착한 영화가 되었다. 자신의 취향과 관계없이 백인풍의 팝 발라드를 부르던 소녀들이 힙합을 따라 부르거나 브리티니 스피어스 풍의 댄스 대신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가짜 윌슨자매에 열광하는 장면에서 이런 것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화해와 이해의 제스처는 가짜 윌슨자매가 진짜 윌슨자매와 똑같이 생겼다고 우기는 영화의 설정처럼 관객들에게는 기만적으로 보인다. 관객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보다 많은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한 무난한 설정일 뿐이다.
그러나 연관성이 떨어지는 상황들이 나열되는 시트콤적 구조에서 그것이 비판이든 화해이든, 일관된 의도를 지키지 못한 것은 이 영화를 단지 ‘웃기는 영화’ 이상으로 평가하기 주저하게 만든다. 그나마 이 영화가 애초에 의도한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관객은 충분히 달성가능한 목표로 보인다. 우리가 언제 진지한 영화에만 웃었던가?
P.S. <화이트 칙스>의 웃음의 백미라 할만한, 여성의 심리를 절묘하게 잡아낸 장면이 있다. 윌슨으로 위장한 마커스(말론 웨이언스)가 자신의 가방을 훔쳐간 소매치기를 죽자사자 쫓아간 이유가 형사로서의 직업의식 때문일까?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