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시절 부모님께 “잘 계시죠. 엄마!. 저 잘 있어요. 돈 5만원만 통장에 넣어주세요..아 벌써 근무 나갈 시간이네요. 그럼 이만...아 그리고 제 통장 농협으로 바뀐 거 잊지 않으셨죠? 군 생활이 원래 이래요.엄마!”라는 긴급 전보성 편지를 마지막으로 레터와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건만 이렇게 다시금 편지를 써내려가는 이유는 <인어공주>에서 보여준 삶의 고단한 모습이 오롯이 투영된 당신의 모습 때문입니다.
전 정말이지 <인어공주>가 이런 영화인지 몰랐습니다. 자전거에 올라탄 전도연이 한 없이 행복한 눈망울로 박해일을 향해 살포시 던지는 만면의 미소가 담긴 포스터를 바라보며 이 소생은 생각했었죠. 경국지색이요 절세미인에 다름 아닌 전도연이 마냥 부러운 놈 박해일과 무아지경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축으로 한, 여인네들의 무정한 핍박으로 삶이 점철돼온 나 같은 남정네들의 염장을 지를, ‘판타지성 로맨스물’이라고요.
하지만 그건 저의 속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영화를 맞닥뜨리며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번개가 내리치듯 불현듯 느낀 것이 아니라 가랑비에 한 모 두 모 빠져 대머리 되듯 시나브로 와 닿았다는 것입니다. 싱그러운 젊은 날의 예쁘고 착한 남녀의 질박한 사랑을 재미나게 보여 준 것 이상으로 <인어공주>는 나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에게 적잖은 시선을 던질 수 있도록 해준 동시대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영화였습니다. 아련한 추억에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팍팍한 현실의 삶까지 아우르며 껴안는 단단한 정서적 힘을 지닌 작품,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미덕입니다.
남루한 속옷을 걸친 당신이 전통의 녹색 이태리타월을 양손에 낀 채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힘껏 끌어올려 가열차게 퉤!퉤!하며 가래침을 내 뱉는 목욕 관리사로, 시쳇말로 때밀이로 등장하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빤스 끈을 따~악~딱! 치시며 거동하시니 참으로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강퍅한 현실을 정말이지 사실적으로 묘파하셨다는 말씀입죠. 유년 시절 어머니와 함께 대중탕에 갔을 때 본 후 아마도 처음이지 않았나 싶더군요. 일상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극히 자연스런 행태지만 스크린에서는 당최 마주 할 수 없었던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었습니다.
몇 푼 안 되는 삶은 계란 하나로 젊은 처자와 머리채를 잡고 한 바탕 소동을 벌이고,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졌지만 무기력한 생활력으로 인생을 부유하고 있는 남편을 향해 서슴없이 쏴대며 윽박지르고, 딸년에 대한 걱정스러움을 악다구니하게 드러내는 당신의 모습은 우리 어머니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그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늘 그렇게 속내를 드러내곤 하죠. 하지만 압니다. 우아하고 사근사근하게 말 건네는 방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놈의 세상이 그러한 소통을 허용할 정도로 넉넉한 이해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요. 그러기에 자식과 같은 우리들은 신산한 현실을 인정하고 당신들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인어공주>를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현실을 마냥 받아들이라며 계몽적으로 설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쿨하게 과거와 현실을 배치하며 보여줬기에 더욱 살갑게 느껴졌죠. 이러한 점이 바로 여타의 영화들보다 <인어공주>가 돋보이는 이유입니다.
큰 소리 한번 못 내며 숨 죽여 울고 웃어야만 했던 양촌리 김회장 댁의 맏며느리가 세인들의 가슴 속에 자리한 전통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우리네 어머니의 자화상이라면, 나영의 엄마인 당신의 우악스런 모습은 하루가 멀게 티격태격하는 저 방에서 주무시는 현실의 우리네 어머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낯간지러운 말일지 모르지만 저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지금쯤 당신은 해남 땅끝 마을에서 촬영 중인 <먼 길>이라는 또 다른 작품의 여정 길에 올라 여념이 없겠군요. 모든 이의 시선이 고두심씨에게로 모아져 진행되는 영화이니만큼 심적 부담이 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단함은 살아가는 데 있어 삶의 원천이 되는 자양분으로 이내 전이될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초로를 넘긴 여배우의 생물학적 나이가 치명적 결격 사유로 통하는 한국 영화판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당신의 역할이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중요한 잣대로 통용될 수도 있고요.
하오니, 자식들에게 손맛이 절로 나는 맛난 음식을 정성스레 해 준다는 마음으로 영화에 임해주셨으면 합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밥상과 함께 저희들이 준비해 놓을 테니까요.
그럼, 늘 행복한 나날만이 쭉~~~~~~~우욱 대기하시길 바라며 이만 줄일까 합니다.
그나저나 혹 이거 아시나요?
어느 사이트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당대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 <친절한 금자씨>의 여주인공이 원래는 이영애가 아니라 고두심씨였다고 하더군요. 시나리가 구상 당시에는 당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몇 고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이영애씨를 선택했지만요.
이천사년 칠월오일 새벽녘에 무비스트 서대원 기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