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은 국제적이다. 일본과 중국권 등 아시아 지역에서 툭 털어놓고 얘기해 ‘외화획득’의 주역인 인물. SM 기획이 공들여 키워낸 가수 ‘보아’처럼,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전지현도 오랜 시간 섬세하게 숙성시킨 기획 스타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파워는 막강해졌고, 이제 그녀의 이름 석자는 CF, 영화, 드라마 등을 아우르는 거대한 연예 산업의 ‘중심’이다.
곽재용 감독의 신작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는 이런 전지현에게 철저히 헌신하는 영화이자 반대로, 전지현이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매력을 200% 굳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전지현의, 전지현에 의한, 전지현을 위한 영화’라는 얘기. 그녀가 출연한 CF 상품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장면장면들은 <여친소>가 얼마나 강력한 마케팅으로 움직이고 있는 영화인지를 보여준다.
많고 많은 장소 중에, 우연히 ‘목욕탕’에서 나오다 ‘명우(장혁)’를 날치기로 오해하고 뒤쫓게 된 ‘경진(전지현)’.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카메라가 흐트러진 경진의 목욕용품을 훑고 지나가자 전지현이 CF에 출연했던 샴푸가 환히 보여진다. 또, 수갑 열쇠가 없어 명우와 꽁꽁(?) 엮이게 된 경진이 화장실에서 씻으면서 엿보이는 티셔츠의 로고는 전지현 전속의 인기 CF 의류 상품. 이어 절정에 달한 건, 명우는 찌개에 밥을 먹고 있는데, 경진 혼자 떠먹는 요쿠르트를 홀짝홀짝 먹는 장면이다. ‘꺽어야만’ 먹을 수 있는 그 요쿠르트는 최근 전지현이 출연한 CF로 인기를 모으는 중이다.
이렇게 협찬, 공동마케팅 등의 방식으로 제작비를 어느 정도 절감하면서, 영화적인 ‘재미’로까지 기능하는 전지현 CF 활용은 <여친소>의 ‘기획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요소다. <와호장룡>과 <영웅>을 담당했던 에드코 필름의 빌콩 대표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고, 한국, 중국, 홍콩에서 동시개봉되며, 이후 아시아 국가에서 순차적으로 개봉될 예정의 <여친소>. 게다가 <엽기적인 그녀>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일본에선, 최대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될 예정이라니, ‘전지현’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여친소>의 도입부는 한국영화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색채를 띠고 있다. 국가보안상 비행금지구역으로 정해져있다는 서울 지역 대부분의 야경을 항공촬영으로 멋지게 잡아내고 있는 것. <여친소>가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시장의 주목까지 기대되는 영화라 서울시가 홍보를 위해 특별히 허가했다는 후문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 배경 도시를 아름답게 유영하는 인트로처럼, <여친소>의 도입부는 서울 이곳저곳의 반짝이는 빌딩숲을 부드럽게 흘러다닌다.
마치 아시아의 ‘할리우드’처럼, 은근한 자신감으로 출발하는 <여친소>는 이후 펼쳐지는 스토리에서 전지현의 모든 매력을 발산해내기 시작한다.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보았던 그녀 특유의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표정, 남자 주인공을 압도하는 발랄하고 당당한 모습 등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중 명장면은 죽은 명우와 만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사선에 뛰어드는 경진을 비추는 장면. 폭파된 자동차에서 뻥하고 치솟는 시뻘건 불길을 뒤로 하고, 전지현이 한 쪽 다리를 삐딱하게 구부린채 서 있는 장면은 한 편의 폼나는 광고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또, 중반 이후부터 <여친소>를 거의 독자적으로 끌고 가는 캐릭터 경진이 우연한 사고로 죽게 된 명우를 껴안고 극도로 오열하는 모습, 그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워가는 모습 등에서 전지현은 주목할 만한 열연을 뿜어낸다. 그야말로 화장기 하나 없이 상황에 몰두하는 진지함이 엿보이는 것.
곽재용 감독이 그의 전작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의 분위기를 반씩 섞어놓은 듯한 <여친소>는 한편으로 올드하고, 다른 한편으론 쿨한 요소가 위험스럽게 혼합돼 있다. 때론 뮤직비디오, 때론 광고 스틸 사진처럼 멈춰서는 스타일리쉬한 화면 한 켠에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이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거나 장작 아궁이 등 옛날스런 소품들이 거리낌없이 등장하는 것.
한편 거론하고 넘어가자면 유치하면서도, 나름대로 깜찍한 맛이 있는 곽재용 감독의 연출 기법 하나가 <여친소>에서 그대로 활용된다. 주인공의 대사 처리로도 가능한 이야기를 장난스럽게 ‘영화 속 영화’처럼 구성하는 기법으로, <엽기적인 그녀>에선 ‘그녀’의 시나리오 내용이며, <여친소>에선 ‘약속할 때 새끼손가락을 거는 이유’에 얽힌 일화가 그렇다. 이 일화와 관련해 곽재용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유머스럽게 복제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클래식>에서 발딱 기절하던 버릇이 있던 ‘태수(이기우)’를 <여친소>에 대동한 것.
이밖에 김수로가 까메오 출연하는 등, 군데군데 장난스러움이 배치된 <여친소>에서 곽재용 감독이 날리는 결정타는 마지막 장면. 하지만 그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궁금하시다면 한번 보시길. 참, 아다치 미츠루의 화법을 빌려 말하자면, <여친소>는 앞서 말한 귀여움에도 불구하고, 멜로 영화다. 그것도 눈물 펑펑나게 하려 애쓰는 ‘전지현의, 전지현에 의한, 전지현을 위한’ 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