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주인공 박풍식(이성재)은 한다하는 집 마나님들 족족 등쳐먹고도 후환 산 적 없는 관계로 제비계의 일대 ‘전설’로 군림하는 인물. 급기야 경찰서장 부인이 그에게 거액 헌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괄괄한 여형사 연화(박솔미)가 풍식이 장기입원 중인 병원에 환자로 위장잠입 한다. 과연 제비계의 전설답게 매너 좋고 온화한 얼굴로 연화에게 접근한 풍식은 자신의 과거사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한다. 이런 대사와 함께.
“저 제비 아닙니다. 무도 예술갑니다!”
동시에,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등등의 대박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충무로에 쫘르르 명성을 떨치던 일명 ‘쌈마이 코미디’ 계의 ‘마이더스’ 박정우 감독은 자신의 연출 데뷔작 <바람의 전설>에 대해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이거 코미디 아닙니다. 휴먼 드라맙니다!’
‘무도 예술가를 자처하는 진지한 제비’라는 소재는 대단히 희극적이지만, 감독은 결코 그를 코미디의 도구로 활용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굳이 따지자면 감독의 전작들 중 에피소드보다 인물의 탐구에 좀더 집중한 <산책> <선물> 등의 필모그래피에 더 근접한 작품이랄까.
영화 <바람의 전설>은 러닝타임 대부분을 주인공 풍식의 과거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건강식품 판매상이던 풍식은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얼치기 제비인 동창생 만수(김수로)를 만나 춤에 첫발에 내딛는다. 그후 가업을 전폐한 채 전국 춤꾼들을 찾아다니며 ‘무도 예술’을 전수받고, 우연히 만난 부잣집 여인을 통해 춤으로 돈 버는 방법에 눈 떠버리고, 본의 아니게 제비 짓을 계속하다 가정파탄을 맞게 되는 대목까지, 감독은 별다른 잔재주나 요령 없이 TV 휴먼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직하고 담백하게 풍식의 과거사를 묘사한다. 문제는 그 과정이 너무 평탄하고 밋밋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몇몇 코믹한 대목들도 있다. 평소엔 관절염과 수전증에 시달리지만 춤만 추면 ‘선수’로 돌변하는 춤 선생, 욕구불만에 시달리다 못해 풍식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는 중년의 파트너, 갖가지 노래방 개인기와 익살스런 대사들로 시선을 끄는 김수로 등의 캐릭터는 폭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풍식이 감독의 애정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보니, 주변 캐릭터들은 그저 단발적인 에피소드만을 남긴 채 후다닥 화면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그들이 등장하지 않는 나머지 시간 대부분을, 우리는 주인공 풍식이 아련한 눈빛으로 회상하는 시시콜콜한 옛날이야기를 꼼짝 않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가장 아쉬운 점은, 잘만 찍었다면 이 영화의 단점들-느린 전개속도와 지나치게 차분한 서술방식, 그리고 내러티브의 사소한 허점 등-을 모두 상쇄시키기도 남았을 댄스 장면들이 충분히 아름답게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풍식은 우리 사회의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소외당하고 평가절하 된 자유주의자의 초상으로 묘사된다. 첫 스텝을 밟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와서 미친 듯이 춤에 빠져들었고, 궁극의 댄스를 완성했으나 실연할 곳이 없어서 경박하나마 캬바레를 찾았고, 돈이야 파트너들이 주기에 받았다. 결국 자신은 가장 원하는 것을 했을 뿐인데 세상은 그를 손가락질한다.
경직된 사회에 목 졸리던 한 소시민의 해방구로서, ‘춤’이라는 소재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국내 최초의 댄스영화’라는 선전문구가 무색하게, 이 영화의 댄스 신들은 서툴고 단조롭다. <바람의 전설>에서 춤은, 어디까지나 앞서 말한 작품의 주제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한다. 영상들로만 봐서는 박풍식이 어떻게 사교댄스계의 전설이 되었는지, 연화는 왜 그토록 춤의 매력에 빠져들어 경찰제복까지 벗어던졌는지, 풍식의 파트너들은 왜 수천만원을 갖다 바치고도 그를 고발하는 대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춤을 춰 달라고 애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만일 이 영화의 엉뚱한 시놉시스에 끌려, 타이트하게 연결되는 소소한 잔재미나 버라이어티하고 흥겨운 댄스 장면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라며 132분의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