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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만나게 될 주인공은 이런 점 집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내다보지 않지만 스스로 앞날을 설계하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치밀한 계산 하에 움직이는 이 남자의 하루하루는 충분히 예견된 것이고 공식이다. 스스로 내일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내고 그 공식에 맞춰 살아가는 삶. 어찌보면 인생 전체를 모두 계획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의 일부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 과연 이 사내는 어떻게 될까? 물론 당연히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하겠지만 인생이 그렇게 계획대로, 공식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다는 것 이걸 깨닫게 된다면 그의 삶은 한층 더 여유로와 지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들 한다. 그런데 이렇게 계획된 삶 속에 과연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이 얼마나 있을까?
매사를 꼬치꼬치 따지고 분석하기 좋아하는 루벤(벤 스틸러)은 심지어 퇴근시간에 자동차 사고로 죽을 확률, 사람들이 화장실에 갔다가 손을 씻지 않는 확률까지 훤히 꿰고 있을 정도니 얼마나 반듯한 삶인지 짐작이 가리라. 이미 그만의 계산법에 의해 그의 앞날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속에 완벽히 저장돼 있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명령이 떨어지면 오차 없이 수행해내는 컴퓨터와 같은 삶이다. 완벽하게 계획된 삶을 살아가던 루벤에게 신혼여행에서의 아내의 외도는 생각지도 못한 바이러스다. 그야말로 스킨스쿠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혼자 쓸쓸히 일상으로 돌아온 루벤. 빠른 정보화 사회를 대변하듯 이웃은 물론 회사에까지 소문이 쫙 퍼졌다. 로맨틱 코미디의 결말은 결혼이다. 연애는 꿈이고 결혼은 현실이라는 표현 때문인지 로맨틱 코미디는 대부분 결혼에 골인하거나 그 바로 앞에서 끝을 맺곤 했었다. 어째 로맨틱 코미디의 끝을 알리는 결혼식 장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싶더니 결국 루벤에게 이런 처절한 상황을 안겨준 것이다.
힘이 없어 보이는 친구의 배려아닌 배려로 별로 내키지 않는 파티에 따라갔다가 만난 여인이 바로 폴리(제니퍼 애니스톤). 중학교 동창인 폴리는 학창시절엔 공부 잘하고 똑똑했는데 지금은 웨이트리스로 루벤 앞에 선 것이다. 루벤과 폴리의 만남. 영화는 바로 이 지점부터 보는 사람에 따라 역경 코미디라 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를 향해 달려간다. 학창시절 똑똑하고 단정했던 폴리에 대한 루벤의 기억은 추억일 뿐 현재의 폴리는 허리에 문신을 새기고 살사 춤을 즐기며 열쇠를 찾기 위해 길바닥에 가방을 쏟아 붓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벤은 묘하게도 폴리에게 빠져든다. 애초에 자신이 세웠던 결혼이란 한 관문을 통과하려는 마음이 크게 작용한 덕이다. 폴리와 함께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서는 폴리가 자주 가는 매운 음식이 가득한 외국 음식점에도 가야하는데 루벤은 과민증 대장증세가 있어 40번 만나는 동안 19번의 설사를 하면서도 폴리를 만났고, 추지 못하는 살사를 엉거주춤 따라하다 폴리가 웬 남자와 격정적인 살사를 추자 본격적으로 살사를 배우는 노력까지, 그야말로 루벤은 변신을 작정한 듯 싶다. 이럴지니 몸치였던 루벤이 화려한 살사를 선보이는 순간 폴리의 표정은 이것이 바로 행복한 얼굴 표정의 표본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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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 남녀의 거듭나기 내지는 껍데기 벗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랑보다 자신의 계획과 계산이 우선이었던 루벤이 불확실한 사랑을 믿게 되고 두 집 살림을 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8명의 남자에 대한 상처로 마음을 닫고 살던 폴리 역시 사랑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미트 페어런츠”로 코믹한 캐릭터와 재치 넘치는 대사들을 선보였던 존 햄버그 감독의 장점이 그대로 유지되고 소박하지만 친근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약간은 어벙한 웃음을 선사하는 벤 스틸러와 시트콤 “프렌즈”를 통해 코믹 연기를 선보인 바 있는 제니퍼 애니스톤의 가세는 화려하진 않지만 안정감 있는 웃음을 유발한다.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가 두 남녀의 로맨틱한 사랑으로 포장하는데 급급하지만 이 영화는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해 지는 땅콩 같은 느낌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껍질 때문에 땅콩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