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결국은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독재를 그만둔 1979년에 저는 고1이었습니다. 유하 감독도, 일곱 살에 학교 갔거나 한 해를 꿇거나 하지 않았다면, 저와 같았을 겁니다. 영화는 1978년에 고2나 고3이었던 이들을 보여주는데, 감독이 아마도 79~80의 시기를 피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어쨌든 그 시기를 건드리지 않은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 시기를 다뤘다면 아무래도 조금은 다른 영화가 나왔겠지요. 더 좋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서울 왕십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집은 왕십리에서 10리는 더 들어간 뚝섬에 있었구요. 변두리였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말죽거리는 세상의 끝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독특한 지명이 주는 어감이 그랬을까요. 왠지 그곳에는 종일토록 축축한 안개가 끼어 있을 것 같은… 계절로 치면 말죽거리는 저에게 언제나 흐린 겨울이었습니다. 영화에도 나오는 E여고에 관한 소문은 그처럼 스산한 말죽거리의 이미지에 ‘살벌함’을 추가했더랬습니다. 그 학교 태권도부 애들에게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는 경고였지요. 실제로 그 여학생들에게 으슥한 골목으로 끌려가 돈을 뜯기다가(당시 서울 고삐리 말로는 ‘쎈타 깐다’고 했지요) 어설프게 반항하는 통에 다른 사람 얼굴이 되고 만 친구를 봤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누나들, 면도날을 씹어서 뱉으면 전봇대에도 팍팍 꽂혔대요.
말죽거리는 그렇게 전설적인 동네였습니다. 고1 겨울방학 때 학원에서 한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는요. 그 친구가 다니는 학교가 영화 속 정문고의 모델인 S고였습니다. 그 친구도 E여고 태권도부에 관해서는 제가 아는 수준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요즘 표현으로 하면 그 학교 얼짱이 누군데 하면서 제법 여학생 이름까지 대기에 이르러서는, 과연 네가 말죽거리통이구나… 순순히 인정하고 저의 ‘왕십리 잔혹사’도 간혹 들려주며 말죽거리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아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각 남쪽과 동쪽 변두리로부터 달려와 도심을 가로질러 서대문 학원가에서 만났고, 영화에서처럼 수학이나 영어를 구워삶는 한바탕 쇼를 구경한 뒤에, 번화한 광화문 거리를 거닐며 일용할 재미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때로는 미팅 장소로 유명한 남영동 ‘왕자 분식’에서 하하, 호호… 청춘을 구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슴 한 켠이 늘 아렸습니다. 허전하거나 답답했습니다. 저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시립 도서관에 다니기도 했는데, 도서관 매점에서 한 친구를 앞에 앉혀 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외투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까닭 없이 울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한 여학생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랑도 우정도 금이 간 채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또 동네 친구들과 함께 사설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는데, 대개는 밤 새워 노는 날이 많았습니다. 놀면 주로 독서실 건물 옥상에서 놀았고, 물론 남녀 합석이었고, 추워지면 동네 술집이나 단골 음악 다방으로 기어들었습니다. 술과 커피와 담배와 음악… 그런 것들로 채우려 했던 저의, 우리들의 빈 속은 잔혹했습니다. 잔혹한 것은 속이었습니다.
잔혹한 것이 속이었다면, 겉은, 바깥은 살벌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교사의 따귀를 갈기는 교장과 한 지붕 아래서 지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그 장면의 리얼리티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군사교육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이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군복을 입고 총검술을 훈련시킨 그 사람들이 모두 다른 교사들보다 특별히 나빴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엽기적인 교사들이 참 다양하게도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설령 인격이 고매하기 그지없다 해도 군인들은 교련이라는 되먹지 않은 과목의 교사가 되어 학교를 드나들면 안 되었던 겁니다. 그 문제는 인간성보다 시스템에 관한 거지요. 그들과 그 과목의 존재 자체가 교육을 뒤틀리게 하고 사회를 불구로 만들어 놨습니다. 그 폐해가 얼마나 큰지… 뭐라고 말을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