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는 모든 매체들이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바이자 이 영화를 다섯 줄 이내로 요약해보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심술궂고 뻔뻔스러우며 언제나 불만으로 입이 쭉 나와 있는 우리의 노처녀 안우아 양은 똑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크리스마스용 연인영화’라는 컨셉에 딱 맞춘 이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솔로들에겐 극도의 닭살을, 이별을 경험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쓴맛과 염장지름을 유효적절하게 제공하는 영화다. 도처에 사랑이 넘쳐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영화는 솔로들과 막 이별한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세상 시름 잠깐 잊자고 들어간 영화관에서까지 존재의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못된? 영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연애란 걸 하다가, 그리고 꽤나 관계가 오래 간다 싶었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이별을 하게 되었고, 또 이번 가을 유난히도 아는 커플들마다 깨지는 것을 목격한 우리의 안우아 양은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평소에도 나와 있는 입술을 5센치는 더 쭉 내민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글을 써 보라고 한 무비스트의 모 기자를 향해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니, 이 아저씨가 누구 염장을 지르려고 아주 작정을 했나. 그래, 자기는 연애 시작했다 이거지? 주거써!
밖에 나오면 어떤가. 술 사줄 때만 ‘누난 역시 화끈하고 멋져~ 싸랑해요~’를 외치는 후배들과, 잠을 좀 잘라치면 전화를 걸어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전화기를 놓치 못하게 만드는 ‘사랑하는 친구’도 있다. 이렇게 주변에 사랑이 넘쳐남에도 우리의 안우아 양은 뭔가가 허전하고 힘들다. 그리고 자신의 미니홈피에 끄적인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건 기대도 안 해, 그래도 너뿐이더라고 말해주는 놈씨가 서른 평생 딱 한 명이었단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영화 주인공들은 잘만 눈 맞고 잘만 연애하는데 말야. 아무리 내가 나이를 쬐깐 먹었단 한들, 아무리 내가 미모하곤 아주 쪼~금 거리가 있다 한들 말이지.
지난 번 연애가 깨진 후 연애나 결혼은 서로를 구속하기 때문에 싫다고 큰소리 탕탕 쳤지만 공주병이 아주 없지도 않은 안우아 양이 <러브 액츄얼리>라는 영화를 보며 얼마나 삐죽댔을지는 무비스트 독자들 누구나 충분히 짐작 가능할 것이다. “나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안우아 양은 이따만 한 침을 참 많이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한다. 얘, 직장 동료를 짝사랑한다고 사장이 나서서 뭔가 좀 잘해보라고 격려하는 경우가 과연 현실에 있긴 하니? 게다가 그 여잔 왜 그리 정신없이 구는 건데? 젊은 여자랑 바람나는 남편 에피소드는 어떻고? 그렇게 흔해빠진 경우에 왜 항상 여자만 눈물 뚝뚝 흘리며 피해자 역을 해야 돼? 게다가 40대의 매력적인 독신남 수상이란 건 웬 하이틴 로맨스적 설정이라니?
그리고 그런 남자들은 왜 항상 젊은 여자랑 사랑에 빠져? 참, 그 여자는 참 많이도 뚱뚱하더라. 그 능글맞고 주책만 부리는 늙은 가수는 뭐니. 그 나이 들어서 그렇게 주책부리는 것도 못 봐주겠는데 몇십 년 동안 지는 실컷 재미보면서 맨날 부려먹고 막 대했던 매니저한테 크리스마스날 찾아가서 고백을 해? 아휴, 징그러워. 친구의 신부를 사랑하는 남자 에피소드는 어떻고? 난 처음에 신랑이랑 그 친구랑 동성애 커플인 줄 알았다 얘. 게다가 그 열 두 살짜린지 열 세 살짜린지 지네 반 여자애 짝사랑하면서 전전긍긍하는 꼬마애는 어쩜 그리 애늙은이 같은 소리만 한다니. 지 동생한테 마누라 뺏기는 그 남자는 또 뭐고. 그리고 파출부하고 사랑에 빠지다니 너무 통속적이고 뻔하지 않니?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다구! 역시 크리스마스용 연인영화들은 한심하고 얄팍하고 무책임해!
게다가 우리의 안우아 양은 <유주얼 서스펙트>가 개봉했을 때 “범인은 절름발이다!” 사건, <식스 센스> 개봉 때 “브루스 윌리스는 귀신이다!” 사건에 이 친구와 함께 분개하며 커피숍의 쿠션을 물어뜯지 않았던가. 안우아 양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차피 이 정도는 보도자료나 찌라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걸 뭐... 그래도 친구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안우아 양은 아까에 비하면 지나치게 비굴하다 싶은 목소리로 변명을 시작한다.
아니 뭐... 이 영화가 워낙 여러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에피소드가 한 열 개는 돼. 그 사람들이 다 이렇게 저렇게 연결이 돼 있거든. 친구에 여동생에 뭐 그런 식이라서 말야. 근데 내가 얘기한 건 아주 단편적이고 진짜 빙산의 일각이라구. 각 에피소드의 아주 기본적인 상황들만 얘기한 거야. 무비스트에서도 <러브 액츄얼리> 소개가 이 정도는 나와 있어. 사실 각 에피소드마다 꽤나 감동적이고 슬프고 웃긴 장면들도 진짜 많아. 게다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들이 포착되더라구. 슬픔, 두근거림, 떨림, 두려움, 기쁨, 환희, 눈물... 이런저런 등장인물들의 감정도 그렇고 그 사람들의 각각의 사랑을 그리는 방식도 참 섬세하고 다정다감해. 각 인물들 사연들이 얼마나 재밌는데. 그 뚱뚱한 여자도 사실 되게 사랑스러워. 영화 볼 만 하다니까. 이 영화 어쨌건 로맨틱 코미디로 유명한 ‘워킹 타이틀’ 회사 거잖아. 게다가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랑 <노팅힐>이랑 <브리짓 존스의 일기>도 다 ‘워킹 타이틀’ 거야.
그리고 그 영화들에서 각본 썼던 리차드 커티스가 이것도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으로 데뷔한 거라 대사들도 맛깔나고... 하여간 영화를 직접 보고 나면 내가 너한테 말한 부분은 영화 전체를 보면 진짜 별 거 아니란 걸 알게 될 거라구. 그리고 크리스마스용 연인영화라는 컨셉을 이렇게 분명히 하면서도 이 정도 퀄리티 뽑아낼 수 있다면 나로선 언제나 환영이야. 난 사실 영화보며 슬프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해서 눈물도 꽤 흘렸다니까.
그러나 싸늘한 자신의 방에 들어서서 불을 켜고 나서야 아뿔사, 친구의 수법에 또 한번 말려들었음을 깨닫는다. 그 친구에게 또다시 밥과 술을 샀을 뿐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짰었다는 쪽팔린 사실까지 자기도 모르게 고백해버리지 않았는가. 화난 척 하며 밥과 차, 술, 꽃까지 얻어내는 건 그 친구의 주특기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무리 자책한들 이미 사건은 다 벌어지고 난 후다. 안우아 양은 괜히 심술을 부리다가 자기가 친 덫에 자기가 걸려들었다며 침대에 그냥 주저앉고 만다.
사실 안우아 양은 영화의 시작에서 입을 삐죽이긴 했어도 금방 영화에 빠져들었다. 남들은 이미 다 알지만 본인은 은밀히 지켜왔다고 생각하는 안우아 양의 비밀 아닌 비밀이란, 그녀가 겉으로는 아무리 아닌 척 해도 로맨틱 코미디와 멜러영화들을 은근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랑예찬 영화들은 더욱. 인류가 가꿔온 문명의 70% 이상이 연애를 잘 하기 위해서라는 이론을 마음 속 깊이 지지하고 있는 그녀는 심지어 문학도 연애편지를 잘 쓰기 위해서 발달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사랑이 빠지면 그건 국화 없는 국화빵이요 속 빈 공갈빵이라는 게 안우아 양의 지론이다. 물론, 남들에게 우아하게 보이고 고상떨기 좋아하는 안우아 양이 이런 생각을 친구들에게 직접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안우아 양은 이제 ‘노처녀’ 소리를 들을 만큼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고, 그 동안 자기는 단 한 번의 사랑을 했으며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주변 사람들을 보아왔다. 안우아 양의 결론은 그것이다. 서로 사랑해서 마침내 함께 눈을 맞출 수 있는 상황이란 게 얼마나 쉽지 않게 오는가. 그 순간이란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가. 안우아 양은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안우아 양이 하이 톤의 목소리로 섣불리 영화를 성토하며 심술을 부렸던 건, 어쩌면 그녀가 이번에 맞게 될 외로운 크리스마스가 조금 겁이 나서이기도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이제까지 맞은 서른 번 혹은 그 이상의 크리스마스 중 그렇게 낭만적이고 기쁘고 황홀한 크리스마스는 별로 없었다. 연애할 당시에도 안우아 양은 크리스마스에 들떠서 다니다가 사고치면 쪽팔리니 그냥 우아하고 조용하게 보내는 쪽을 고집해 왔다. <러브 액츄얼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마스날 청혼을 하거나, 마침내 사랑을 확인하거나, 낭만적인 첫 키스를 나누는 것을 보며, 안우아 양은 이제까지 보내온 크리스마스들이 조금 후회스러움과 동시에 한 달 앞으로 바짝 다가온 크리스마스가 유난히 쓸쓸하고 겁나게 느껴지는 것이다.
불 꺼진 방 안에서 안우아 양은 침대에 벌렁 누워 혼자 생각한다. 그래, 인심썼다, 다들 행복한 크리스마스 맞아라. 서로 눈맞고 키스하고 껴안고 청혼하는 크리스마스를 맞아라. 그러기도 쉽지 않단다. 뭐, 나도 언젠간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을 때가 오겠지. 애인이 없으면 뭐 어떨쏘냐. 오랫동안 얼굴 못 본 친구들하고 조그맣게 파티를 하거나, 이번 가을 와장창 깨진 사람들 모아서 이벤트나 벌여야겠어. 그러다 보면 언젠간 나도, 정말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 있을 때가 오지 않을까?
20대에만 사랑하라는 법 있냐. 30대에도,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맞게 될 40대, 50대, 60대에도, 사랑이란 영구불멸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언젠간 나도 해피 러브 바이러스에 된통 걸려서 정신 못 차릴 때가 다시, 오겠지. 그땐 나이들어 주책이라고 주변에서 아무리 놀려도, 뻑쩍지근하고 요란한 로맨틱한 크리스마스를 만들고 말 거야.
사랑은 어디에나 도처에 넘쳐난다잖아. 사랑이란 실제로 그런 거지. 일명, 러브, 액츄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