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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하면 '숙명의 여인'이고 의미가 확장되면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위험한 요부', 즉 악녀라고 해석될 수 있는 프랑스어인 '팜므 파탈'. 미세한 의미까지 포착될 순 없겠지만 요부라는 우리 말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팜므 파탈이라고 혀를 굴러 말해줘야 왠지 근사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 말이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팜므 파탈의 미소라는 주장이 있었다지만, 우리가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팜므 파탈은 모나리자보다는 엄청 섹시하고 예쁜 여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상기한 대로 팜므 파탈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이란 십중팔구 근사한 외모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아무 여자나 가지기 힘든 출중한 '몸뚱아리'가 필요하다는 말씀. 짐작하건대 분명 남자들이 만들어 냈을 악의적인 표현일 '팜므 파탈'은 언제부턴가 무수한 영화들의 단골 소재가 되어 왔다.
어떤 사건으로부터 구해달라는 신호를 고혹적인 자태로 호소했던 누아르 영화들에서의 팜므 파탈들. 그녀들은 끈적끈적한 눈빛과 교태를 부리며 자신의 위험한 공모에 순진한 남자들을 꼬여들게 한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의 제시카 랭, <원초적 본능>에서의 샤론 스톤, <아이 오브 비홀더>의 애슐리 쥬드, < LA 컨피덴셜>의 킴 베이싱어, <컬러 오브 나이트>의 제인 마치 등등. 도덕적인 잣대만 들이대지 않는다면 남자의 인생을 망치든, 까먹든지 간에 요부는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특출난 존재들이다. 게다가 요부들에게는 남자를 호리는 데 효과적인 '몸'은 기본이요, 그들을 깜박 속게 만드는 치밀한 정신적 능력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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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 가며 차츰 사랑이 싹터가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심드렁하게 영화를 감상하던 필자는 주인공 남자의 다소 내성적이고 맹해보이는 이미지나 웹사이트를 검색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이재용 감독의 <순애보>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현대인의 소통 부재와 고독 등등의 심오한 주제를 떠올리며 빈곤한 상상력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항상 안이한 태도로 영화를 감상하다 뜻밖의 반전에 뒤통수를 얻어맞던 필자는 이 영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디아의 생일날, 둘 만의 로맨틱한 파티를 기대하던 존에게 그녀의 사촌이랍시고 무례하게 찾아온 두 남자가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이 영화의 황당한 반전을 만들어 낸다.
알고 보니 나디아의 버스데이(birthday)면 찾아오는 이 두 남자는 그녀와 한 패인 고단수 강도였던 것. 유치하게 말하면 결혼을 미끼로 교묘하게 돈을 뜯어내는 꽃뱀에게 당한 우리네 농촌 총각의 경우가 한마디로 존의 처지다. 하지만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모습으로 존을 농락하는 팜므 파탈로 등장한 니콜 키드먼은 <투다이 포>만큼의 강렬한 연기를 선사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단연 압권은 뱅상 카셀의 마초 연기. 3인조 러시아 강도로 설정된 니콜 키드먼, 뱅상 카셀, 마티유 카소비츠는 러시아 배우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들이 보기에 실소를 터트리진 않을 만큼 모두 안정적인 연기를 뿜어낸다. 그러나 반전을 보여준 이후부터 싱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나디아와 존을 로맨스 구도로 끌고가는 등 중구난방하는 영화의 플롯 때문인지 나중에는 그리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보여지진 않는다.
팜므 파탈에 대한 안좋은 선입견을 가진 필자조차 깜빡하고 그녀의 분탕질에 넋놓고 놀아날 정도로 멋진 범죄 영화를 끝까지 기대했던 필자. 아쉽게도 토론토 영화제와 선댄스 영화제에 공개되어 관심을 모았다는 이 영화는 음란한 기품과 동시에 명석한 두뇌를 선보인 매혹적인 요부의 위험한 승부를 펼쳐 보이기엔 2%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