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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젊은이들의 두 당면과제, 즉 영어와 사랑에는 아닌게 아니라 서로 비슷한 점도 많다. 첫째, 젊을 때 해놔야(?) 후회가 없다. 둘째, 어디까지나 선택사양임에도 불구, 못하면 노골적으로 바보 취급받는다. 그리고 셋째. 사랑도 영어도 용기가 중요하다. 영어 공부하러 왔다 사랑공부 해 가는 두 젊음을 코믹하게 스케치해내는 <영어완전정복>이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도 그런 유사점들. 공통의 관심사 겸 공통의 치부를 웃음의 코드로 전환하는 것이 영화가 가진 무기란 얘기다.
한편 제목이 풍기는 장엄한 뉘앙스처럼 한국어보다 영어가 중요한, 뭔가 잘못된 나라 대한민국의 세태에 초점을 맞췄다면 모르긴 해도 영화는 쌉싸름한 맛의 블랙코미디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처음 기획될 당시 <영어완전정복>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영어 콤플렉스라는 유일한 공통점을 매개로 모이는 풍자성 강한 코미디의 모습으로 출발했다. 이후 에피소드 중심의 구성 때문에 내러티브가 약하다고 판단한 제작진이 내린 결정은 원안을 과감히 버리고 당초 주인공 중 나영주 만을 부각시키는 것. 그렇게 해서 탄생된 영화는 각기 동사무소 대표로, 혹은 어렸을 때 입양된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영어학원을 찾는 영주와 문수가 엮어가는 사랑이야기로 환골탈태했다. 물론 원안에 비해 비중은 줄었을 테지만 개성적인 조연들이 번갈아 뿌려대는 웃음들도 꽤 맛있는 양념으로 작용한다. 단어실력은 빵빵한데 리스닝과 스피킹 실력은 지옥에 가까운―고로 우리 시대 중년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아저씨와 학원을 수십 개 째 전전하는 아가씨 같은 클래스메이트들은 그 대표적인 예.
어느 날 평화로운 동사무소에 파란 눈의 외계인, 아니 외국인이 침입한다. 손짓 발짓 다 동원해보지만 간단한 의사소통조차 불능. 사무실은 패닉에 휩싸이고 소장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직원 한 명을 영어학원으로 급파한다. 결국 엄정한 공정―소주병 돌리기―을 거쳐 선발된 인재가 바로 나영주(이나영)다. 목표는 온리 영어 완전 정복. 그러나 채 간단한 인사말 한 마디 마스터하기 전에 영주는 엘리베이터에서 잃어버린 운동화를 찾아 신겨준 구두 세일즈맨 문수(장혁)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
한편 외모 면에서 기준미달인 경우를 제외한 뭇 여성에게 추파를 던져대는 문수도 나름의 아픔이 있다.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 여동생을 미국으로 보내야 했던 것. 입양됐던 여동생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공부하고는 아무리 봐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문수를 영어학원으로 떠민다. 큐피트의 화살에 관통당한 영주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애정공세를 펼치지만, 문수의 눈은 쉽게 영주를 향해주지 않는다. 현실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화려한 건 시공을 초월한 가공할 영주의 망상들 뿐.
엉뚱한 로맨틱 코미디 <영어완전정복>의 방점은 로맨틱보다는 코미디에 찍혀있다.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을 떠나, <영어완전정복>의 줄거리가 단출하다는 것은 부인의 여지없는 사실일 것. 기상천외한 콩글리쉬 메들리만으로 러닝타임을 메우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그리하여 처방된 영주의 상상이라는 꽤 막강한 비밀 무기와 애니메이션, 버추얼 게임에 이르는 다양한 효과들은 양념을 넘어서 하나의 정체성이 된다. 관객의 호불호도 이 지점에서 갈릴 만 하다. 주인공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흐름보다는 톡톡 튀는―때로는 어색한 시트콤처럼 불쑥 도드라지기도 하는―에피소드와 괴짜 캐릭터들의 좌충우돌에 초점을 맞춘 탓에 영화는 상큼발랄하지만, 중후반으로 흘러갈수록 외려 지지부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특히 영어학원 식구들을 영주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이끄는 '영어 하는 돼지' 에피소드는 실소를 머금게 하는 부분. 거기 더해 감독이 주로 묵직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던 중견 김성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이 실망을 안고 극장을 뜨는 관객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영어완전정복>은 안온하고 귀염성 있는 코미디다. 종종 흐름을 해치는 만화적인 변칙들은 잔재주라기보다는 감독의 지향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로 보이고, 그런 면에서 꽤 긍정적으로 해석 가능하다. 영화식 발음으로 하면 노르말(normal)한 주인공들과 함께 엄숙(?)해 보이는 감독의 카오스투성이 내면을 엿보는 재미. 특히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이 쓴 시나리오들이 그렇듯 불쑥불쑥 불거져 나오는 영주의 상상은 관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간다. 조폭이나 성에 관련된 케케묵고 불편한 농담 없이 깔끔한 웃음을 주려 한 것도 호감으로 작용하는 부분. 우선 객석에서 흘러나오는 박장대소의 데시벨만 보더라도 <영어완전정복>이 꽤 재미있는 코미디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